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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20세기와 함께 시작된 근대는 한반도에 상당한 충격과 함께 급격한 변화를 요구하였다.특히 ‘근대 국민 국가 건설’의 명제 앞에 수많은 시행착오와 갈등이 예고되었다.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민의 각성과 계몽이 필요하였으며,여기에 표기 체계의 전환이 시급한 문제로 대두하였다.즉 ‘한문(漢文)’으로 대표되던 사대부(士大夫)중심의 질서체계는 ‘한글’을 통해 근대 지식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재편될 필요가 있었다.이 과정에서 ‘문장(文章)․진문(眞文)’의 지위를 점하던 문자 체계는 ‘한자․한문’으로 격하되고 폐기될 위기에 처하였다. 하지만 이는 일순간에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 없었다.대신 한문은 근대 학문 제도 안에서 교과서를 통해 교육되는 교과의 하나로 위상이 변경되었다.그 변화의 과정은 상당히 지난했는데,근대 언론매체의 한자․한문 연재란을 통해서도 이러한 문자 체계 변모의 한 과정을 볼 수 있다.이점에서 일본인 다케우치(竹內錄之助)가 1913년부터 4년간 발행한 新文界 에 연재된 한자․한문 연재는 주목을 요한다.근대의 표징인 ‘잡지’라는 매체는 대중성과 함께 공공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신문계 에는 樂齋權寧瑀의 虛字소개,厚齋生朴麟宗의 「漢字의 字解」와 함께 배재학교 교사였던 姜邁의 「漢文新講話」가 한자․한문 교육을 위해 연재되었다.특히 강매는 한문을 근대 어문 문법 체계의 형식으로 소개하고,이후 漢文法提要 로 출간하고 있다.본고는 언론매체인 신문계 를 통해 한자․한문 분야가 근대 학문의 하나로 자리 잡기 시작하는 한 양상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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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9.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松溪先生으로 알려진 申季誠(1499-1562)은 흔히 南冥 曺植의 ‘畏友’ 로 언급되고는 한다. 송계는 平山을 본관으로 하는 고려 건국의 충신인 壯節公 申崇謙의 후예로 연산군 5년 밀양 후사포리에서 출생해 명종 17년에 향년 64세의 일기로 삶을 마친 인물이다. 하지만 송계 신계성의 행적은 문학이나 사학, 혹은 철학계에서 그리 주목을 받지 못한 분이다. 다만 사학계에서는 조선전기 영남 지역의 사림 학맥을 고찰하면서, 혹은 남명 조식의 학술적 면모를 언급하는 과정에 잠시 언급되고는 할 뿐이다. 하지만 송계가 영남 지역 사림의 한 부분을 대표하며 남명과 함께 언급된다는 점에서 학계가 간과할 수 없는 인물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밀양이라는 지역은 이미 삼한시대에 김제의 벽골제, 제천의 의림지와 함께 수산제와 같은 수리 시설을 갖춘 농경 지역이었다. 또한 낙동강을 이용한 漕運倉의 운영은 물론 嶺南大路의 거점에 놓인 嶺南樓라는 조선3대 누각에 꼽히는 문화적 존재가 증명하듯 주변 지역과의 관계망을 갖춘 경제의 중심으로서 근대 전환의 시점 까지 활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와 같은 지역적 기반을 바탕으로 春亭 卞季良(1369-1430)과 佔畢齋 金宗直(1431-1492)의 뒤를 이어 사림의 중망을 얻은 송계와 같은 인물의 등장이 일견 자연스럽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송계 신계성의 면모와 학적 형상은 춘정과 점필재에 비해 그리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남명을 비롯해 명종 때 領相을 지낸 東皐 李浚慶, 錦溪 黃俊良 등의 언급을 볼 때 영남 사림의 한 부분인 송계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을 듯 하다. 송계가 남명, 黃江 李希顔과 세상에서 嶺中三高로 일컬어지기도 하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본고는 송계 가문의 밀양 정착 과정으로부터 후대인들의 송계 추숭 과정을 살펴 그의 영남지역에서의 위상을 엿보고자 한다.
        3.
        2017.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한국 서사문학사에서 주목할 만한 양식의 하나인 조선후기 野談은 조선전기 筆記 양식의 성립과 함께 시작되었다. 야담은 見聞의 기록을 특징으로 삼는 필 기가 하층 서민들의 구전서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조선후기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른 다양하면서도 독특한 인물군상의 욕망에 얽힌 서사에 주목함으로 써 성립한 양식이라 정의할 수 있다. 이후 야담은 근대를 겪으며 계몽을 위한 야담대회로 거듭났으나 식민지 현실에서 사회운동으로서의 의식성은 상실한 채 윤백남의 󰡔월간야담󰡕과 김동인의 󰡔야담󰡕 양대 잡지로 발간되며 대중들의 오 락물로서 통속화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두 야담 잡지는 공히 5년을 넘는 오랜 기간 존속하며 우리나라의 전 설, 逸話, 野史, 야담은 물론 조선 말기와 근대 초기의 비사들을 집대성하는 결 과를 얻어 내었다. 이는 잡지라는 근대 언론매체의 힘을 빌린 전근대 야담의 전 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서사물까지 소개하였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서사를 수용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소 재를 수집하고 이를 다시 근대 잡지의 성격에 맞게 윤색할 수 있는 작가를 요청 하면서 1930, 40년대 야담 작가군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때 야담 작가들은 다 양한 소재의 발굴에 따른 개작, 윤색, 창작을 통해 저마다의 성격을 성취하였고, 식민지 성격의 변화와 함께 잡지의 운영에 맞춘 변모 양상을 보여주었다. 본고 는 이를 통해 야담 작가군이라는 식민지 시기 새로운 면모의 문학 현상을 확인 하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