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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성리학을 사상적 토대로 삼은 사림파의 학문적 계보와 연대는 조선왕조의 건 국과 함께 역사적 행보를 시작한다. 鄭夢周, 吉再로부터 江湖 金叔滋와 그 아들 佔畢齋 金宗直으로 이어지는 조선 유학사와 정치사의 서막에 해당하는 셈이다. 이후 星湖 李瀷은 退溪와 함께 단연 南冥 曺植을 영남지역의 학자로 지목하며 문명의 극치를 이룬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두 학자의 활동 지역에 따라 上 道의 퇴계와 下道의 남명은 각각 ‘仁’과 ‘義’를 주장하였다는 점에서 특징이 드 러난다. 퇴계가 학적 자세로서의 仁을 구현한 예악의 완성에 집중하였다면, 남명 은 ‘敬以直內 義以方外’로 대표되는 克己復禮를 통한 ‘內聖外王’의 목표에 집중한 실천적 측면이 강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은 남명의 강한 실천성은 후학들 의 전범이 되었다. 來庵 鄭仁弘이 이룩한 학파의 흥성했던 시기는 물론이거니와 戊申亂(1728)을 거쳐 정조의 賜祭文(1796)이 내리기 이전까지의 침체기에도 학 맥을 유지하던 원동력이 되었다. 본고는 18세기 남명학파의 인물로 이해되는 丹溪 지역 안동 권씨 가문의 梧潭 權必稱의 학파적 연원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의 집안은 15세기 중반 丹城縣에 혼인 관계로 정착한 이후 權潗·權濬 형제와 권필칭의 5세조 權濤가 문과에 합격 해 ‘三權’으로 불리면서 지역적 기반을 확고하게 잡았다. 그런데 18세기 무렵부 터 단계 지역 안동 권씨 가문은 문과가 아닌 무과급제자를 배출하기 시작하였다 는 점에서 특색을 지닌다. 그리고 권필칭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그렇지만 그는 34세 때 櫟泉 宋明欽을 방문하였으며, 52세 때 渼湖 金元行을 찾아가 문인록에 도 올랐을 정도로 학문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다. 뿐만 아니라 권필칭은 51세 때 고향인 三嘉에 梧潭精舍를 마련해 독서와 講學의 터전을 삼아 후학 양 성에 매진하였다. 특히 자신이 관직 생활을 하던 지역에서 유생들을 교육하고 백일장 등을 시행해 유학의 권면에 힘썼다. 그리고 그는 󰡔소학󰡕, 󰡔주역󰡕, 󰡔성리 대전󰡕, 󰡔중용󰡕을 탐독하며 ‘誠’과 ‘敬’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실천 자세를 중시하 는 修身의 생활 태도를 강조하였다. 이는 그의 만년 저작인 「隨思輒錄」에 집중 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를 통해 남명 조식의 심적 수양과 실천적 면모의 학문 적 흔적이 18세기 단계 지역 안동 권씨 가문에 잔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 었다.
        2.
        2019.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松溪先生으로 알려진 申季誠(1499-1562)은 흔히 南冥 曺植의 ‘畏友’ 로 언급되고는 한다. 송계는 平山을 본관으로 하는 고려 건국의 충신인 壯節公 申崇謙의 후예로 연산군 5년 밀양 후사포리에서 출생해 명종 17년에 향년 64세의 일기로 삶을 마친 인물이다. 하지만 송계 신계성의 행적은 문학이나 사학, 혹은 철학계에서 그리 주목을 받지 못한 분이다. 다만 사학계에서는 조선전기 영남 지역의 사림 학맥을 고찰하면서, 혹은 남명 조식의 학술적 면모를 언급하는 과정에 잠시 언급되고는 할 뿐이다. 하지만 송계가 영남 지역 사림의 한 부분을 대표하며 남명과 함께 언급된다는 점에서 학계가 간과할 수 없는 인물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밀양이라는 지역은 이미 삼한시대에 김제의 벽골제, 제천의 의림지와 함께 수산제와 같은 수리 시설을 갖춘 농경 지역이었다. 또한 낙동강을 이용한 漕運倉의 운영은 물론 嶺南大路의 거점에 놓인 嶺南樓라는 조선3대 누각에 꼽히는 문화적 존재가 증명하듯 주변 지역과의 관계망을 갖춘 경제의 중심으로서 근대 전환의 시점 까지 활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와 같은 지역적 기반을 바탕으로 春亭 卞季良(1369-1430)과 佔畢齋 金宗直(1431-1492)의 뒤를 이어 사림의 중망을 얻은 송계와 같은 인물의 등장이 일견 자연스럽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송계 신계성의 면모와 학적 형상은 춘정과 점필재에 비해 그리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남명을 비롯해 명종 때 領相을 지낸 東皐 李浚慶, 錦溪 黃俊良 등의 언급을 볼 때 영남 사림의 한 부분인 송계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을 듯 하다. 송계가 남명, 黃江 李希顔과 세상에서 嶺中三高로 일컬어지기도 하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본고는 송계 가문의 밀양 정착 과정으로부터 후대인들의 송계 추숭 과정을 살펴 그의 영남지역에서의 위상을 엿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