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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연구 KCI 등재 The Nammyonghak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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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제15권 (2003년 6월) 13

1.
2003.06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泰安朴氏는 晉州에 정착한 지 400년 정도 동안, 凌虛 朴敏 이후에 西溪 朴泰茂·漁隱 朴挺新·訥庵 朴旨瑞 등 두드러진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이 강우 지역이 仁祖反正과 戊申亂을 겪은 데다, 이와 관련하여 남명의 학문 자체에 대한 일부 서인 세력의 비판이 있어서, 남명학이 충실히 계승되기는 어려운 상황에 놓였던 것이 사실이다. 태안박씨도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외면할 수는 없었던 것이므로, 凌虛의 來庵 師事에 대한 왜곡성 언급이 문집에 실리게 되었던 것이며, 西溪가 密庵 李栽의 문인이 되어 퇴계학파의 학통을 깊이 접하게 되었던 것이며, 눌암은 더욱 그 범위를 넓혀 기호 지방 남인 계열의 대표적 학자인 順庵 安鼎福을 사사하면서 안동 지방의 川沙 金宗德과 立齋 鄭宗魯 등을 사사하여 '南州第一人' 이란 칭송을 듣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전반적으로는 서계 이후에 태안박씨는 학문적인 면에서 그 계통이 퇴계학파의 범주에 들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명학파의 범주에서 이 문중 인물을 논의한 것은, 이 강우 지역의 역사적 특수성과 관련이 있다. 강우 지역의 인물들은 그 조상이 대체로 남명의 문인이거나 再傳門人으로서, 이미 혈연적으로 남명의 私淑人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學問이나 黨色의 측면에서 퇴계학파와 깊은 관련을 맺었다 하더라도 남명학파적 성향은 여전히 마음 밑바닥에 自在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 門中만의 현상이 아니므로 앞으로 꾸준히 연구하면 강우 지역 남명학파의 모습이 더욱 분명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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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南冥 曺植의 再傳門人인 凌虛 朴敏(1566-1630)의 학문과 사상을 究明한 것이다. 현재 학계에는 남명과 남명학에 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남명 직전문도인 정구와 김우옹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남명학 연구가 능허를 비롯한 재전문인으로 확대되지 못하면서 남명학은 마치 한 시대의 사상인양 誤認되고 축소된 경향이 있다. 때문에 필자는 남명에게 직접 執贄한 문인은 아니지만 누구보다도 충실히 남명과 남명학의 정신과 사상을 잘 잇고 있는 능허를 통해 남명 死後, 정인홍의 정치적 실각으로 瓦解의 위기에 처했던 남명학의 실체적 존재를 확인하고자 한다. 아울러 16세기의 남명학을 17세기로 이어주는 가교자로서 능허의 학문과 사상이 무엇인가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본고에서 살피려고 하는 능허 학문과 사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세 가지다. ① 그의 학문과 사상은 무엇인가? ② 그의 학문과 사상은 남명 혹은 남명학파의 학문 사상과 어떻게 맥을 잇고 있는가? ③ 그의 학문과 사상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본 연구의 세 가지 목표는 그가 남긴 시를 통해 고찰 될 것이다. 그 방법은 그의 시가 사물을 어떻게 형상화 했느냐의 형식미학보다는 무엇을 표출하고 형상화했느냐는 점에 초점을 두었다 연구 결과 능허의 학문성향과 사상은 철저한 유가적 바탕 하에 이루어졌다. 小學을 기본으로 하는 下學으로 시작하여 明明德과 親民, 止於至善에 이르는 大學의 上達로 이어졌다. 그는 남명이 추구했던 存養省察의 의미로서 '明'과 '敬'을 지니기 위해 四書三經에 근본한 爲己의 학문을 하였고, 부조리한 현실과 부도덕한 행동에 대해 단호히 끊어버리는 '斷'으로서의 '義'를 실천했다. 이러한 능허의 학문과 사상은 남명 혹은 남명학파의 학문태도와 사상을 그대로 이은 것이다. 다만 남명이 유가적 세계관 속에 도가적 사상을 자유로이 수용했던 것과는 달리 능허는 철저하게 유가만을 고집했다. 이는 스승 정구의 영향도 있었으리라 본다. 남명의 직전 문도들 중에서도 망우당 곽재우 같은 이는 말년에 도가적 세계에 더욱 경도된 경향을 보이지만, 한강은 도가적 세계를 부정하고 오직 유가적 현실만을 인정했던 사람이다. 이런 한강의 사상이 능허에게도 영향을 주었으리라 본다. 