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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연구 KCI 등재 The Nammyonghak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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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제59권 (2018년 9월) 8

일반논문

1.
2018.09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진주 월아산의 法輪寺와 靑谷寺는 寺格에서 조선 초기에 법륜사가 우월했으나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차츰 변화가 일어나 청곡사가 우위에 서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주요한 요인은 사족들과의 인적 네트 워크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牧隱 李穡과 愼齋 周世鵬 등은 조선 중기 진주지역 사족들의 청곡사에 대한 긍정적 인식, 청곡사의 사격 변화와 사세 유지·확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다. 청곡사의 사격이 높아지자 16세기 중반에 이르러 진주지역의 사족들도 그곳을 유람과 독서의 장소로서 자주 찾거나 머무는 장소로 삼았다. 이로써 청곡사는 지역 사족들의 다양한 경험이 매개된 장소로서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이들은 남명학파로 분류되는 지역의 이름난 사족 가문 출신이었다. 이는 1592년 10월 왜군에 의해 燒盡된 청곡사의 중창 불사가 비교적 빠른 1601년 겨울부터 시작될 수 있었던 사회·문화적 배경이었다. 浮査 成汝信과 鳳岡 趙㻩은 17세기 전반에 이루어진 청곡사의 중창 불사를 重建 記文으로 남겼다. 이는 청곡사 역사에서 남아 전하는 첫 문헌적 근거라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성여신의 「靑谷寺重建記」 와 조겸의 「靑谷僧堂記」에 의하면 청곡사의 중창 불사는 1601년 겨울부터 시작되어 1624년에 1차, 1644년에 2차에 걸쳐 모두 70여 칸 이상의 전각이 완성되었으며, 이 절의 승려 性侃, 戒行, 克明, 道引, 宗修, 惠嚴 등이 주도하였다. 또 두 기문에는 청곡사의 寺勢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온다. 이러한 청곡사 중창의 시기에 진주지역 남명학파는 정치적 격변을 겪었다. 특히 서인정변 이후 진주지역 사족 집단은 정치적 측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이 같은 때 성여신 등은 정치적 불안과 혼란에 대응하여 自靖하고 뒤이어 그들은 청곡사를 은거의 장소로 삼았다. 이는 1602년 이후 청곡사의 중창 불사로 인한 寺格과 寺勢의 변화가 초래한 공간적 요인만이 아니라 정치적 오해를 불식시킬 필요성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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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조선시대 사상가이며 대학자인 남명 조식의 사상에 나타난 개별화 교육의 의미를 분석하여 내러티브 관점에서 바람직한 유아기 개별화 교육의 시사점을 논의하는 데 있다. 연구결과, 남명은 학습자의 마음성찰을 근간으로 개인의 자질을 인정하며 타자와의 관계를 존중하는 개별화 학습을 실천한 것으로 분석 되어졌다. 내러티브 관점에서 남명사상은 자아성찰로서의 내러티브 접근, 잠재능력에 대한 내러티브 접근, 상호작용 관계에 대한 내러티브 접근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본 연구결과가 주는 시사점은 내러티브 관점에서 학습자 개인의 자질을 어떻게 인정하고 지도할 것인지에 대한 유아기 개별화 교육에 큰 함의를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남명사상에 담긴 교육의 의미를 통해 유아기 개별화 교육을 이해하고 그 실천 범위를 확장해나가는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이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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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출사하지 않고 인격 수양과 학문 탐구에 힘을 쏟으며 일평생을 보냈던 ‘獨善其身’형 인물에 대하여 그 삶의 지향과 가치관 및 처세관의 일단을 파악해 보고자 하는 시도로써, 조선 중기 광해조와 인조반정 등의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일평생 처사로써의 삶의 견지하였던 權是中이란 인물에 주목을 하여 살펴보았다. 권시중은 머물던 곳 근처에 작은 정자를 짓고는 퇴계의 「櫟遷」 시를 걸어놓고 櫟亭居士라고 자호함으로써, 퇴계에 대한 경앙의 심정과 사숙의 마음을 깃들였다. 