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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연구 KCI 등재 The Nammyonghak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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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권 (2017년 3월) 10

1.
2017.03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南冥學의 본질과 특색에 대해 재조명한 것이다. 南冥은 16세기 사화 기에 현실정치의 참여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한 인물인데, 25세 때부터 孔子 를 배우고자 하여 顔回의 克己復5를 통해 근본을 확립하는 구도의 길로 들어 섰다. 남명학의 淵源은 남명이 학문을 전환한 뒤 孔子·周敦頤·程Ⅱ·朱熹의 초상 을 그려 봉안해 놓고 참배한 데서 단서를 찾을 수 있는데, 주자의 博文約5의 학문과 程明道의 揚休山立의 氣節과 周濂溪의 光風霽月의 흉금을 추구하고, 나 아가 안회의 克己復5를 통해 공자의 경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남명학의 요체를 敬·義라 하는데, 이는 󰡔주역󰡕 「坤卦-文言」의 ‘敬以直內 義以 方外’에서 나온 것으로, 주자도 학문의 요체로 삼은 것이다. 따라서 경의학의 연 원은 주자를 통해 󰡔주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의학은 마음을 眞實無妄하게 하는 공부로, 敬은 마음을 고요하고 또렷하게 하여 긴장감과 경건함을 유지하 는 것이고, 義는 마음이 발한 뒤 판단이나 조처를 올바르고 합리적으로 하는 것 이다. 남명학의 본질은 남명이 남긴 3편의 賦와 󰡔學記類編󰡕의 「誠圖」·「易書學庸語 孟一道圖」·「心爲嚴師圖」·「幾圖」 및 「神明舍圖」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原泉 賦」에는 근본을 중시하는 사유가 근저에 깔려 있으며, 「民巖賦」는 나라의 근본 을 백성으로 보고 정치의 근본이 임금에게 달려있음을 말한 것이며, 「軍法行酒 賦」는 나라의 근본은 禮義라는 점을 역설한 글이다. 또한 「誠圖」와 「易書學庸 語孟一道圖」는 남명학의 본체에 해당하는데, 「誠圖」는 眞實無妄의 誠을 목표로 그 공부방법과 실천요령을 적시한 도표이며, 「易書學庸語孟一道圖」는 惟精·惟 一의 공부를 통해 誠을 추구하는 것을 형상한 것이다. 「心爲嚴師圖」·「幾圖」 및 「神明舍圖」는 남명학의 작용에 해당하는데, 「心爲嚴師圖」는 心을 嚴師로 삼아 存養·省察을 나타낸 것이고, 「幾圖」는 省察과 克己에 초점을 맞추어 그린 것이 며, 「神明舍圖」는 극기복례하여 至善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남명학의 특색은 「神明舍圖」의 ‘天德’과 ‘王道’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천 덕은 하늘이 부여한 본성을 얻어 나의 인격을 완성하는 것으로 內聖에 해당하 고, 王道는 그 덕을 현실사회에 펴는 것으로 外王에 해당한다. 천덕을 추구하는 것은 人道를 닦아 天道에 배합하는 誠을 추구하는 것으로, 남명학의 특색은 居 敬行義의 공부를 통해 󰡔中庸󰡕의 大旨인 誠을 추구한 데 있다. 이는 퇴계가 󰡔소 학󰡕·󰡔대학󰡕을 근본으로 한 것과는 다른 시각으로, 󰡔중용󰡕을 所依經傳으로 삼은 것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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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의 학문에 대한 새로운 연구관 점의 필요성, 그의 처사적 삶의 진정한 의미, 그리고 경의(敬義)정신과 사회적 실천방법을 연구하였다. 그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남명의 학문은 이황(李滉. 1501~1570)과 이이(李珥. 1536~1584)를 중심으로 하는 주리(主理)와 주기(主氣), 기호학파(畿湖學派)와 영남학파(嶺南 學派)와 같은 이분법적 연구를 지양해야 한다. 이러한 이분법적 연구는 일제의 어용학자인 Takahashi Toru(高橋亨.1878~1967)가 남긴 일제(日帝)의 잔재 (殘滓)이기 때문이다. 