냉혹하리 만큼 철저하게 자신을 닦고 성찰하며 그것을 고스란히 실천한 능허의 학문과 사상은 학문이 하나의 독립된 지식과 직업으로 실천에서 떨어져 나간 오늘날 현실에 학문과 학자의 역할과 사명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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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e-gye(西溪) Pak Tae-Moo(朴泰茂) was one of the famours scholars who lived in the right side of Kyungsang province in the 18th century. After the restoration in 1623 the scoholastic trend in this area was desprited with party strifes. He declined all of the successful career, and concentrated his mind on expounding his scolarship based on the Newcofucianism. He devoted himself to studying and practicing sacred books to cultivate his mind. His scholarship intended to keep his principles to establish firm faith for the spritual culture. His principles for the spritual culture could be summrized as the diagram and inscription of Jagyungbyung[自警屛]. The diagram and inscription of Jagyungbyung could be seen as the most representative summary of his scholarship, which he focused in two fundamental concepts Sung[誠] and Kyung[敬]. Soe-gye's interest in endeavoring at self-cultivation was succeeded to the scholarstic mentle originated in Namymung[南冥] and his forefather Pak-Min(朴敏) who was one of the followers of Nammyung and one of the friends of Misu[眉叟]. In partcular he attached much importance to Simhakdo[心學圖]. In this point Soe-gye's scholarship for the spritual culture shows a marked trend toward practical ethics[心學] originated in Namymung school. His discussion for self-cultivation in the rouhly based on the dilatation and interpretation of the typical articals of Sungrijulyo[性理節要], but by the way he successfuly explained the purpose and the prescription for self-cultivation.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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訥庵 朴旨瑞(1754-1819)는, 朝鮮 英·正祖 때 慶尙右道에서 활약했던 학자로 일생 동안 벼슬에 나가지 않고 學問硏究와 弟子養成에 전념했다. 특히 그는 南冥學을 家學으로 하는 泰安朴氏 家門에서 태어나 6대조 凌虛 朴敏과 曾祖父 朴泰茂의 정신을 이어 江右地域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하는 학자로서 여러 가지 큰 儒林事業을 해내었던 것이다. 訥庵은, 近畿南人의 대표적인 학자인 順菴 安鼎福과 退溪學派의 대표적인 학자인 東巖 柳長源을 스승으로 삼아 근기남인과 江左地域의 학자들과 폭넓은 學問的 교류를 하면서, 慶尙右道의 學問的 位相을 높이려고 노력한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南冥의 文廟從祀를 청원하는 疏章을 저술한 남명학파의 핵심적인 인물이다. 남명학파에 속하는 학자로서는 文集의 분량도 상당히 많은 편이고, 그의 문집은 南冥學派 및 江右地域의 學問的 動向을 알 수 있는 文獻的 價値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당시 學者들로부터 '江右儒宗', 또는 '南州第一人'이라는 稱道를 받았다. 本考에서는, 訥庵 朴旨瑞의 生涯와 그의 폭넓은 師友關係, 당시 江右儒林社會에서의 역할 및 江右學派 연구의 寶庫라 할 수 있는 그의 문집인 『訥庵集』의 내용 및 가치에 대해서 고찰하였다. 訥庵은 江左地域의 많은 學者들과 近畿南人學派의 학자들과 폭넓게 交遊하여 학문적 視覺을 넓혀 江右地域 학자로서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문집의 분량도 江右地域의 앞 시대 학자들보다 증가할 수 있었다. 江右地域의 先輩學者들의 著述이 거의 없었고, 學統이 이어지지 않았기에, 訥庵이 계승할 수가 없어 정신적으로는 南冥을 이었지만 그 學問形成은 朱子와 退溪의 學問에서 得力하고 있다. 