그리고 아울러 세상에 특출난 재능과 능력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천성을 온전히 지키는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늑정이라는 호를 통하여 드러내었다. 또한 ‘野舟子’라는 호를 통하여 급변하는 세상을 살아나가는 처세의 가치이자 이정표로써 자연을 벗 삼아 여유롭게 소요하는 삶, 외부의 잣대나 평가로부터 벗어난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권시중이 인생의 목표로 지향하였던 이러한 삶의 구호들이 가치를 가지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추상적인 논의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지침이자 실제적 원칙으로 적용되었다는 데 있다. 또한 권시중은 地方誌인 『宣城邑誌』, 지역의 科試 합격자를 기록한 책 인 『善谷蓮桂錄』등을 편찬함으로써 지역 사회에 저술로 공헌하는 실천적 지식인의 면모를 보였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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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退溪 李滉(1501-1570)의 한시를 연구하던 중에 그의 逸詩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 시 내용에 규명할 만한 것이 있다고 여겨 논문으로 작성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특히 첫째 수에 해당하는 작품은 문집에 실려 있지 않은 일시임을 확인했고, 그 작품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해 아래와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첫째, 퇴계의 친필로 남은 한 수의 逸詩는 風流의 現場에 대한 實證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필자는 이를 조선 중기 영남의 江湖에서 차를 즐겨 마셨다는 사실과 함께 막 완성된 「漁父歌」를 初演한 풍류의 현장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으로 보았다. ‘烹茶仙風’ 즉 ‘차를 마시는 신선의 모습’이라는 사자성어 는 퇴계의 일시에 들어 있는 시구를 통해 만들어본 것이다. 이는 당시 퇴계가 추구했던 하나의 江湖의 眞樂과 연관 지을 수 있는 한 경지가 아니었을까 한다. 둘째, 새로 발견된 퇴계의 일시는 元韻의 형태로 聾巖 李賢輔 (1467-1555)와 溫溪 李瀣(1496-1550)의 次韻으로 이어졌는데, 정작 퇴계 자신의 문집에는 누락된 채 지금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는 道學 淵源이라는 學統의 계승문제와 연관 지워 생각해 볼 수도 있다고 본다. 그래서 문집과 초고로 남은 작품들에 대한 詩題를 함께 살폈는데, 거기 에서 드러난 ‘先生’이 ‘相公’ 등으로 달리 표현된 차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미묘한 시각차 때문에 중심 작품이 일시로 남아 문집에 오르지 못한 것으로 추론해 보았다. 필자는 자료 고찰을 통해, 퇴계 역시 도학 계통상으로 농암을 師承關 係로 인식하기보다는 그를 鄕先輩로서 인품과 문학 방면에 국한해 무한한 존경을 표했다고 보았다. 끝으로 그동안 年譜나 口碑傳承의 형태로 그 일부 시구절만 알려졌던 河西 金麟厚(1510-1560)가 퇴계를 기린 한시 또한 발견되어 이를 번역해 퇴계의 시인과 도학자로서의 면모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게 했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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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燕子樓 제영시 양상을 통해 연자루의 의미를 탐색한 것이다. 樓亭記文·題詠詩 등 문헌 자료의 충분여부 때문에, 연구대상은 순천과 김해 두 지역 연자루를 중심으로 하였다. 순천은 小江南이란 지역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순천 연자루는 孫億과 好好 및 朴忠佐와 碧玉으로 대변되는 관원과 기녀의 사랑과 이별 고사가 전한다. 그래서 연자루를 사랑과 이별의 장소로 인식한 시인들은 제영시에 고사 주인공에 대한 동정과 공감 및 회고의 정서를 담았다. 이는 중국 江南 지역에 해당하는 江蘇省 徐州 연자루의 張愔과 關盼盼 고사를 순천 연자루에서 구현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순천 연자루는 小江南 구현의 의미를 갖는다. 김해는 伽倻의 중심지라는 지역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가야가 망할 당시 연자루가 울었다거나 혹은 겨울에 제비가 누각에서 울어 망할 조짐을 알린 기이한 일화로 인해, 시인들은 압도적으로 제영시에 김해의 정체 성을 반영하며 가야흥망 회고와 흥망을 반복하는 역사에 대한 비감을 토로하였다. 