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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연구 KCI 등재 The Nammyonghak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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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제60권 (2018년 12월) 15

기획논문 1

1.
2018.1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에서는 『寒溪遺稿』를 바탕으로 하면서, 한편 여러 문헌에 남아 있는 한계 관련 자료를 통하여 한계의 삶과 문학에 대해 살펴보았다. 한계는 南冥學을 가학으로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삼종제인 河大觀과 더불어 晉陽의 巨擘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그의 학문에 대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金聖鐸과 내왕한 편지, 그리고 친한 벗 朴挺新의 아들 朴受紋에게 준 시와 서문 등을 통하여 그의 학문을 窺見할 수 있었다. 그의 시는 거의 절반이 내외의 인물들의 죽음에 대해 쓴 것인데, 이들 만시는 한계의 한시 전체의 절반을 넘어서는 것으로 한계의 한시세계를 대표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의 만시는 다만 고인을 애도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하여 한계의 교유 범위와 깊이 등을 이해하는 데로 확장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문장으로도 문중에서 인정을 받아 族譜의 序文을 쓰기도 하였으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遊頭流錄」이다, 일찍이 김성탁에게도 알려져 김성탁이 빌려달라고 할 정도였는데, 그 내용은 대략 세가지 방면으로 나누어서 이야기할 수 있다. 첫째는 하대명이 한시를 酬唱한 흔적을 살필 수 있다는 것이다. 남아 전하는 것이 많지는 않으나 한계가 한시를 지었던 자취는 「유두류록」 곳곳에서 발견된다. 한계는 지리산을 가는동안 다섯 여섯 군데에서 13수 정도의 시를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유두류록」이 선현과 선조에 대한 마음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한계는 지리산에 들어가 고려 때 지리산에 숨어들어가 은거하였던 韓維漢의 자취가 있는 鈒巖과 禮記巖을 둘러보았을 뿐만 아니라, 水精社에 기문을 쓴 것이 지금도 『동문선』에 전하는 權適의 기문과 수정사에 남아 있는 자신의 할아버지의 글씨 등을 보며, 옛날의 선현들과 자신의 조상에 대한 회념을 하고 있음을 보았다. 셋째는 두류산 유람을 통하여 지리산 등산의 철학적 묘미를 말해준다는 것이다. 일찍이 南冥 曺植도 산을 오를 때와 내릴 때의 차이를 통하여 善을 하는 일을 이야기하였는데, 한계는 남명이 한 말이라고 인용하였다. 이 말은 본래 유래가 매우 오랜 것으로 『國語』에서 나온 말이었다. 뿐만 아니라, 비슷한 말을 鄭汝昌, 李滉 등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등산을 하면서 얻은 교훈이 될 만한 내용을 「유두류록」에서 보여주고 있다.
2.
2018.1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台窩 河必淸(1701~1758)의 삶과 시세계를 조명한 것이다. 18세기 강우지역은 무신란 이후 정치적 탄압을 받아 출사할 수 없는 정치·사회적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하필청은 家學을 이어받아 문장과 行義로 출사하여 정치적 소신을 현실정치에 실현하고자 하였다. 지역적 한계와 당쟁의 폐단으로 정치적 꿈이 좌절되자, 그가 택한 길은 권력자에게 아부하기보다 낙향하여 후진을 양성하는 일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벗들과 학문을 토론하고 후진을 가르쳐, 실제 문하에는 많은 인물이 배출되어 남명정신을 계승해 나갔다. 그런 가운데 지역 인사들은 물론, 霽山 金聖鐸과 忠窩 許錘처럼 이곳으로 유배 온 인사들과 긴밀한 교유를 통해 다양한 학문을 접하는 기회를 갖기도 하였다. 한편, 그가 추구한 107제 146수에 이르는 시문학은 출사하여 태평성세를 이루어보려는 정치적 꿈을 노래하였고, 그 꿈이 좌절되자 자신의 지조를 지키면서 속세의 부귀영화에 초연한 삶을 살고자 하였으며, 이처럼 出과 處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평소 자기수양에 따른 실천학문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드러내었다. 요컨대, 자신의 포부와 이상을 펼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태와 하필청이 추구한 삶의 지향은 18세기 강우지역의 지성사적 측면에서 볼 때 보편성과 특수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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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默齋 金墩의 文集인 『默齋集』을 중심으로, 그의 詩文을 검토하여 분석한 것이다. 김돈은 아직은 학계나 일반에 잘 알려진 인물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김돈과 그의 문학을 보고하는 첫 보고서라는 의미와 試論이라는 의미를 함께 갖는다. 