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물

남명학연구 KCI 등재 The Nammyonghak Study

권호리스트/논문검색
이 간행물 논문 검색

권호

제64권 (2019년 12월) 9

1.
2019.1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죽와 하일호의 시문학 세계의 양상과 그 특징에 대한 고찰을 연구의 목적으로 삼았다. 하일호의 가계는 대대로 남명의 학문적 영향을 입었고 하 일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유학적 도덕성을 견지하여 孝友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한편 학문공부에 근면하고 후학의 지도에서 『소학』의 가르침을 성 실히 전수하였다. 그의 작품에는 가족을 사랑하고 염려하는 가부장으로의 진중 한 모습이나 자손과 후배들에게 평생 체득한 삶의 지침을 전수하는 노년의 문사의 모습, 일상에서 마주하는 소박한 사물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나 해학 넘치는 모습이 형상화 되었다. 유가적 관념을 형상한 작품 외에, 소박한 일상의 사건과 사물을 묘사한 작품에 나타나는 구체성과 묘사성은 유학자이자 문인으로서의 하 일호의 작품이 갖는 특징이다. 이것은 자국적인 것의 가치를 인식하고 조선어를 활용한 시의 창작을 주장한 그의 독자적 시론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조는 비록 평범하지만 내용은 전실한 시작품의 창작을 강조한 것이나 예에 부합되고 실지로 적용될 수 있는 학문 자세를 강조한 것 역시 그의 시문학 세계의 특징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
2019.1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성리학을 사상적 토대로 삼은 사림파의 학문적 계보와 연대는 조선왕조의 건 국과 함께 역사적 행보를 시작한다. 鄭夢周, 吉再로부터 江湖 金叔滋와 그 아들 佔畢齋 金宗直으로 이어지는 조선 유학사와 정치사의 서막에 해당하는 셈이다. 이후 星湖 李瀷은 退溪와 함께 단연 南冥 曺植을 영남지역의 학자로 지목하며 문명의 극치를 이룬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두 학자의 활동 지역에 따라 上 道의 퇴계와 下道의 남명은 각각 ‘仁’과 ‘義’를 주장하였다는 점에서 특징이 드 러난다. 퇴계가 학적 자세로서의 仁을 구현한 예악의 완성에 집중하였다면, 남명 은 ‘敬以直內 義以方外’로 대표되는 克己復禮를 통한 ‘內聖外王’의 목표에 집중한 실천적 측면이 강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은 남명의 강한 실천성은 후학들 의 전범이 되었다. 來庵 鄭仁弘이 이룩한 학파의 흥성했던 시기는 물론이거니와 戊申亂(1728)을 거쳐 정조의 賜祭文(1796)이 내리기 이전까지의 침체기에도 학 맥을 유지하던 원동력이 되었다. 본고는 18세기 남명학파의 인물로 이해되는 丹溪 지역 안동 권씨 가문의 梧潭 權必稱의 학파적 연원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의 집안은 15세기 중반 丹城縣에 혼인 관계로 정착한 이후 權潗·權濬 형제와 권필칭의 5세조 權濤가 문과에 합격 해 ‘三權’으로 불리면서 지역적 기반을 확고하게 잡았다. 그런데 18세기 무렵부 터 단계 지역 안동 권씨 가문은 문과가 아닌 무과급제자를 배출하기 시작하였다 는 점에서 특색을 지닌다. 그리고 권필칭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그렇지만 그는 34세 때 櫟泉 宋明欽을 방문하였으며, 52세 때 渼湖 金元行을 찾아가 문인록에 도 올랐을 정도로 학문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다. 뿐만 아니라 권필칭은 51세 때 고향인 三嘉에 梧潭精舍를 마련해 독서와 講學의 터전을 삼아 후학 양 성에 매진하였다. 특히 자신이 관직 생활을 하던 지역에서 유생들을 교육하고 백일장 등을 시행해 유학의 권면에 힘썼다. 그리고 그는 󰡔소학󰡕, 󰡔주역󰡕, 󰡔성리 대전󰡕, 󰡔중용󰡕을 탐독하며 ‘誠’과 ‘敬’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실천 자세를 중시하 는 修身의 생활 태도를 강조하였다. 이는 그의 만년 저작인 「隨思輒錄」에 집중 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를 통해 남명 조식의 심적 수양과 실천적 면모의 학문 적 흔적이 18세기 단계 지역 안동 권씨 가문에 잔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 었다.
