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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연구 KCI 등재 The Nammyonghak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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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제55권 (2017년 9월) 8

1.
2017.09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덕천서원의 공간과 명칭에 담긴 의미를 심도 있게 고찰한 것이다. 서원의 공간구성과 공간명칭에는 그 서원에 제향 되고 있는 선현의 학문과 사상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덕천서원의 경우 남 명사상이 공간과 명칭에 깊이 투영되어 있다. 덕천서원의 공간구성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 동재·서재의 앞 에 方塘을 만들고, 그 연못에 연꽃과 소나무 한 그루씩 심어놓은 것이 다. 방당을 만든 것은 주자의 「觀書有感」에서 취한 것으로, 天人合一을 지향하는 정신이 깃들어 있다. 또 方塘에 소나무를 심은 것은 소나무와 같이 변치 않는 남명의 志節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방당에 연꽃을 심은 것은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언제나 淸香을 잃지 않는 연꽃에서 적극적으로 현실정치에 참여하면서도 지조를 잃지 않은 柳下 惠의 모습을 발견한 남명의 현실주의 세계관을 드러낸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방당은 종합적으로 남명의 出處大節과 隱逸이 아닌 處士로 서의 정신지향을 공간에 구현해 놓은 것이다. 공간명칭을 살펴보면, 堂名을 敬義堂이라 하고, 동재·서재의 명칭을 사액이 되고 난 뒤 進德齋·修業齋로 바꾸었는데, 이 속에도 각별한 의미 가 담겨 있다. 남명선생편년에 ‘남명의 학문은 주역 坤卦 六二爻와 乾卦 九三爻에서 터득한 것이 있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곤괘의 ‘敬 以直內 義以方外’와 건괘의 ‘君子 進德修業 忠信 所以進德也 修辭立其 誠 所以居業也’를 가리킨다. 이를 보면 남명은 敬·義와 忠信·修辭를 공 부의 두 축으로 중시한 것을 알 수 있다. 덕천서원 경의당과 진덕재·수 업재에는 심성수양의 실천을 강조한 남명학의 핵심을 모두 갖추어 놓 았다. 문루의 명칭이 幽貞門에서 왜 時靜門으로 바뀌었는지, 그 의미는 무 엇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전하는 설이 없다. 그렇지만 여기에도 남 명사상이 투영되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鷄伏堂·雷龍亭 등의 명칭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남명은 평상시 淵黙 같은 主靜工夫를 위주로 하였으 니, 時靜의 의미는 그때그때 수시로 主靜의 涵養을 추구하고자 한 남명 의 학문정신을 덕천서원 전체를 포괄하는 문의 이름에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또한 幽貞의 의미가 현실을 외면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현실을 등지지 않은 남명의 정신을 투영하여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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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서원은 南冥 曺植(1501-1572)을 향사하는 서원이다. 그 문인 寧無成 河應圖가 자신의 田莊을 서원 터로 제공하여서 처음 德山書院 으로 창건을 보게 되었다. 이 서원의 창설은 남명의 감화를 받은 여러 문인 들의 스승을 존모하는 마음과 이를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경상도 관찰사와 진주 목사가 적극적으로 도와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서원은 설립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강학활동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학파 내에서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는 원장과 원임이 있어서 제대로 운영하여야만, 제향된 인물이 추구했던 학문 정신을 체득할 수 있고, 나아가 사회적으로 교화의 역할 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 이 서원의 운영을 주도하였던가 하는 문제는 서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문제의 하나다. 