둘째, 처사(處士)로서 남명은 학문적으로 이단(異端)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 는 늘 불의에 항거하고, 무능한 왕과 그의 어머니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고, 척신(戚臣)들이 권력을 농단하는 조정에는 출사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늘 국정 에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시무책을 제시하였고, 다양한 문인을 교육하고 교유 하면서 장차 다가올 국난을 대비하였다. 셋째, 그는 국가의 안위와 민생을 위해 늘 국정의 혁신을 주창하였다. 특히 남 명은 최고통치자인 왕의 진정한 희생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그가 그린 「신명사도(神明舍圖)」에 잘 나타난다. 종합하면, 남명의 사상에는 근대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는 무실(務實)을 강조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 그는 당리당략이나 특정 학문을 고집하지 않 았고, 연구와 실천에서 항상 객관적·합리적 태도를 중시하였다. 이러한 남명의 학문과 사상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남명의 학문과 삶에서 현대의 한국병을 고칠 수 있는 방향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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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집󰡕의 간행이 언제 처음 이루어졌느냐 하는 것은 이미 전병윤과 오이환, 김윤수의 논문에서 1602년이냐 1604년이냐의 논란이 있어 왔다. 이에 대해 이 상필이 󰡔南冥學硏究󰡕 30집(2010.12.31간행)의 「󰡔南冥集󰡕 初刊年代 辨證」이란 논문에서, 󰡔남명집󰡕의 초간은 남명의 문인 정인홍이 그 서문을 쓴 1604년 8월 이라 볼 수밖에 없으며, 그 뒤 목판이 불타 관찰사 柳永詢의 도움으로 다시 판 각되어 간행되었다는 그 판본을 병오본으로 명명하게 되었음을 밝힌 바 있다. 이번에 발견된 이 책은 바로 그 병오본으로서, 제1권이 한 책으로 장책되어 있고, 제2권과 제3권(부록)이 한 책으로 장책되어 있다. 제1책은 서문 3장, 남 명행장 9장, 남명비문 6장, 제1권 37장 등 모두 55장으로 되어 있다. 제2책은 제2권 88장, 제3권 36장 등 모두 124장으로 되어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남명 집󰡕으로서는 最古本이며 完帙本이다. 이 병오본과 기유본을 대조하여 병오본의 내용을 기유본에서 어떻게 고쳤던 가 하는 점을 낱낱이 살펴본 결과 그 의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첫째는 병오본에서 기유본으로 바뀌면서 112곳에서 수정이 이루어졌다는 점 이다. 전병윤과 오이환은 28곳에서 수정이 이루어졌다고 하였으나, 같은 곳에 서 84곳이 더 발견되었고, 그들이 보지 못했던 2권 마흔다섯 장에서 28곳을 발 견함으로써, 그 사이에 변화된 곳이 모두 112곳임이 드러난 것이다. 둘째는 단순한 오자 수정이 72곳에서 이루어졌고 이들은 대체로 수정될 만한 것을 수정했다고 하겠으나, ‘先乘霽日’의 경우는 재고의 여지가 있고, ‘胤孫’의 경우는 잘못 수정한 것이었다. 셋째로 시 형식과 관련하여 이정한 것 가운데 ‘全身五十年前u’의 ‘五十年’은, 이 판본을 근거로 기존의 ‘四十年’을 수정하여 이를 정본으로 확정할 만하다. 넷째로 문맥과 관련하여 이정한 것은 앞으로의 연구과제가 될 만하다. 이 가 운데서 이미 잘 알려진 것이지만 특히 신명사명의 뒷부분을 완전히 삭거한 것 은 退溪의 指斥을 염두에 둔 결과로 해석된다. 그리고 退溪에게 ‘獨立之地’라고 한 것이라든지, 權應仁에게 五柱를 보내어 자신의 임종 시기를 알아보게 한 편 지라든지, 異姓養子를 분명히 기술한 것이라든지, ‘江樓’ 시를 보각한 것 등은 앞으로 연구의 한 부분으로 인용될 만한 것이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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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 이후 西人 老論系 학자들이 南冥 曺植을 의도적으로 폄하하는 상황 속에서, 남명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주장하여 존숭과 선양을 촉구한 이들은 星 湖 李瀷과 그의 제자들이었다. 