3.
2019.1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8세기 강우 지역은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叛逆鄕이라는 汚名을 쓴 후, 정 치·사회적으로 가해지는 탄압을 감내해야 했고 도덕적인 질시와 비난에서도 자 유로울 수가 없었다. 濟菴 李恒茂(1732~1799)는 바로 이 시기에 활동한 강우 지역의 처사로서, 丹城縣 培養里에서 대대로 기반을 잡고 살아온 향촌 사족 출 신이다. 본관이 합천인 데다 평생을 산청에서 살았던 제암에게, 반역향이란 汚名 은 자기 가문의 忠心을 否定당하는 치욕이 되었다. 제암은 수차례 과거에 낙방하면서 항거할 수 없는 현실의 벽을 충분히 감지하 였지만, 그 속에 골몰하거나 침체되지 않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노력은 선조의 문집 간행을 도모하는 것, 단성 지역의 書院 및 祠宇를 건립하고 관리하는 것, 향촌 사회의 풍속과 기강을 확립하는 것 등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그의 內的 不平은, 그것을 해소하 는 유력한 수단인 글쓰기로 표출되었다. 본 논문에서는 제암 문학을 ‘先賢의 공간과 結束의 글쓰기’ ‘鄕村 공간과 凝集 의 글쓰기’ ‘私的 공간과 省察의 글쓰기’로 삼분하여 분석하여, 제암에게 글쓰기 가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선조의 유지를 계승하고, 지역 선현의 권위를 확인 하고, 유학의 정신적 가치를 천명하는 유력한 수단이었음을 밝혔다. 이에 제암의 문학은 본인의 내적 불평을 해소하고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감소시키기 위한 노력의 산물로 이해될 수 있다.
4.
2019.1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남고 이지용은 남명의 유향이 스민 산청군 단성에서 태어나 남명에 대한 존모의 뜻을 품고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학문적인 면에 있어서는 남명학의 영향 아래 있었지만 문학에 있어서는 남명학의 범주에 속하면서도 자신의 성정을 표현하 는데 있어서는 뛰어난 묘사와 정제된 문풍으로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의 시는 인위적인 수사와 彫琢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성정의 발 로이며 天稟과 자질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삶에 대한 깊은 관조와 성찰에 의 해 발현된 언어들은 아무런 격의 없이 사람에게 스며들 듯 감동과 찬탄이 나오게 한다. 「관등행」은 이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악부시 형태의 시로 당시의 풍속과 시대 상을 읽을 수 있는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 작품으로 민속학적인 측면에서도 중요 한 자료가 될 만한 작품이다.
5.
2019.1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仁祖反正(1623)으로 쇠퇴하기 시작한 남명학파는 戊申亂(1728) 이후 강우지역 에 대한 경계와 불신이 짙어지면서 더욱 위축되더니, 끝내 과거의 영광을 회복 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야 했다. 눌암 박지서가 한창 활 동하던 시기는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으로, 남명학의 쇠퇴가 150년 이상 지 속되고 나아질 기미조차 없던 시기였다. 눌암은 가계·학문·지역적 연원으로 보아 남명학적 성향이 다분히 드러날 수밖 에 없는 여건이었지만, 정치적으로 배제된 지역의 在地士族으로서 문중을 살리기 위해서는 현실적 대세를 비켜갈 수 없었다. 이에 진주지역에 세거한 눌암의 문중도 증조부 때부터 南人化 성향을 드러냈고, 눌암에 이르러 더욱 폭넓은 교유를 통한 남인화가 이루어졌다. 그에게서 보이는 退溪 중심의 治學 방법이나 문학작품에서 남명학 관련 언급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점 등이 이러한 문중적 성향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눌암이 강우지역 남명학파적 성향을 버리고 남인으로서의 특성 만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가계·학문·지역적 여건에 의해 계승된 남명학파적 성 향 위에 남인화 성향이 보태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눌암이 평생 이룩한 수많은 지적활동은 강우지역에 집중되어 나타났다. 강우지식인의 오랜 염원 인 南冥의 文廟從祀 請願을 주도하였고, 침체된 진주지역의 鄕學風 쇄신을 위해 향교와 서원 등의 교육시설 중건에 앞장섰으며, 남명학파의 시련과 함께 역사에 묻혀버린 지역 선현의 삶을 찾아 기록으로 남기려는 노력들이 이를 증빙하고 있 다. 적어도 그의 생애에 드러난 활동으로 평가한다면, 눌암은 남명학파적 성향 을 지닌 江右學者였다고 하겠다.