덕천서원은 남명의 만년 강학지에 설립된 것이어서 남명 문인들이 대거 참여하여 설립이 이루어졌고, 따라서 초기에 서원 운영을 담당했 던 이들은 ‘범남명학파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남명학파가 주도하던 북인 세력이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정치적 으로 패퇴함으로써 급변할 수밖에 없었다.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파를 주도하던 가문으로 단성 지역에는 안동권 씨, 성주이씨, 합천이씨, 진주류씨, 상산김씨 등이 있었고, 진주 지역으 로는 안계‧명석 및 수곡‧단목에 거주하는 진양하씨 사직공파와 시랑공 파, 나동의 태안박씨, 소남의 함안조씨 등이 있었다. 물론 이들 가문 이외에도 여러 십여 가문이 있지만 원임에 선임된 숫자의 측면에서 보면 이들 가문이 덕천서원의 운영을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 덕천서원의 창건 및 초기 중건에 관여하였던 인물의 후손들이거나, 초기 원생록에 이름이 올라 있던 인물들의 후손 들이다. 남명학파는 인조반정 이후 30여 년이 지난 즈음 남명집 훼판 사건을 기점으로 해서 서인화와 남인화가 이루어지는데 서원의 운영은 남인이 주도하였다. 따라서 이들 가문은 모두 남인 가문에 속한다. 그러므로 사우의 연원 또한 남인 계통을 따라서, 갈암‧밀암‧대산‧정재‧한주 등과 성호‧순암‧번암‧성재 등을 종유한 인물들이 서원 운영을 주도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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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德山洞府를 문화지리학적 측면에서 접근한 것인 바, 남명이 산천재에 게시했던 「신명사도」와 덕산동부가 일정한 함수관계에 놓인 다는 가설에 기반한 것이다. 구조적 측면에서 입덕문은 口關 역할을 하며, 확 트인 덕산동부는 태일진군이 다스리는 나라일 수 있다. 사상적 측면에서는 堯舜日月의 유가적 이상과 武陵桃源의 도가적 이상이 상호 맞물린다. 덕산 공간 역시 「신명사도」에 근거하여 그 경계지점에 입덕 문이 놓이고, 덕천벼리라는 좁은 공간을 통과하면 안쪽에는 넓은 공간 이 나타난다. 廣-狹-廣의 구조 속에서 독특한 문화가 생성되었던 것 이다. 덕산에는 남명 관련 이야기가 언중에 의해 다양하게 전해지고 있다. 남명이 덕산에서 사치를 즐겼다, 자신을 사모하다가 구렁이가 된 처녀 와 함께 살았다, 幽宅을 친구에게 주었다가 사후에 돌려받았다, 퇴계와 도술 시합을 벌여 이겼다는 등의 이야기가 대체로 그러한 것이다. 이러 한 이야기는 주로 덕산 일대에 민중 사이에서 광범하게 전해지는 것으 로, 「신명사도」와 덕산동부의 상관성과는 또 다른 측면의 구술문화를 형성하였다. 민중들은 남명 이야기를 흥미 본위의 대항 담론으로 이끌 어 간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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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유학자들에게는 일상에서 유학 덕목을 실천하는 기초였던 심신관리는 修身이며 이를 養生, 養心이라 하였다. 종래 남명학 연구에 서 남명이야 말로 자기수양에 철저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남명과 그 문파들의 수신 즉 심신관리의 지혜에 관한 선행연구는 많지 않다. 본고 는 덕천서원 유생들의 심신관리 지혜의 모태를 남명이 찬술한 성리학 요약서인 學記類編, 또 남명과 그의 제자들의 행적에서 찾고자 하였 다. 조선시대 성리학적 질서에서 의학은 도덕적인 수양을 방해하는 잡학 이자 자기 몸을 보존하고 부모님께 효를 다하기 위한 일상적인 기술로 취급되었고 이는 유학이 시작된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유 학과 의학은 태동과 발전의 역사에서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특히 송 대 신유학에서 신체원리와 병리현상의 개념이 적극 수용되면서 의 학의 생명적 세계관이 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었다. 이러한 송 대 신유학의 생명적 세계관이 반영된 글이 성리대전과 당대 유학자 들의 言表들인데 학기유편에서는 주로 이들의 글이 인용되어 있다. 학기유편에 근거한 생명적・역동적・실천적 세계관은 곽재우, 정인 홍, 김우옹, 정구 등의 예와 같이 행동하는 삶의 바탕이자 보이지 않는 계율로 작동하였을 것이다. 