조선후기에 남명학파가 매우 어려운 여건 속에 서도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성호학파 학자들의 노력이 중요한 역할 을 했다고 이해된다. 이 글은 성호의 제자인 順菴 安鼎福이 󰡔南冥集󰡕에 기록한 箚記를 통해 그가 남명의 학문과 삶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졌으며, 그 근거가 구체적으로 무엇이 었는지를 살펴보았다. 箚記에 근거해 볼 때, 안정복은 󰡔남명집󰡕을 매우 면밀하 게 읽고 관련 사실이나 자료를 참조하면서 고찰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무엇 때문에 󰡔남명집󰡕을 정밀하게 연구했을까? 그 이유는 무엇보다 남명이 진 정 어떤 인물인가를 깊이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판단된다. 남명의 문학 작품에 대한 품평이나 견해를 전혀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점, 인물ㆍ시기ㆍ사 건 등에 집중적인 관심을 기울이며 사실과 진위 여부를 정밀하게 고증한 점 등 을 고려한다면, 그가 󰡔남명집󰡕을 읽을 때 무엇에 유의했는지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안정복은 남명에 대한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해 그 인물의 학문과 인품에 관한 평가를 스스로 확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알게 된 남명의 학문 과 언행을 벗과 제자들을 권면할 때 인용하여 말했으며, 남명과 관련 있는 인물 들의 글을 지을 때는 반드시 그 연관성을 드러내어 연원을 밝혔다. 그러므로 남 명에 대한 안정복의 관심과 선양은 남명학파에게 가장 암흑한 시기였던 18세기 에 빛나는 이정표 같은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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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 중·후기 介坪里의 역사 변천을 일두 정여창과 사회·경제적 변화 에 초점을 맞추어 구명한 것이다. 먼저 개평리의 역사에서 상징적인 인물인 정 여창의 증조부 정지의, 조부 정복주, 아버지 정육을의 행력을 고증하여 가전 자 료의 오류나 윤색 부분을 구명하였다. 정여창의 행력은 조카 정희삼이 행장으 로 정리하였으나 1550년의 시점에서도 그에 대한 자세한 행적이 널리 알려지 지 않았음을 구명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1552년에 개암 강익이 주도한 사우 창 건은 의미가 크다. 그리고 1570년 5월에 이르러 정여창에 대한 국가의 포증은 대체로 마무리 되었다. 이와 함께 정수민이 수집하여 정구를 통해 찬집한 󰡔文獻 實紀󰡕는 사림세력의 구심점으로서의 정여창의 위상 정립과 제고의 근거였다는 점에서 개평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헌이다. 다음으로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대동법이 경기도에 처음으로 시행되고, 山郡인 함양도 1662년(현종 3)에 그 대상이 되었다. 이로써 개평리의 상민들은 호세로서 대동세를 포목으로 납부하였다. 개평리의 사족과 상민들은 17세기 중 엽의 庚辛大飢饉과 전염병의 유행이라는 사회·경제적 조건의 악화, 1728년 정 희량 사건에 의한 정치적 혼란 등으로 불안정한 형편에 처하였다. 더구나 18세 기 중엽 이후 환곡의 폐단은 개평리를 비롯한 함양지역 상민들의 삶을 매우 열 악한 상태로 밀어 넣었다. 대체로 1790년대를 기점으로 극심한 환곡의 폐단에 서 벗어났으나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지나치게 높게 책정한 田稅木價로 인한 농 민의 불만이 점점 쌓여가고 있었다. 개평리에 위치하였던 北倉, 場市, 介坪店 등 은 조선 후기 개평리의 사회·경제적 변동의 양상을 보여주는 역사 현장이며, 육 로 교통의 중심지이자 지역 내 거점의 증거이다. 이와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사 설의 介坪店이 생겨나고 운영되었다. 개평 장시는 조선 후기 5·10일장으로 개 평리가 주변 마을과의 관계에서 사회·경제·문화의 구심점의 역할을 했으며, 개 평리 사족과 상민들의 다양한 삶의 조건들을 상징하는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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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睡堂 鄭秀民은 一蠹 鄭汝昌의 증손으로 개평마을 종택에서 태어났다. 