6.
2019.1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오연 김면운은 19세기 경상 우도의 유림 사회에서 중임을 맡으며 활발히 활동한 인물로서, 총 88제 147수의 한시를 문집에 남겼다. 그 중 주위의 인물들 과 교유하며 짓거나 선유들의 작품에 소회를 붙인 화운시, 증별시, 만시가 대부 분을 차지한다. 오연의 시문학은 진심을 전하며 서로를 격려하였던 19세기 강우 지역 유림들의 문학적 특징과 삶의 양식을 잘 보여준다. 이는 시의 실용적 역할 을 중시하였던 남명 시관의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더욱 고찰될 필요가 있다. 오연은 특히 만년에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잇달아 겪고, 궁핍한 현실과 질병 으로 운신할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울적한 소회를 시문학에 적극적으 로 담아냈다. 또한 자신의 작품을 주위에 보이고 조언을 구하며 文才를 연마하 고자 하였다. 제석시 등 성찰적 작품은 오연 시문학의 또 다른 특징을 보여주었는데, 대체로 정적인 풍경 안에 詩意를 간결한 언어로 표현하여, 沖澹閑雅한 풍격을 만들어냈다. 이는 자연스러운 성정의 발현을 중시하는 시관, 은일적 시세계를 지향한 작자의식 등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안빈낙도의 주제의식은 처사 문학적 특징을 보여주는데, 이는 자신의 현실적 어려움을 작품 안에서 초극하면서, 세속적 가치의 초월을 지향한 남명학파의 시문학 전통을 계승하는 단서라고 할 수 있다.
7.
2019.1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지리산의 선계로서의 표상이 조선시대에 어떻게 강화되었는지 그 구체적인 방식을 천착하고, 그 속에 투영되어 있는 사대부 문인들의 의도와 욕망을 추적하는 데 주된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본고에서는 오랫동안 지리산 관련 정보가 집적되어 있어 지리산의 표상과 표상화 방식을 이해하는 데 효과적인, 역 대 지리산 遊山記를 주된 분석텍스트로 삼아 논의를 진행하였다. 이번 연구를 통해 조선시대 지리산의 선계 표상이 嶺南士林의 종장과 그 후학 들로 대표되는 지리산 유산객들에 의해 강화되었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지리산이 仙界의 方丈山인 근거가 매우 희박함에도 불구하고, 영남사림은 이를 오랫동안 의심 없이 받아들여 의미화함으로써 지리산을 선계로 표상화하는 토대 를 마련하였다. 여기에는 三神山의 구도 속에서 지리산의 독보적 위치를 드러내 려 했던 영남사림의 의도와 욕망이 강하게 작용하였다. 더하여 선현들과의 동일 시를 통해 자기 유람의 의미를 찾으려 했던 공통의 의식과 은일과 탈속을 지향했던 욕망 또한 함께 작용하였다. 다만 방장산으로 자리매김 된 지리산은 최치원을 비롯한 儒仙을 현재에 소환하 여 지속적으로 만나고 靑鶴을 끌어들여 靑鶴洞을 실재화하는 방식을 통해 구체적 인 생명력을 갖게 된다. 이때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또 다른 주체는 바로 신흥사 와 쌍계사 등 지리산 주요 사찰에 기거했던 스님들이었다. 이들은 금강산을 불국 토로 만들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지리산의 선계화 작업에 참여하였다. 스님들을 통해 강화된 청학동을 비롯한 洞天에서의 살아 있는 장소체험은 삼 신산(방장산)을 관념 속 실재가 아니라 현실에 실존하는 선계로 만드는 데 기여 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지리산은 실제로 신선이 살고 있어 구체적인 선계 체험이 가능한 살아 있는 장소로 바뀌게 된다. 이는 다른 삼신산으로 거론되는 금강산이나 한라산에서는 확인하기 어려운 점으로, 조식 이하 영남사림들이 지 리산을 선계로 표상화한 결과이자 그 의미라 할 만하다.
