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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연구 KCI 등재 The Nammyonghak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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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제56권 (2017년 12월) 9

1.
2017.1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승산리는 진주목 東面 勝禦山里에 속한 네 개의 자연 마을 가운데 상승어산과 하승어산에 해당한다. 임진왜란 후에 이웃 龍奉里에 합해 졌다. 승산리 사람들의 일상 생활과 관련된 길은 비교적 잘 발달되어 있었다. 특히 승산리는 남해안 고성지역에서 내륙의 의령·삼가지역을 연결하는 지름길에 위치하였다. 승산리에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1474 년 무렵이며, 처음으로 들어선 곳은 蓮塘 許東岦(1601-1662)의 유허 지 연당의 북쪽 일원이었다. 승산리 김해 허씨의 입향조는 許錘인데, 1474년 허추는 진주 班東山 里 진양 강씨 姜叔卿의 딸에게 장가를 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승산리로 이거하였다. 이로써 승산리에 사족이 거주하게 되었다. 허추는 비록 학문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제수된 벼슬도 참봉에 지나지 않았지만 생육신으로서 명망이 높은 함안 원북리 漁溪 趙旅의 가문과 情分을 깊이 맺고서 교유하였던 인물이다. 승산리는 15세기 말기에 사족 마을을 형성하였으나 17세기 중엽까 지도 多數의 사족이 거주하는 마을로 성장하지 못했다. 승산리가 사족 마을로서 성장하는 데에 첫 디딤돌을 놓았던 이가 입향조 허추라면 그 정치·사회적 기반을 공고히 한 인물이 觀瀾 許國柱이다. 관란 허국주 는 비록 벼슬이나 학문으로 현달하지 않았지만 그는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으로 승산리 김해 허씨 가문의 정치·사회적 기반을 공고히 하였던 인물임에 틀림없다. 조선 중기 승산리는 사족 마을로서 성장의 한계를 지녔으나 17세기 중엽 이후 승산리 김해 허씨는 벼슬로 현달한 자가 배출되는 등 사족 마을로서 성장을 거듭하였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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晋州 동쪽 勝山里에서 550년 가까이 세거해온 金海許氏 문중은 江右 地域에서 人材와 山林經濟로 저명한 가문으로 儒林社會에서 이름이 높다. 高麗 後期 迂軒 許邕이 妻鄕을 따라 丹溪에 정착하였고, 그 뒤 三嘉를 거쳐 朝鮮 前期에 許錘가 勝山里에 전거하였다. 허추의 손자 觀瀾軒 許國柱와 관란헌의 손자 蓮堂 許東岦 때부터 倡義와 仕宦으로 더욱 현저해지게 되었다. 이 문중에서는 1명의 文科及第者, 20명의 武科及第者, 27명의 小科 及第者가 나왔다. 이들은 모두 蓮堂 許東岦의 후손인데, 한 마을에 사는 한 인물의 후손 가운데 이렇게 많은 급제자가 나왔다는 것은, 여타 문중 에 비교하여 따라올 만한 문중이 거의 없다. 이 문중의 인물들의 특징을 들면, 文武兼全하였다. 武科를 통해 出仕 하였으면서도 文翰이 있어 벼슬에서 물러나면, 학자들과 어울려 시문 을 주고받았고, 文集을 남겼다. 둘째 國家民族에게 위기가 있을 때 忠節을 지켜 분연히 일어났다. 壬辰倭亂 때 觀瀾軒 許國柱가 倡義하였고, 丙子胡亂 때는 蓮堂 許東岦 이 雙嶺 전투에 참여하여 크게 戰功을 세웠다. 鄭希亮의 난에는 許鏜이 정희량과 친동서간임에도 창의하여 토역에 참여하였다. 셋째 베풀기를 좋아하였다. 대표적인 것으로 止愼亭 許駿이 許氏義 莊을 만들었고, 曉洲 許萬正이 一新學校를 지었고, 南海 露梁 忠烈祠를 지을 때도 獻誠하였다. 聽溪 許馥이 博愛社를 만들었다. 그 밖에도 크고 작은 구제사업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하였다. 넷째 당대 최고의 학자들을 師友로 삼아 교유하여 개인의 학문 발전 은 물론 家門의 격을 높였다. 