정여 창은 김종직 문하에서 수학했고, 연산군의 스승이 되었으나 무오사화에 연루되 어 배소에서 사망하고, 갑자사화로 剖棺斬屍되었다. 물론 정여창이 중종반정으 로 복관되었지만 정여창의 증손이란 점은 정수민의 삶을 지배하는 커다란 그림 자였고, 그는 스스로 이 그림자를 덮어쓰기로 한 듯하다. 따라서 그는 出仕를 포기하면서 󰡔文獻公實記󰡕를 편찬하는 등 증조인 정여창의 後事를 도맡았다. 그 러나 정수민은 단지 정여창의 증손이거나 정여창의 後事를 정리한 인물로만 치 부하기에는 업적이 너무 크다. 그 업적의 첫 번째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 희 생되어 관련 자료가 민멸된 정여창의 사적을 정리한 󰡔문헌공실기󰡕를 편찬한 일 이다. 이는 집안의 일을 넘어 사라질 수 있는 역사의 인물 사적을 정리한 의미 있는 역사적 일이다. 두 번째는 함양 군지인 󰡔天嶺誌󰡕를 편찬하여 인문지리학 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춘수당집󰡕을 남겨 후학들에게 문인으로서 한 인간의 문학세계와 삶의 면모, 교유 및 시대를 이해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곧, 정수민은 󰡔춘추좌전󰡕에서 말한 三不朽, 立德․立功․立言을 이룬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찍이 출사를 포기하고 평생 덕행을 닦았으니 입덕이요, 집안을 넘어 역사의 한 분인 문헌공 정여창의 실기를 정리하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작 성하였으며, 지역의 문화와 역사, 풍속을 기록하여 지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 였으니 이는 입공이다. 또한 시와 산문을 포함한 문학 작품을 남겼으니 입언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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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서사문학사에서 주목할 만한 양식의 하나인 조선후기 野談은 조선전기 筆記 양식의 성립과 함께 시작되었다. 야담은 見聞의 기록을 특징으로 삼는 필 기가 하층 서민들의 구전서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조선후기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른 다양하면서도 독특한 인물군상의 욕망에 얽힌 서사에 주목함으로 써 성립한 양식이라 정의할 수 있다. 이후 야담은 근대를 겪으며 계몽을 위한 야담대회로 거듭났으나 식민지 현실에서 사회운동으로서의 의식성은 상실한 채 윤백남의 󰡔월간야담󰡕과 김동인의 󰡔야담󰡕 양대 잡지로 발간되며 대중들의 오 락물로서 통속화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두 야담 잡지는 공히 5년을 넘는 오랜 기간 존속하며 우리나라의 전 설, 逸話, 野史, 야담은 물론 조선 말기와 근대 초기의 비사들을 집대성하는 결 과를 얻어 내었다. 이는 잡지라는 근대 언론매체의 힘을 빌린 전근대 야담의 전 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서사물까지 소개하였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서사를 수용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소 재를 수집하고 이를 다시 근대 잡지의 성격에 맞게 윤색할 수 있는 작가를 요청 하면서 1930, 40년대 야담 작가군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때 야담 작가들은 다 양한 소재의 발굴에 따른 개작, 윤색, 창작을 통해 저마다의 성격을 성취하였고, 식민지 성격의 변화와 함께 잡지의 운영에 맞춘 변모 양상을 보여주었다. 본고 는 이를 통해 야담 작가군이라는 식민지 시기 새로운 면모의 문학 현상을 확인 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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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HK 지리산권문화연구단의 연구성과를 총결하면서 지리산인문학이라 는 새로운 범주의 학문으로의 이전을 준비하는 과정 중의 하나로 씌어진 것이 다. 