8.
2019.1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문헌에 실린 봉정사 관련 시문들을 중심으로 시문이 창작된 연대와 배경과 의미를 살펴보고, 이들 시문을 통해 봉정사가 사찰이 갖는 기본적 기능 이 외에 유교적 공간으로도 적극적으로 활용된 점을 중점적으로 고찰하였다. 봉정 사는 신라 시대의 승려인 能仁이 창건한 고찰로 알려져 있다. 극락전과 대웅전 은 독특한 건축 양상을 인정받아 국보로 지정될 만큼 매우 가치적인 공간예술이다. 또 봉정사를 포함한 주변 원림은 사찰이 지닌 특수성과 우수성을 인정받아 세계유산에 등재되는 성과를 이루었다. 이렇듯 봉정사는 불교 문화로서의 전통성과 심미성을 지닌 공간이다. 그런데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지식인들이 사찰 공간을 유교 공간으로 활용하였고 특히 조선의 유학을 집대성한 퇴계가 16세에 이곳을 찾은 이후로는 그 상징성이 더욱더 커갔다. 그리하여 봉정사는 독서와 강학 공간으로 널리 활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퇴계집』을 중간하는가 하면 『번암집』과 『서산집』을 간행하는 등 인쇄문화의 꽃을 피웠다. 특히 김시 침·류원지·이이송 등이 주도하여 창건한 蒼巖精舍는 추념의 공간이자 성지순례 코스로서의 그 기능이 강화되었다. 이렇듯 불교적 수행·의례·강학의 공간인 사 찰이, 지역 사대부와 사족에게 강학·문집 간행·풍류 등의 방식으로 향유되었다.
9.
2019.1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1746년(영조 22) 지금의 블라디보스토크에 해당하는 紅旗浦와 紅島 일대를 정탐한 「紅島偵探記」에 대하여 정탐을 하게 된 배경과 정탐 내용을 중심으로 고찰한 것이다. 정탐의 배경으로는 영조 22년에 청나라와의 압록강 국경 지대에서 발생한 莽 牛哨設訊과 退柵에 의한 국경선의 설정 문제, 그리고 당시 북방에 거주하던 磴 磴磯가 침입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보다 많 은 정보를 얻기 위해 영조는 校理 嚴瑀를 北關御使로 파견하고, 嚴瑀는 南濟極 등 27명을 두 차례에 걸쳐 紅旗浦와 紅島 일대로 보내 정탐을 해오게 한다. 그 과정에서 磴磴磯에 대한 여러 정보와 함께 당시 청나라가 진행하고 있던 蔘 偸 採者의 단속에 의한 유민의 발생과 紅旗浦와 紅島 일대로 도망한 漢人 토벌의 규모와 양상을 정탐하는 데 성공한다. 嚴瑀는 정탐의 결과를 영조에게 보고하고, 영조를 비롯한 조정에서는 당시의 이러한 정황과 지리적 정보를 알게 됨으로써 磴磴磯에 대한 논의는 일단락된다. 정탐이 끝난 뒤에 영조는 해당자들에게 포상을 하고, 다음해인 1747년에 청 나라에서는 磴磴磯에 들어가 14년을 살았던 두 조선 여인을 잡아 한양으로 보내오는데, 형조에서 심문한 다음 섬으로 유배를 보낸다. 또한 이 정탐의 결과 얻어진 지리 정보는 『海東地圖』의 「西北彼我兩界全圖」를 제작할 때에 거의 그대 로 수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당시의 정탐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紅島偵探記」는 다음의 몇 가 지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1) 당시 급박하게 진행되었던 莽牛哨設訊과 退柵 문제, 磴磴磯 침입의 위기의 식을 정탐이라는 방법으로 극복하고자 한 노력과 정보 취득 과정을 알 수 있다. 2) 조선시대에 다양하게 전개한 정탐 활동의 진행 과정과 방법, 운용 인원, 정탐 노정, 정탐시에 만났던 사람들, 정탐지의 지리적 정보 등의 제반 사항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규명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한다. 3) 지명은 물론 인문 지리적 정보, 언어와 풍속 등을 제공함으로써 해당 지역 을 연구하는 주요 자료로 활용할 수 있으며, 해당 지역과의 새로운 관계를 설정 하는 데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