한 집안 안에서 南人계열과 老論계열로 분열되었지만, 양 학파의 최고의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다섯째 조상을 받드는 향념이 지극하고, 문중에 자부심을 갖고 宗事 에 心力을 다 쏟았다. 止愼亭 이외에도 선조를 위하여 位土를 장만해 들인 사람이 여럿 있었다. 다만 가까운 같은 조상의 후손이면서도 長派와 系派가 中始祖를 달 리하는 문제점이 있고, 이로 인해서 兩派間의 소통에도 膈膜이 생기는 일이 적지 않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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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진주 승산마을에 세거하였던 능성구씨 문중에 관한 것이 다. 경화사족이었던 능성구씨 가문의 具槃은 18세기 처가인 김해허씨 의 세거지인 진주 승산리에서 지내게 되었다. 구반의 후손들은 승산마 을에 세거하면서 한국 굴지의 재벌가로 성장하였다. 본고에서는 승산 마을에 입향한 능성구씨의 先系와 구반의 직계 선조, 그리고 구반이 입향한 이후 후손들의 삶을 추적하였다. 승산리에 세거한 능성구씨 집안은 도원수파에 속한다. 능성구씨는 고려시대부터 이미 관료를 배출하였으며, 조선에 들어와서는 세조대에 구치관과 구치홍 갈래가 현달한 관료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승산마을 에 정착한 구반은 구치홍의 후손이었다. 구치홍의 가계는 왕실과 혼인 이 잦았고, 또한 두 차례의 반정 때에 正功臣에 책봉된 훈척가문이었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원종비 인헌왕후의 형제인 구사맹 집안이 조선 후 기 무반 벌열 가문으로 이름이 났다. 승산리에 세거한 입향한 구반은 구사맹의 동생 具思閔의 직계손이 다. 구사민은 1578년(선조 11) 遺逸로 천거되어 관직에 나갔다. 구사민의 차남 具寭는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갔으나, 그의 아들 具仁至 와 함께 대북세력의 비판으로 광해군 때에 화를 입었다. 구혜와 구인지 는 선조 말년에 재상이었던 유영경을 옹호하고, 정인홍을 비판하여 대 북세력에게 유영경의 당으로 낙인이 찍혀서 화를 입었다. 구인지는 정쟁으로 금고를 당했다가 사망함으로 가세가 급격히 기울 었다. 그렇기에 구인지의 차남 具崟은 10대 후반에야 외숙인 택당 이식 의 문하에서 학업을 시작하였다. 영릉 참봉이라는 음직을 받고 1652년 (효종 3) 문과에 합격하여 참상직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조부와 부친의 정치적 공백이 길었고, 조부가 유영경의 당이라는 지목을 받았으며, 문관 관료 가문으로서의 기반이 아주 탄탄한 것은 아니어서 당상관으 로 오르기에는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구음의 아들 具文游는 46세가 되어서야 음직으로 관직에 나갔기 때 문에 승진에 한계가 있었다. 그는 양천허씨 부인에게서 세 아들을 두었 는데, 그중 차남인 구반이 승산리 김해허씨 가문인 허륜의 사위가 되었 다. 구반은 승산리에서 연이어 세 아들을 낳고 불행하게도 30세에 사망 하였다. 구반이 일찍 사망하므로 허씨부인은 어린 아들들을 거느리고 승산리에서 살게 되었다. 구반의 후손은 외가인 김해허씨 가문의 사회적 경제적으로 지위에 힘입어 진주 주요 사족들과 혼인을 맺으면서 진주 사족으로서의 면모 를 갖추게 되었다. 구반의 자손들은 입신하기 위해서 儒業에서 武業으 로 전환하기도 하고, 계속 학문에 힘써서 생원진사시나 문과에 합격하 기도 하였다. 구반의 후손들은 직계 선대에는 무반 관료가 없으나 외가가 무반 가문이었고 방계친족이 세력 있는 무반 가문이었기에 무과에 합격하여 서는 무반 청요직인 무겸선전관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또한 구진검 같은 이는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어 지역 사족의 여론을 형성하고 주도하기도 하였다. 구연호는 일찍부터 경학 공부에 치중하 여 식년문과에 합격하였다. 문과 합격 후 참하관 시절을 온전히 승정원 에서 보냈고, 6품으로 승진해서는 대간에 재임하다가 낙향하였다. 구 반 이후 5대가 지나서 문과에 합격하였으나, 청요직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능력과 집안의 문지를 인정받은 결과였다. 