이를 위해 우선 지리산권문화연구라는 HK사업의 아젠다가 갖는 ‘징후’로서 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10년전 징후읽기와 그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한 HK사업 은 10년 후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물결로 본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HK사업으로서의 지리산권문화연구와 지리산인문학은 한국사회에 서 제4차 산업혁명에 대한 급박한 대응으로서 복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글에서는 먼저 지리산권에서 산출한 고전문학 작품들이 어떤 것 이 있는가부터 살펴보았다. 고전문학은 전통시대에 산출한 국문문학과 한문서 사를 총칭하는 것이며 여기에 구비문학인 민요와 설화를 포함한다. 지리산권 고전문학 작품들을 쭉 열거해본 결과 전기소설이나 판소리, 동학가사 등 고전 문학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들이 이 지역에서 산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어서 지리산권고전문학이 제4차 산업혁명의 특징들을 갖추고 있으며 이를 통해 제4차 산업혁명의 한국적 전개에 시사를 줄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하였다. 작품세계는 기본적으로 증강현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작품과 사람들을 엮 어 하나의 장르가 생성되는 현장의 운동 논리는 기본적으로 지능과 연결로 대 표되는 제4차 산업혁명의 前驅的 특징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글에서는 일 단 지리산인문학과 지리산권고전문학, 제4차 산업혁명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시론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앞으로 이러한 논의를 발전시켜 아젠다로서 지 리산인문학의 임무를 수행하는 밑거름이 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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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권문화연구단은 2007년 9월부터 10년 동안 인문한국(HK)사업으로 지리산권 문화에 대한 총체적인 연구를 수행해 왔다. 이 글의 목적은 한국근현 대사 영역에 한정하여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 향후 과제와 방향을 모 색하기 위한 것이다. 한국근현대사 영역에서 사업단 실적은 자료집 발간 총 7권, 사업단 소속 연구 자 논문 9편이며, 사업단에서 주최한 학술대회에 외부 연구자로 참여하여 그 성 과물을 사업단 저작물에 실은 논문은 5편이다. 이러한 연구성과를 자료집과 연 구논문이라는 두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연구논문은 주 제별로 검토할 경우 유형화할 수 없는 논문이 있기 때문에 편의적으로 근대시 기와 현대시기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근대사 연구는 동학농민혁명에 집중된 편이다. 이러한 논문은 지리산권 동학 농민혁명의 구체적인 전모, 지역별 확산과정과 향촌사회의 대응, 남원지역의 동학 포교와 조직화 과정 등을 파악하였다. 또한 한말 의병장 고광순의 지리산 근거지론을 탐색함으로써 지리산이 의병의 장기항전의 근거지로 주목을 받았 다는 사실을 조명하였다. 이밖에도 지리산권 지식인 황현의 연구사 정리, 지리 산권의 근대학교 설립 등을 다룬 논문이 있다. 현대사 연구는 여순사건과 빨치산 활동에 집중되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여 순사건을 둘러싼 정부와 국회의 대립 양상이나 수습방안, 여순사건의 주도층이 었던 14연대가 지리산으로 입산하는 과정, 그리고 지리산 지역에서 유격대를 조직하여 빨치산 활동을 전개한 전모, 빨치산 활동에 영향을 받은 지역의 실태 등을 파악할 수 있다. 이상의 검토를 통해서 드러난 한계를 살펴보고 앞으로의 과제를 전망하였다. 먼저 연구 시기의 편중성을 들 수 있다. 