그가 수행한 뚜렷한 業績으로는 南冥의 陞 運動을 비롯한 여러 先賢들의 宣揚事業과 原稿 상태로 남아 있던 이 지역 이전 學者들의 文集의 교정·간행과 매몰된 先賢들의 事蹟을 정리하여 碑碣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의 이러한 왕성한 學問的 交遊와 活動은, 仁祖反正 이후 침체되었던 江右學派가 새롭게 일어날 기초를 마련하여, 19세기부터 江右地域에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게 만든 原動力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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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세기 朝鮮은 정치나 학술의 측면만이 아니라 敎育制度 상으로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는 시기이다. 15세기말 전후까지 朝鮮은 官學敎育을 강화하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成宗 대까지 각 府, 牧, 郡, 縣 마다 鄕校가 건립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6세기 중반부터 관학의 보완이자 대안인 書院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이전의 교육제도에 일정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본 고는 교육시스템을 중심으로 한 巨視的인 觀點에서 이 시기의 변화 양상과 그 의미를 살펴보려는 시도이다. 이를 위해 조선 전기의 교육체제를 구성하는 한 중요한 요소로서 敎育中心圈域에 주목하였다. 교육중심권역이란 都會라는 제도를 통하여 연결되어 있는 각 지역의 중심향교와 인근 향교의 권역을 말한다. 忠南地域의 변화 양상을 분석한 결과, 이 지역은 15세기부터 16세기 전반까지 公州牧과 洪州牧 등 2개의 중심향교를 중심으로 교육권역이 형성되었으나, 16세기 후반부터 공주목 동부(孔巖 및 儒城地域)와 동남부(連山地域)에 새로운 교육중심지가 부상하기 시작하여, 17세기에는 기존의 교육중심권역이 거의 무력화되고, 동부 및 남동부지역으로 교육중심권역이 재편되어 갔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단지 敎育圈域의 變化만이 아니라, 관학교육체제가 지향하는 敎育機會 擴大의 公的 原理가 後退하는 결과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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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이황과 조식의 문도들에 의하여 그 학문이 계승 발전되면서 한국적 성리 철학의 틀이 잡혀가고 있던 17세기로부터 성리학이 그 역사적 기능을 종료하던 19세기까지에 걸쳐 강우지역에 나타난 유학의 흐름과 쟁점에 대한 간략한 정리이다. 17세기 초반 강우학파는 鄭仁弘을 중심으로 정치적·학문적 극성기를 누렸으나, 정인홍이 조선성리학의 정통으로 간주된 이황을 비판하고 패륜적 정치사건에 휘말린 일을 계기로 하여 급격히 몰락하게 되었다. 그 후 거의 한 세기에 걸친 시기 동안 강우 유학은 그 餘震의 치유에 매달려야 했으며, 심각한 학문적 침체기를 맞게 된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동안 강우지역은 학계의 소외지역으로 남아 있었으며, 몇몇의 학자들에 의하여 간신히 명맥이 유지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퇴계학과 畿湖의 주기학이 강우를 점령하고, 당파적으로는 남인과 서인이 됨으로써 강우가 본래 가지고 있던 학문적·정치적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긴 어두움이 지나고 19세기에 이르자 강우 유학은 다시 크게 떨치고 일어나는데, 그 주력은 退溪學과 호남의 蘆沙學의 영향권 하에 있었다. 그 특징은 理를 중시하는 학풍이 다른 어떤 곳보다 강했다는 것이며, 이는 성리학적 신념을 고수하는 유학자들이 서세동점의 시기에 대응하는 가장 완고하면서도 근본주의적인 방법이었다. 이를 통해 절의론의 신념을 강화한 강우의 유학자들은 비록 시대의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한계는 있지만, 보수적인 유학자들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으로 국권상실의 시대에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해 갈 수 있었다. 그것은 유학의 기능이 종언을 고하는 시대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불꽃과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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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서원제도는 周世朋의 白雲洞書院 설립으로 출현하였지만, 이후 서원을 조선사회에 보급․정착시키고 그 성격을 규정하여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것을 退溪 李滉이다. 그러나 南冥 曺植은 여러 가지 여건에서 강우지역의 서원설립에 있어서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자료에는 서원 건립이나 보급․ 정착 등에 관여한 사실이 나타나 있지 않다. 南冥 在世時 강우지역에 최초로 건립된 서원은 咸陽의 灆溪書院이다. 남계서원은 남명의 문인인 介庵 姜翼 등의 함양 인근의 사림과 지방관의 협조에 의하여 설립된다. 그런데, 남명 재세시 남명과 남명학파의 핵심적인 인물들은 남계서원의 건립과 운영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고 있다. 