승산리의 능성구씨는 세력 있는 무반 벌열 가문의 갈래는 아니었으 며, 정쟁의 화를 당하기도 하여 가세가 위축되었다. 그런 중에 구반이 승산리의 김해허씨 집안과 혼인하고 일찍 사망함으로써 그의 자손들이 승산리에 세거하게 된 것이다. 외가의 도움을 받으면서 3세대가 지나도 록 기반을 닦아 집안을 다시 일으켰다. 그러한 노력이 지금의 승산리 능성구씨 가문을 있게 하였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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蒼崖 許萬璞(1866~1917)은 진주 지역에서 활동한 한말의 유학자 이다. 武科에 급제하여 잠시 武人으로 살았으나, 외세의 침략과 문란한 정치 현실에 비분강개하여 스스로 관복을 벗어던지고 고향인 진주 지 수 승산마을로 낙향하였다. 그리고 세상을 마칠 때까지 은둔하다시피 하면서 經史를 탐구하고 스승을 찾아다니며 도학을 강론하였다. 본고 는 그 동안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진주 지역의 한말 유학자 창애 허만박을 주목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허만박의 문집을 토대로 그의 삶을 보다 세밀하게 추적해보고 그 자취를 담고 있는 한시를 검토 분석 하여 그의 내면의식을 따라가 보고자 했다. 52세의 나이로 비교적 짧은 생을 살다간 허만박은 선조들의 행적이 그러하듯 젊어서부터 은거 지 향적 면모를 보이다가 무과 급제 후 관직에 진출해 서울 생활을 시작했 다. 그러나 서울에서 보고 겪은 외세의 침략과 국가적 위기에 그는 절망 하고 스스로 사직하였다. 그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승산 마을의 염창강 가에 은둔하면서 도학의 근본 탐구에 골몰하며 절의를 실천하고자 하 였다.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로 인해 스승 송병선을 잃은 허만박은 이후 송병순과 최익현, 전우를 차례로 스승으로 모시며 도학을 강론하 고 자제와 후진 교육에 힘을 쏟았다. 이 시절 그는 상소문과 편지 또는 제문에서 혼란하고 무력한 정치 현실과 일본의 침략에 대해 비분강개 하며 통탄과 憂國의 심정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거듭되는 집안의 불행으로 위축된 모습과 하루하루 견디는 심정을 표출하기도 했다. 삶의 이력으로 볼 때 그는 폭넓은 교유 관계를 형성하기는 어려웠 던 것으로 보인다. 허만박은 자신이 살았던 智水 勝山 마을의 山水를 대상으로 삼아 시를 많이 지었다. 더불어 인근 주변 지역의 승경이나 또는 자연 속의 구체적인 사물들에 대해서도 시적 감수성을 발휘해 시를 짓는 계기로 삼았다. 물론 한시에 묘사된 산수 자연은 허만박의 삶의 흐름과 그에 따른 정서가 스며들면서 시기에 따라 다른 느낌과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다. 허만박은 자신의 삶 대부분을 아름다운 고향의 산수에서 은둔하 며 조용하게 보냈지만, 당시 나라의 형세가 혼란하고 위급했던 만큼 그에 대한 심정과 감성도 시의 소재나 때에 따라 드러내기도 하였다. 1910년을 전후해 지은 시에서는 나라 잃은 분노와 비통함의 시적 정서 가 점점 고조되고 있었으며, 더불어 체념과 자조적 한탄도 뒤섞여 표출 되었다. 또 현실과 차단한 채 은거의 즐거움만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의식도 담아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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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라는 격변기를 살다간 중세적 지성 중 한 명인 회당 허만책의 생애와 문학의 한 단면을 살핀 것이다. 그러 나 이 연구의 진정한 목적은 궁극적으로 허만책이라는 인물 자체를 연구하는데 있지 않다. 