남명의 심신관리와 치병에 관한 행적은 주로 남명집에서 확인되었 다. 남명은 몸을 다스리기 이전에 마음 수양을 기초로 보고 ‘좌우명’, ‘패검명’, ‘혁대명’ 등을 지니고 '‘神明舍圖’를 붙여놓고 평생 ‘銘’으로 삼아 실천하였다. 또 남명은 정신을 한 군데에 집중하고자 항상 정좌수 행과 猩猩子의 쇠방울 소리, 敬義劍의 날카로운 형태를 통해 수시로 의식을 각성시키는 등 특별한 무언가를 갖추고 행하는 심신수양의 방 법을 보여주었다. 남명이 일생동안 겪은 질병에 대해서는 9세 때 사망 직전에 이를 정도로 심한 질병을 앓았다는 것이 연보의 기록이고 문집에서는 거의 40대 이후의 질병과 치료에 관한 내용이 있을 뿐이다. 다만 20년 가까 이 반복적으로 기록된 내용을 통해서 남명의 현기증과 두통이 고질적 지병으로 확인되었다. 남명의 성정은 자신은 물론 일상다반사에 대해 지극히 엄정했다. 이와 같은 그의 성정이 만성적인 피로감과 두통으로 이어진 것은 아닐지 추측해 보았다. 남명은 약재를 구하거나 약을 짓는 등 본인과 가족의 질병에 대해 직접 치료를 행했던 것으로 나타나 그의 행장 등에 기록된 다양한 분야 에 관한 능통하고 의약도 섭렵했다는 구절과 다르지 않았다. 남명과는 동시대를 살면서 서로 다른 학문관과 출사관을 가졌던 퇴계와 심신관 리, 의료행적을 비교해 보았다. 퇴계 본인은 물론 지인들에 대해 행한 다양한 의료 행적이 전하지만 오늘날 유학자의 양생서로서 가장 널리 알려진 활인심방의 편저하기도 하였다. 퇴계 뿐 아니라 16세기 이후 에는 유학자들의 다양한 양생서가 저술되었다. 그러나 남명 문하에서 는 망우당 곽재우의 양심요결이라는 제목만 전하고 있을 뿐 이렇다 할 양생서는 전하지 않는다. 남명의 문인 중 한강 정구는 의서저술과 대민의료시설 재건 등을 통해 修己와 安人의 실천의지를 보여주었다. 한강은 의서 외에도 대민 구제를 위해 성주의국을 설치하였다. 성주의국은 임진왜란 후에 피폐 해진 의료시설로 한강은 이를 재건해 대민의료의 기반을 갖추고자 하 였다. 한강은 60대에 이르러 개인적으로 내우외환을 겪고 73세에 중풍으 로 오른쪽이 마비되기에 이른다. 한강은 중풍 발병 이듬해인 1616년부 터 중풍 치료를 위해 온천기행을 시작하여 이후 3년간 지속하였다. 한 강의 온천치료를 위한 기행은 제자 이윤우가 기록한 「봉산욕행록」에 자세하다. 봉산욕행록은 1617년 7월부터 9월의 기록으로, 45일 동안 의 여정, 한강이 매일 반복적으로 목욕요법을 행하고 제자와 관료를 접대하는 등의 내용이 쓰여있다. 남명의 또 다른 문인 망우당 곽재우 역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 으로 나서는 등 남명의 충군애민 실천 의지를 본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망우당은 개인적으로 불우했고 관료생활도 평탄하지 않았다. 이 과정 에서 망우당은 불로장생과 신선의 세계에 심취하였고 일반적인 유학자 들의 양생이 아닌 수련 양생의 길을 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망우당이 50대에 이르러 벽곡조식을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망우당의 벽곡조 식에 대해 허균과 성여신은 한나라 장량에 버금가는 처세술이었다고 변호하였다. 한국도교사에서 망우당에 대한 평가는 조선단학파의 맥을 잇는 한 사람이고 민간에서는 의병과 신선을 넘나드는 전설적인 인물 로, 덕천서원의 유생들에게는 남다른 기개의 선배로 남았을 것이다. 남명을 비롯한 문우, 제자의 박학풍은 남명문파들의 공통된 특징으 로 나타나고 있다. 덕천서원 건립에 참여했던 각재 하항, 남명의 문인 내암 정인홍의 제자인 함양 선비 고대 정경운 등의 예와 같이 의약으로 자신과 가족을 치료하고, 대민구휼을 위해 사우들과 의론을 펼치는 등 남명의 충군애민 실천사상이 재전제자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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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필자가 관심을 갖고 진행하고 있는 한자 자소관련 연구 작업 의 일환으로서, 그 동안 발표해 온 해서체 자소분석 결과와 簡體字 部件 관련 분석결과를 기초로 하여, 해서체와 간체자 간의 자소대응관계를 구체적으로 비교분석해 보기 위하여 작성되었다. 양자간의 대응관계를 비교하기 위한 한자의 字量은 중국 敎育部와 國家語言文字工作委員會가 제정하고, 2013년 國務院이 최종 공포한 통용규범한자표의 8,105字로 하였다. 본고는 이들 8,105들을 대상으로 하여, 우선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작업을 시도하였다. 첫째, 8,105자 가운데 자소대체가 발생한 글자들을 먼저 추려내고, 부분대체 혹은 일괄대체인가를 확인하여, 해서체 자소의 자소별 沿用 및 대체 현황을 정리하였다. 개별 자소들은 전통 해서체 자전에서 사용 한 214部首를 이용하여 나열하였다. 