남명 사후 강우지역에 최초로 건립된 서원은 德川書院이다. 덕천서원은 남명의 문인인 守愚堂 崔永慶 등의 진주 인근의 사림과 지방관의 협조에 의해 건립된다. 덕천서원 창건 당시는 전 강우지역의 남명학파에게는 서원건립은 이슈가 되지 못한 것 같다. 남계서원과 덕천서원은 丁酉再亂으로 소실되고 그후 중건된다. 중건도 창건과 마찬가지로 인근의 사림과 지방관의 협조로 이루어진다. 강우지역에 있어서 남계서원과 덕천서원은 광해군 대에서 인조반정 이전까지는 북인계열에 속하는 남명학파의 총본산으로서 그들의 향촌사회 내 거점으로 정치․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후 북인세력이 제거되면서 이를 뒷받침하고 있던 서원도 조락하고 만다. 숙종․영조 연간을 거치면서 남계서원은 친노론계 서원으로, 덕천서원은 친남인계 서원으로 변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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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和歌의 율격성을 밝힘이 목적이나 이 연구는 時調와의 비교 연구의 일환이다. 和歌를 이루는 5음구와 7음구는 둘 다 2개의 拍節을 지니는데 율격 형성의 필수 자질인 休音이 삽입되어 총 8음절분이 된다. 박절을 이루는 음절수는 최소 1음절에서 최고 4음절로 한도내적 유동성을 보이지만 두 개의 박절이 모여 구를 형성할 때는 음절수가 고정되게 되므로 일본 시 和歌는 고정 음수율의 시라 일컫게 된다. 그러나 和歌에서는 시연의 구조가 매우 중요하다. 萬葉 시대까지는 장중하고 중후한 느낌의 무거운 5·7조가 성행했으나 『古今集』 이후에는 경쾌하고 유려한 감각의 7·5조로 바뀌게 된다. 한편 7·7조는 시연 가운데 가장 율격성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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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 사상을 연구하는 자료는 크게 두가지 종류가 있다. ⒫ 자료 - 『학기도(學記圖)』와 『학기유편(學記 類編)』, ⒬ 자료 - 시와 명(銘) 부(賦) 론(論), 편지, 상소문 등 문집에 실린 것들. 조식을 성리학자로 규정하는 사람들은 ⒫ 자료에 의존한다. 반면 ⒬ 자료에 의하면 조식은 양명학자이다. ⒫ 자료는 조식의 직접 저술이 아니며, 성리학 정초자들의 글을 모은 것이다. 반면 ⒬ 자료는 조식이 깨달아 안 것을 직접 쓴 것이다. ⒫ 자료에 의존하면, 조식의 사상을 성리학 정초자들의 사상으로 환원시켜 버린다. 그 결과 조식은 이론이 없이 실천만 파고든 묵수 주자학자가 되어 버린다. 반면 ⒬ 자료를 보면 조식은 거대한 자아를 추구한다. 이는 양명학의 '치량지' 이론과 비슷하다. 조식은 실천의 극한에서 창조적인 한 걸음을 내딛어서, 왕수인과 별개로 스스로 양명학적인 통찰에 도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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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학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논어가 백제로부터 전래되었을 때를 기점으로 한다. 중세에는 고잔(五山) 승려에 의해 접해졌고, 근세 에도시대에 들어와서는 본격적인 수용을 거듭하게 되는데 이러한 일본의 유학에 대해 근세 유학연구의 선봉적인 역할을 한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씨는 주자학이 근세 일본의 幕藩制 유지의 사상적 이데올로기가 되었고, 주자학의 자연법적인 사상이 근세 봉건사회에 부합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마루야마씨의 주자학 이데올로기론은 여러 관점으로부터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 유력한 비판자의 한 사람인 비토 마사히데(尾藤正英)씨는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의 주자학과 근세일본사회와의 부적합성을 들어 유교가 일본사회에 지식으로 수용된 것 일뿐 생활차원에서의 수용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 와타나베 히로시(渡邊浩)씨는 에도시대(1603-1867)전기의 일본사회에 있어서 주자학을 주요한 내용으로 하는 주자학은 당시 일본 국내의 有利한 사정을 바탕으로 점차 확대되었지만 동시에 여러 측면에서 違和感을 주는 외래사상이었다고 하고 있다. 이상, 전후 한때 통설로 되어왔던 마루야마씨의 주자학의 일본 근세사회의 부합설이 현재에 이르러서는 주자학 부적응설로 일반화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자학의 부적응설에도 불구하고 일본 유학은 고대에서부터 중세를 거쳐 근세에 본격적인 수용을 거듭하면서 현대에까지 그 맥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근세에는 다양한 층의 학자들에 의해 수용되어 일본적 사상으로 정착하게 되는데 이하 본 논문에서 필자는 주자학의 일본수용설의 관점에서 그 영향관계를 주자학에서 古學陽明學國學水戶學 등과 관련지어 고찰하고자 한다. 또 한국과는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검토하고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