오히려 허만책이라는 인물의 삶과 문학을 통해 격변기를 살았던 중세적 지성의 일정한 전형이 있는지를 탐색하고, 중 세적 삶과 문학을 지키던 삶의 현재적 가치를 살피고자 하였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첫째, 격변기 지성의 문집은 학문적 성취보다는 후손들의 사랑과 공경에 근거하여 만들어지는 경향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둘째, 격변기 지성의 한시는 관계망 한시를 중심으로 창작되는 경향성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셋째, 격변기 지성은 전통적 사고, 즉 성리학의 세계관을 묵수하고 이를 교육에 결부시키는 경향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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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회의 80년 삶과 그것을 반영한 문학은 개인의 삶이자 격변기의 조선 지식인의 삶과 문학의 한 전형을 예시한다는 점에서 연구의 당위 성을 획득한다. 청년 급제자인 자신을 잠룡으로 표현하며 자부심을 나타낸 만회는 ‘國計民憂’ 즉, 나라를 위한 계책을 도모하고 백성의 근심을 걱정하여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큰 포부를 품고 출사에 나선다. 그러나 조선 말기의 지속적인 정쟁과 보수와 개혁의 격렬한 엇갈림은 수차례의 정 변을 야기하였다. 위태롭고 혼란한 시대에 그와 같은 지방 출신의 지지 기반이 없는 젊은 급제자는 포부를 펼칠 기회를 얻기 어려웠다. 이 때문 에 요로의 재상에게 수차례 편지를 보내며 자신의 능력을 소개하고 본격적인 출사를 위한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기대하던 답을 얻지 못하 였다. 그러자 그는 ‘遯世無悶’을 삶의 참된 비결로 설정한다. 세속을 등지고 은둔하며 지내더라도 괴로워하지 않겠다는 뜻의 이 말은, 환로 에서 외면 받고 승진에서 제외되는 자신을 위한 만회의 자기방어적인 태도의 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는 조선의 몰락과 일제 강점 하의 삼십 년 동안에 더욱 경화되어, 세상의 외면에 번민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을 두고 세상을 살면서도 살아있지 않은 ‘不敢生世人’ 또는 ‘세상 속의 하나의 幣物’로 정의한다. 만회의 작품들은 이러한 삶의 자세를 견지했던 문학적 기록이자 역 사의 격변기를 관통하는 한 유가 지식인의 삶을 형상한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증거라는 측면에서 의의를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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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가 기획한 ‘경남지역 전통선비마을 연구’의 하나로, 경상남도 지수면 勝山里 許氏家에 소재하는 義莊과 이를 중심으로 행해진 기부 활동 등을 살펴보았다. 의장은 중국 宋나라 때 范仲淹의 范氏義莊에서 연유하였다. 대체로 문중 내 부귀한 인물이 많은 기금을 출연하여 가난한 친족을 구제하고 문중 간 화합을 추구한 제도이다. 승산리 허씨가에서도 범씨의장에 근거를 둔 허씨의장을 설 립하여 운영하였으니, 그가 바로 止愼亭 許駿(1844-1932)이다. 허준은 젊어 가난하였으나 중년 이후 막대한 富를 소유하게 되었고, 가족과 문중뿐만 아니라 한말-일제시기 어려운 이웃과 국가를 위해 아낌없이 베푸는 삶을 실천하였다. 이러한 베풂의 삶은 知止와 愼獨을 중시하는 지신정의 근검절약 정신에 기반한 것이었다. 승산리 허씨의 장의 의의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지신정의 베푸는 활동은 일시적이지 않았다. 그는 1894년 국 가를 위해 군자금을 출연한 것뿐만 아니라 기근이나 세금을 납부하지 못하는 곤궁한 이웃을 위해 수년 간 지속적으로 지원하였다. 또한 일찍 부터 인재양성 교육에 끊임없는 관심을 보이다가 일제시기에 이르러 一新學堂 설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둘째, 허준의 삶과 승산리 허씨가의 의장 활동은 晉州를 중심으로 하는 경상남도 지역의 문화적 우월성이라 평가할 수 있다. 조선후기부 터 이 지역의 지식인을 중심으로 문중강화 활동이 다양하게 행해졌는 데, 대개 ‘동족마을의 형성, 문중 서원 및 祠宇 건립, 先賢의 追崇, 族譜 와 文集 刊行’ 등이었다. 