둘째, 첫 번째 작업을 통하여 파악된 해서체와 간체자의 기초적 자소 대응관계를 이용하여, 간체자 자소가 내포하고 해서체 자소들을 정리 하여 나열하였다. 이상의 두 가지 기초 작업을 통하여 추출된 결과들을 대상으로, 대체 방식의 유형들을 정리하고, 아래와 같은 문제들을 분석하여 그 득실을 논하였다. 첫째, 자소대체 과정에서의 일관성 문제 둘째, 자소대체의 적합성과 모호성 문제 셋째, 字素대체와 成字대체 문제 넷째, 同形化 문제 다섯째,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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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는 동아시아적 자연학의 한 갈래이자 계절의 변화를 천 문기상학적 이론으로 접근시킨 고대 월령론이 성립하고 전개되는 문제 를 살펴보았다. 이때 고대 동아시아적 월령론이 정초되는 사상과 이론 의 기초로서 천문학과 기상학 관점의 논의를 주목하였고, 특히 계절의 변화에 따라 배태되는 자연물의 관찰경험적 지식이 광범위한 물후론으 로 성립하는 측면을 드러내고자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본고에서는 먼저 그 계절의 변화론을 천문관측이론으로 설명하려는 상서 「요전」의 사중성 문제를 살펴보았고, 이를 확대하 여 매월의 별자리 관찰과 물후로 연결시킨 대대례기 「하소정」의 월 령론을 고찰하였다. 이어서 진제국의 통일이념서 역할을 하였던 여씨춘추 「십이기」에 서 비로소 본격적인 1년 12월령 체계가 수립되었고, 이는 전한시기 회남자 「시칙훈」과 예기 「월령편」으로 계승되었는 바, 이 세 종류 문헌에 수록된 구체적인 천문과 물후월령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이러는 사이에 월령론은 자연의 계절변화를 설명하는 적합한 이론틀 로 인식되고 확산되었으며, 그 끝에 후한대 성립으로 추정되는 일주서  「시훈해」는 1년 12월 24절기 체제를 더욱 공고하게 만든 1년 72후법 을 처음으로 규범화하고 체계적 설명틀로 수립하였다. 이제 자연의 계 절 변화가 매뉴얼화되어 달력이 없더라도 규범화된 각 절기의 물후 곧 절후법을 통해 쉽게 자연의 변화를 인지하고 생활 속에서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72후의 절후법에는 1년 태양의 변화에 따라 규칙적으로 발생하는 기상상태와 동식물의 반응양태가 다분히 경험학적으로 반영되었으므 로 이 규범체계의 확산력은 매우 광범위하였다 하겠다. 남북조시대에 들어서 6세기 중반에 반포 사용된 위서 「정광력」은 드디어 72절후법을 역법의 주요 요소로 평가하여 수록하였으며, 다만 일주서와는 다른 계통의 72후 체계를 엮어 제시하였다. 이후로 「역 지」 계통에는 반드시 72후법을 수록하는 것이 항례가 되었다. 수나라 의 <황극력 72후법>이나 당나라 전기의 <인덕력 72후법>은 이를 전승한 주요한 흐름들이며, 당나라 중기 <대연력 72후법>은 기존의 72후 순서나 내용을 다소 개변하였고, 당나라 후기 <선명력 72후법> 은 이 대연력 계통의 72후법을 전승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가 국초부터 당나라 <선명력>을 수용하여 사 용하였으므로, <선명력 72후법>의 이론으로 자연변화를 인식하고 설 명하였을 것이다. 고려말에 도입된 <수시력 72후법>은 기존의 72후 내용에 약간의 변화를 주었으며, 이 체계가 조선전기에도 습용되어 조 선의 학인들이 자연을 인식하는 주요 규범틀로 작용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72후에 기초한 물후월령은 월령론의 천문기상학적 접근 이자 전근대시대 자연의 변화를 해석하는 주요 통로로 기능하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우리로서 그 물후월령 을 통해 자연과 동화되고 적응하는 삶을 구가하는 것이며, 이는 달리 말하면 우리의 일상생활을 우주론적으로 성화시키는 자연학적 기제가 여기에 놓인 것이라 이를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고의 논의 는 월령자연학으로 열리는 방향이라 하겠다. 조선 후기에 널리 성립하는 각종 세시기 문헌의 세시월령이나 각종 시가 작품으로 전하는 월령체 문학 또는 각종 구비전승으로 전개되는 민속월령 문화는 우리 문화사를 구성하는 주요 영역인 바, 그 문화의 기초가 되는 월령자연학의 역사적 흐름과 이에 대한 천문기상학적 원 리 해명을 시도한 것이 본고의 주요 관심사이자 연구 의의라 이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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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금강산은 크게 霜嶽, 楓嶽, 皆骨, 蓬萊라는 이칭이 있었 다. 