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죽와 하일호의 시문학 세계의 양상과 그 특징에 대한 고찰을 연구의 목적으로 삼았다. 하일호의 가계는 대대로 남명의 학문적 영향을 입었고 하 일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유학적 도덕성을 견지하여 孝友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한편 학문공부에 근면하고 후학의 지도에서 『소학』의 가르침을 성 실히 전수하였다. 그의 작품에는 가족을 사랑하고 염려하는 가부장으로의 진중 한 모습이나 자손과 후배들에게 평생 체득한 삶의 지침을 전수하는 노년의 문사의 모습, 일상에서 마주하는 소박한 사물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나 해학 넘치는 모습이 형상화 되었다. 유가적 관념을 형상한 작품 외에, 소박한 일상의 사건과 사물을 묘사한 작품에 나타나는 구체성과 묘사성은 유학자이자 문인으로서의 하 일호의 작품이 갖는 특징이다. 이것은 자국적인 것의 가치를 인식하고 조선어를 활용한 시의 창작을 주장한 그의 독자적 시론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조는 비록 평범하지만 내용은 전실한 시작품의 창작을 강조한 것이나 예에 부합되고 실지로 적용될 수 있는 학문 자세를 강조한 것 역시 그의 시문학 세계의 특징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만회의 80년 삶과 그것을 반영한 문학은 개인의 삶이자 격변기의 조선 지식인의 삶과 문학의 한 전형을 예시한다는 점에서 연구의 당위 성을 획득한다. 청년 급제자인 자신을 잠룡으로 표현하며 자부심을 나타낸 만회는 ‘國計民憂’ 즉, 나라를 위한 계책을 도모하고 백성의 근심을 걱정하여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큰 포부를 품고 출사에 나선다. 그러나 조선 말기의 지속적인 정쟁과 보수와 개혁의 격렬한 엇갈림은 수차례의 정 변을 야기하였다. 위태롭고 혼란한 시대에 그와 같은 지방 출신의 지지 기반이 없는 젊은 급제자는 포부를 펼칠 기회를 얻기 어려웠다. 이 때문 에 요로의 재상에게 수차례 편지를 보내며 자신의 능력을 소개하고 본격적인 출사를 위한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기대하던 답을 얻지 못하 였다. 그러자 그는 ‘遯世無悶’을 삶의 참된 비결로 설정한다. 세속을 등지고 은둔하며 지내더라도 괴로워하지 않겠다는 뜻의 이 말은, 환로 에서 외면 받고 승진에서 제외되는 자신을 위한 만회의 자기방어적인 태도의 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는 조선의 몰락과 일제 강점 하의 삼십 년 동안에 더욱 경화되어, 세상의 외면에 번민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을 두고 세상을 살면서도 살아있지 않은 ‘不敢生世人’ 또는 ‘세상 속의 하나의 幣物’로 정의한다. 만회의 작품들은 이러한 삶의 자세를 견지했던 문학적 기록이자 역 사의 격변기를 관통하는 한 유가 지식인의 삶을 형상한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증거라는 측면에서 의의를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