이는 향촌사회에서 문중의 기반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대표적 활동이었고, 유가지식인의 보편적 행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허준의 이러한 기부 활동은 이와는 다른 고차원적인 지적 활동이었으며, 진주지역 선비문화의 우월성이라 할 수 있다. 셋째,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조선시대에 의장을 둔 인물이나 문중 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대개 그 당대나 두어 세대를 지나면서 없어지거 나, 다른 재산과 통합되는 등 본래의 목적이 변질되는 경우가 대부분이 었다. 반면 승산리 허씨가의 지적 활동은 지금도 의장을 중심으로 한 문중 내 장학금 지원 등의 대외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것이 야 말로 승산리 허씨가의 의장 활동이 지닌 가치와 의의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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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介庵 姜翼(1523-1567)의 학문 특징을 살펴보고 그의 학문 지향이 문학작품에서 어떻게 표출되고 있는가를 중점적으로 서술 하였다. 강익은 당대 함양 지역의 대표적인 유학자로 평생을 수양으로 일관하였고, 남계서원 건립을 주도하는 등 유학의 사회적 보급에도 힘 을 기울인 인물이다. 이러한 강익의 학문 특징은 그가 남긴 記文에 집약 되어 있다. 강익은 이른 나이에 과거를 포기하고 爲己之學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학문에 정진하였는데, 이는 스승 唐谷 鄭希輔(1486-1547)나 南冥 曺 植(1501-1572)의 영향 외에도 자신의 과단한 실천 성향이 그 기저에 자리했다. 과단한 실천 성향이 위기지학을 확고히 실천하도록 만든 요 인이며, 성현의 본지를 ‘自得’하는 학문 방법을 통해 더욱 정교한 실천 을 도모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조식은 강익에 대해 ‘끝을 잘 맺을 것이 분명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하였다. 강익에게서는 문학에 대한 뚜렷한 관점이 감지되지 않는데, 이는 문 학에 대한 고민보다 심신수양에 역점을 두었던 그의 학문 지향에서 기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그의 학문 지향이 집약된 작품이 「양 진재기」이다. 강익은 「양진재기」에서 양진재를 건립하게 된 경위와 택지의 이유 및 의도 등을 설명하였다. 이 작품에서 강익은 성정의 참됨[性情之眞] 을 기르고자 외부와 격리된 곳에 택지를 하고, 주변의 자연물과 자신의 공부방이 교감할 수 있도록 안배하였으며, 수양을 돕는 물건들도 주위 에 배치하였다. 즉 「양진재기」는 강익의 자기 수양을 위해 자연물·인공 물을 가려서 배치하고 연출한 의도와 그 속에서 성정의 참됨 기르고자 했던 학문적 지향이 담긴 글이다. ‘양진재’가 본인의 학문 정진을 위해 사적 공간을 의도대로 조직한 건물이라면, ‘남계서원’은 학문의 표본을 제시함으로써 지역사회에 유 학을 널리 장려하고자 설립한 건물인데, 이러한 강익의 학문적 지향이 표출된 글이 「남계서원기」이다. 「남계서원기」에서는 一蠹 鄭汝昌을 제 향해야 하는 도학적 당위와 서원의 교육·교화적 기능을 주로 설명하였 다. 인간만이 도를 사회에 실천할 수 있는데 이는 도를 지닌 사람만이 가능하므로 정여창과 같은 선현을 서원에 제향하여 추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선현을 서원에 모시고 제사지내는 의식이 학생들을 고무 시키는 측면이 있으며, 이를 통해 정여창의 도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유학이 부흥할 거라는 것이다. 