상악, 풍악, 개골은 불교가 수용되기 전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던 금 강산의 고유 명칭이었다. 특히 상악은 국가주도로 행하던 名山大川祭 중 小祀를 지내던 곳으로 三國史記 祭祀條에 실려 있다. 조선시대 사료까지 고증해 본 결과 상악은 가장 처음 ‘국가공명’으로 사용된 명칭 이었다. 삼국시대 이후 사용되지 않다가 조선후기 불교식 이름으로 고 착된 금강이란 명칭에 대한 儒者들의 비판여론 속에서 묻혀 있었던 상악이라는 명칭이 다시금 거론되고 금강산의 원 명칭으로 고증된다. 풍악, 개골은 고려전기까지 꾸준히 사용되다가 고려후기 금강이라는 명칭이 보편화되면서 잘 사용되지 않는다. 조선시대 文士들의 詩文 내 용에 두 명칭이 계속 나타나긴 하나, 금강이라는 명칭에 가려져 산을 대표하는 題名으로는 잘 사용되지 않았다. 이 두 명칭은 가을, 겨울 등 특정 계절에 나타나는 형상에 따라 각각 붙여진 것이 아니다. 돌산으 로 이루어져 있는 지세와 단풍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는 모습 등 계절을 불문하고 산 자체에서 풍기는 形勝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었다. 금강은 華嚴經에 曇無竭菩薩이 상주한다는 산을 바탕으로 만들어 진 불교식 이름이다. 불교의 수용이후 14세기 후반 금강산은 불교성지 로 큰 명성을 얻는다. 그러므로 이시기 산의 명칭 또한 금강으로 보편화 되어 사용된다. 조선시대에는 유자들의 거부감을 일으키고 비판의 대 상이 되었지만, 이미 금강이라는 명칭은 대내ᆞ외적으로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고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도 금강산이라 칭했다. 현재에도 이러 한 전통이 계승되어 금강이 대표 명칭으로 쓰이고 있다. 봉래는 고려시대까지 이상세계 표현을 위한 것 외에 금강산의 異稱 으로 불린 예가없다. 조선시대부터 문인들이 금강산을 봉래로 빗대어 표현하기 시작했다. 금강이라는 불교식 이름의 대안도, 道敎의 공간으 로 표상화하기 위해 전적으로 사용한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 금강산이 Utopia와 같은 곳임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題材나 배경으로 사 용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금강산을 이칭하는 대표 명사로는 거의 사용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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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까지 금강산을 유람한 인물은 모두 32명이며, 이들이 남긴 유람록 작품은 모두 37편이다. 이들이 금강산을 유람한 유람 경로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었다. 금강산을 찾아가는 유람 경로, 금강 산을 유람하는 과정의 유람 경로, 유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의 유람 경로이다. 여기에서 다시 금강산 내에서의 유람 경로는 내산에서 유람 을 시작하는 경우와 외산에서 유람을 시작하는 경우가 있었으며, 비로 봉을 등정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17세기까지 금강산 유람록에 나타난 금강산 유람 경로의 특징은 다 섯 가지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유람 인물은 한양, 근기지역 중심이었다는 점이며, 둘째 금강산 유람은 주로 내산 중심이었다는 점 이고, 셋째 금강산 유람지의 명칭이 변천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넷째 유람객들의 숙식처는 사찰이었으며, 금강산 내에서의 경로는 주로 승 려들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점이며, 다섯째 유람 기일에 따라 유람의 경로와 일정이 다양하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런 특징들은 오늘날과 비교해 보았을 때 후대로 갈수록 다른 양상 으로 나타나게 되리라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게 한다. 금강산 유람 인물이 보다 전국적으로 분포하게 되고, 외산 쪽으로 새로운 유람 경로 가 등장하게 되며, 오늘날 사용하는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 등의 용어 가 시대적 추이에 따라 등장하게 되리란 것을 예상해 볼 수 있다. 그리 고 금강산 내에서의 유람 경로도 점차적으로 다양화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