앞으로는 일제시기, 해방 3년기, 한국전 쟁 이후 시기, 산업화시기로 넓혀 연구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둘째, 연구 대 상으로써 지역공간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지리산권역을 지리산과 인접한 지역 으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현 시기에 맞게 적절하게 범위를 설정하는 것이 무엇 보다 중요하다. 셋째, 연구 주제가 운동사에 집중된 편이다. 지리산권역에서 펼 쳐진 사회, 경제적인 변동과 그에 따른 문화 양상의 변화상을 탐구한 연구는 거 의 없다. 따라서 지리산권역이 담아내고 있는 정체성과 다양한 가치를 파악하 기 위해서는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사회변동이나 문화 양상을 탐색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또한 생활사, 일상사 연구가 필요하다. 일상사 연구는 주변화 되거나 배제된 지역민의 경험과 실천을 재현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 다. 넷째, 기초자료의 정리‧분석과 발간 작업을 보다 활발히 할 필요가 있다. 지 역사 연구의 활성화, 체계화를 위해서는 지역에 산재하고 있는 기초자료의 수 집과 정리가 선행되어야 한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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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지리산권문화연구단은 ‘지리산권 문화 연구’를 여러 분야에서 폭넓게 수 행해 왔다. 현대문학 분야에서는 ‘지리산’에 함축된 ‘근대성’을 규명하기 위해 ‘기행(탐험, 여행, 관광 등)’에 초점을 맞춰 일제 강점기의 기행문학 등을 대상 으로 지리산의 근대적 표상을 다각적으로 규명하였다. 또한 르포‧소설‧희곡‧시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분석하여 지리산에 얽힌 역사적 상흔과 그의 문학적 대응 양상을 면밀하게 논구해 왔다. 본고는 기왕의 논의를 바탕으로 연구 성과를 집약하고, 지리산권 현대 문학의 특징과 의의를 종합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試論的 논의이다. 이를 위해 본고는 지리산이 전근대시기에는 둔세자의 피난처이자 민중의 도피처였으며, 근대 이 후에는 남과 북이 대립했던 이데올로기 戰場이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지리산을 배경으로 창작된 여러 문학 작품에 함축된 주요한 인문학적 사유와 태도 등을 靖獻 意識과 哀悼 倫理, 그리고 自癒 意志로 나누어 논구하였다. 정헌 의식이란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두는 탈정치적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학문 적·사상적 신념을 고양하고, 이를 통해 도덕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식을 일컫 는다. 김택술과 이은상의 기행문학, 그리고 󰡔지리산󰡕의 중심 인물인 박태영에 게서 이와 같은 정헌 의식이 나타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근대 이후 지리산에서 죽어간 ‘만혼령’에 대한 문학적 애도 작업은 일찍이 70 년대 지리산 소재 시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만혼령’을 존재론화‧의미론 화하는 상징화-애도 작업은 ‘國史로부터의 伸冤’과 ‘대문자 역사로의 기입’이라 는 두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 이성부와 송수권의 시편 에서 ‘지리산 만혼령’이 다시 출현하게 되는데, 그의 ‘비탄’과 ‘피울음’이 ‘만혼 령’에 대한 충실한 기억을 목표로 하는 哀悼 倫理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고찰하 였다. 분단과 전쟁은 ‘지리산 만혼령’을 출현시켰을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에 게도 깊은 상흔을 남김으로써 그 후과는 또다른 비극의 맹아로서 상존하고 있 다. 이러한 후과는 우연적으로 혹은 운명적으로 해소되거나 극복될 수 없는 것 이다. 여러 작품들이 반목·불신·원한·증오를 넘어 화해와 용서를 향한, 자성·고 백·참회·공감·생명 존중이라는 자발적이고 자각적 행위, 즉 自癒 意志를 역설하 고 있음을 검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