이를 보면 김해 연자루는 伽倻史 회고처의 의미를 갖는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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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國詩話彙成』은 18세기에 저술된 인물중심의 총집류로 시화사적 면에서 의미 있는 저작이다. 현재 22권 7책으로 정리되어 있지만 고려 뒷부분과 조선 앞부분에 권수의 숫자가 중복되기도 하고, 異本 중 비교 적 체재를 갖춘 『詩話彙成』과『詩話彙編』조차 결락본이거나 불분권 상태이다. 세 필사본의 간행 시기는 『동국시화휘성』이 洪重寅에 의해 먼저 편 찬되었고 그 얼마 뒤인 1734년에 洪重徵 혹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초기『시화휘성』으로 정리되었다고 보여진다.『시화휘편』은 1817년 沈魯 崇이 홍중인의 손자 집에 보관되어있던 『시화휘성』을 傳寫해두었다가 1821년 『대동패림』편찬 시 최종 수록하였다. 필사본의 한계로 인해 체재가 정밀하지 못하고 결락된 부분도 많으며, 편찬시기에 시간차가 있어서인지 선입된 조목에 있어서 서로 출입이 발견되었다. 이에 본고는 가장 처음 편찬되었고 비교적 체계가 갖추어진 『동국시화휘성』을 기준으로 3종의 편찬체재를 대조하고 그 결과를 표로 정리 한 후, 그 가시적인 차이점을 서술하였다. 그리고 『동국시화휘성』·『시화휘성』·『시화휘편』의 선입조목을 비교하여 그 현황을 살펴보았다. 『시화휘성』은 앞서 편찬된 『동국시화휘성』을 기준으로 인물 및 시 일화를 가감하였고, 다른 부분은 기존의 체재를 크게 건드리지 않았지만 조선조에서 왕들을 별도 조목으로 분류해둔 현상을 가장 큰 특징으로 제시하였다.『시화휘편』은 심노숭이 말한 필사경위나 편찬시기 및 조목의 1차적 인물선입 양상만을 염두에 두고 보았을 때는 『시화휘성』을 저본으로 편찬되었을 것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실제 3종에 공통으로 선입된 조목의 기사를 서로 비교해본 결과 후대에 필사된 『시화휘편』이 체재 면에 서는 오히려 『동국시화휘성』과 유사한 면모를 지녔음을 발견하였다. 이에 『시화휘편』은 선행 저작된 두 필사본을 함께 참고하였거나 적어도 심노숭이 저본으로 삼았던 시화휘성』은 현존본과는 다른 『동국시화휘성』의 모습을 많이 간직한 초기 형태의 『시화휘성』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본고는 3종을 종합하여 『동국시화휘성』의 완전한 면모를 재구성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시도는 『동국시화휘성』이 갖는 독자적 의미를 도출하기 위한 선행연구로서의 기초 작업임을 밝힌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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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龍夏(1840-1908)는 지금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유림면 엄천강 일원에 華山十二曲을 설정하고 「華山十二曲」을 지었다. 강용하는 鄭汝昌·金馹孫·曺植 등 先賢을 宣揚하는 장소로 여겼던 기존의 名所인 龍游潭 등 7개와 臥龍臺·師良浦 등 자신의 의지를 담은 5개를 합쳐 12개 曲으로 삼았다. 그는 스승 任憲晦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朱子·李 珥·鄭汝昌·金馹孫·宋時烈 등 선현을 숭상하였다. 강용하는 국가의 위급을 애통했으며, 傷時憫俗의 언어로 자주 辭章에 발휘하고 慕華臺와 臥龍臺를 축조했다. 慕華臺는 匪風下泉, 즉 明나라가 망한 사실을 슬퍼하고 나아가 再造藩邦의 은혜와 의리를 잊지 않는다는 의지를 담았다. 臥龍臺는 시대적 상황을 아파하며 이를 극복 하고 타개할 賢人이 나타나기를 열망하는 뜻을 담았다. 永言臺·拱北臺 등을 만들었다. 그는 자연 경물에 자신의 의식을 담았고, 이런 의식이 화산십이곡을 설정하는데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일제의 조선 병탄의 조짐이 짙어갈 시기에 姜龍夏는 尊道·尊師·尊華意識[尊周意識]을 강화하고, 나아가 사람들에게 그런 의식을 확산하기 위해 화산십이곡을 설정하고 「화산십이곡」을 지었던 것이다. 강용하의 존화의식 표출은 그가 생존했던 당시 흥기했던 지리산권 江右學者의 尊周意識의 영향도 컸다고 본다. 진주에 세거하던 南平文氏 집안의 大明花 선양과 朴震英 (1569-1641)의 우국충정과 존주의식에 대한 선양사업이 활발했다. 강용하는 화산십이곡을 정하는 데 있어,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에 있는 先賢들과 관련된 유적지를 기본으로 하고, 자신의 존화의식 등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전에 없던 새로운 명칭을 붙였다. 아울러 선현을 선양 하고 존화의식을 확산하기 위해 화산십이곡 12개 명칭에 관련 故事 등을 원용하여 시를 지었다. 강용하는 주자의 「武夷棹歌」의 칠언절구 대신에 주자의 「山北紀行」 오언율시 8구의 형식을 사용했다. 이로써 자기의 생각을 칠언절구보다 더 많이 서술하였고, 율시의 특성인 고사를 적절히 활용하여 표현미도 높일 수 있었다. 따라서 강용하의 존화의식과 「화산십이곡」은 그 시 대적 의의와 문학적 의의면에서 동시에 유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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