강익은 두 편의 記文을 통해 내면으로 학문을 실천하려는 의지와 대외적으로 학문을 장려하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16세기 초반부터 조식·이황과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여 유학자로서의 표상을 정립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일관되게 유학적 가치를 실천하고 보급한 강익과 같은 인물이 등장하여 사림의 자기 정체성이 더욱 뚜렷해졌던 것이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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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 헌종조에 편찬된 三朝寶鑑의 편찬 사례를 통하여 국조 보감의 편찬 과정과 편찬 의례에 대해 고찰한 것으로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국조보감의 편찬 과정은 찬집청이 설치되어 활동하는 시기와 감인청 이 설치되어 활동하는 두 시기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삼조보감을 편찬 할 때 찬집청은 대략 1년 6개월 동안 존속하였다. 찬집청에서는 우선 1차로 日省錄과 承政院日記를 통하여 보감의 내용에 적합한 기록을 발췌하여 찬집본을 만드는 일을 진행하였다. 찬집 작업은 정조보감부 터 시작해 순조보감과 익종보감의 차례로 진행하였고 찬집을 시작한지 8개월이 지난 무신년(1848) 11월에 이르러 완료되었다. 이후 교정 작 업은 교정 대신과 참정 대신으로 임명된 고위 관료에 의해 수행되었고 이는 정조 때의 관례를 따라 在家 작업으로 행해졌다. 삼조보감 편찬 때의 감인청은 찬집본이 완성되어 교정 작업을 진행 하는 중에 설치되었다. 삼조보감 편찬 때에는 감인청 설치 이후에도 찬집청이 한 동안 유지되었다. 이 시기 찬집청의 주요 업무는 삼조보감 찬집 초본의 교정에 관한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御製 序文을 받아 이를 교열하는 일과 箋文과 跋文의 작성에 관한 일, 삼조보감의 속찬에 따른 국조보감 총목, 총서, 범례의 수정, 보완에 관한 일이었다. 삼조보감 편찬 때의 감인청은 무신년 2월에 설치되지만 인출 작업이 개시되는 것은 이로부터 6개월이 지난 뒤였다. 開印에 앞서 이루어진 감인청의 활동으로 중요한 것은 刊板 작업에 동원될 刻手를 확보하는 일이었으나 실제 각판 작업에 동원된 각수를 물색하게 되는 것은 印役 이 개시되는 일자에 거의 임박해서였다. 삼조보감의 刊板 작업에는 교 서관 소속의 각수와 외방에서 차출된 각수를 합쳐 도합 42명의 각수가 동원되었다. 이는 정조조 국조보감의 편찬 사업에 동원된 144명의 각 수와 비교할 때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기는 하나 각수를 제외한 나머지 각색 공장의 수는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감인청에서 주관한 삼조보감의 인역은 우선 활자판을 만들어 몇 건 의 활자본 삼조보감을 인출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렇게 해서 인출 된 활자본 가운데 한 건은 각판용으로 사용하였고 한 건은 종묘에 봉안 하고 한 건은 왕에게 진상하였다. 보감은 다른 편찬물과는 달리 이를 종묘의 當室(해당 국왕의 廟室)에 봉안하였기 때문에 종묘 봉안건 보 감의 제작은 특히 중요하였다. 삼조보감의 경우 종묘에 봉안한 보감은 활판으로 인출한 3건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은 본 연구를 통해 처음으 로 밝혀진 것이다. 보감을 종묘 당실에 봉안하기 까지에는 새로 편찬된 보감을 국왕에 게 진헌하는 의식이 있고, 다음으로 종묘 봉안에 앞서 예정된 장소에 임시로 봉안하는 의식이 있으며, 그런 다음 마침내 종묘에 봉안하는 의식을 행하게 된다. 삼조보감의 편찬에 따른 의례적 행사에는 정조조 국조보감 편찬 때와 마찬가지로 모든 행사에 국왕이 친림하였다. 다만 정조조 국조보감 편찬 때와는 달리 삼조보감 편찬 때에는 보감을 왕에 게 진헌하는 행사장이었던 仁政殿을 임시 봉안처로 하게 됨에 따라 종묘 봉안을 앞두고 왕이 부근의 摛文院으로 이동하여 齋宿하는 절차 가 있었다. 또한 삼조에 대한 봉안 의례가 종묘 당실에 대해서만 행해졌 기 때문에 영녕전에 대해서는 전알례만을 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