寒士, 즉 ‘가난하거나 권력이 없는 선비’라는 사전적 정의는 김돈의 처한 입지와 상황을 정확히 반영한다. 그는 가난했고,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문학과 학문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김돈에 관한 자료가 2권 1책으로 묶인『默齋集』이 전부인 상황에서 그의 학문세계를 온전히 드러내기는 여건상 매우 어렵겠지만, 남아있는 시와 문을 통해 그의 문학세계를 짚어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이것은 묻혀있고 잊혀져있던 남명학파의 실체를 부분적으로나마 복원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 또한 이것은 어려운 상황과 처지에서도 지조를 굽히지 않고 剛毅한 정신세계를 이루었던 한 지성을 알리는 작업이며, 그가 남긴 예술적이며 심미적인 문학작품의 가치를 학계에 알리는 작업이다. 김돈이 남긴 시는 169수이다. 남명학파의 문집이 대체로 분량이 적고, 시편이 많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역사에 대한 慷慨를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 몇 편이 있다. 이 작품들은 대체로 충신과 열사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감정을 피력한 것인데, 특히 망국의 역사적 상황 속에 忠節을 다하였던 인물들의 원통함에 공감하고 함께 의분을 토로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을 통해 김돈은, 평화로운 시기에 비록 知遇를 받지 못했더라도 危難의 시기가 오면 결연히 떨쳐 일어나리라는 결의를 평상시에도 늘 갖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또한 김돈은 헛되이 세월을 보내지 않고 학문을 닦고 덕성을 기르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결연한 의지로 실천해나갔다. 그는 특별히 알아주는 이 없는 ‘寒士’이지만, 부귀영화나 입신양명의 현달을 꿈꾸지 않았다. 그저 매일 학문을 닦고 인격도야에 매진하다가, 만약 위난의 시절이 닥쳐온다면 결연히 떨쳐 일어났던 남명학파의 선배들 발자취를 따르고자 했다. 또 한편으로, 셀 수도 없이 많은 이들이 安貧樂道를 말했지만, 그 진정성은 의심스럽다. 즉, 우선은 가난하지 않은데 가난하다고 한 경우가 많고, 진정으로 도를 즐긴 삶이 아닌데도 도를 운위한 것이 의심스러운 인물들도 많았다. 그런 경우에 비해 김돈은 진솔하다. 가난하기에 가난하다고 했고, 입신양명이나 현달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일생을 학문에 정진했기에 도를 즐긴다고 할만하다. 이는 寒士의 剛毅함이라 요약할 수 있다. 김돈은 剛毅한 지조를 가진 선비였지만, 가족과 친족에게는 더없이 다감한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 평범함이 시로 표현되고 문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진솔함과 다정함이 묻어나 공감을 자아낸다. 그의 평범함이 오히려 더 비범함으로 다가오는 이유이다. 교유관계가 원만한 사람들은 타고난 성품의 덕도 있지만, 그가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에 대한 노력이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김돈은 그런 심성과 노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공부하는 선비라면 文房四友에 대한 나름의 애착이 있기 마련이다. 공부에 꼭 필요한 文房具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金墩의 문학에는 文房四友가 아니라 五友가 자주 등장한다. 다섯 번째 벗이 기도 하고, 이 벗이 있어 五友가 완성되기도 한다는 중의적인 의미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김돈은 매우 다정다감한 감성을 지닌 文人이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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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인물이 남긴 문학작품과 그의 삶에 대한 기록을 읽을 때, 그것이 담아내지 않은 혹은 담아내지 못한 행간 사이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가 살아간 시대의 배경 속에 놓고 파악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인물이 선택한 사회적 참여나 은일적 처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시대의 상황이 과연 어떠했는지가 분명하게 설명되어야 하며, 그런 시대 속에서 그 인물이 선택한 처세는 정당한 것이었는가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박내오가 살아간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의 은일적 삶이 가지는 의미를 살펴보았으며, 그 연장선에서 지리산 유람에 나타난 그의 의식과 지향이 무엇이었는지를 짚어보고자 했다. 지리산 유람에 나타난 박내오의 의식과 지향을 살펴봄으로써 그의 내적 정체성이 남명학파에 가깝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이러한 박내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18세기 강우지역의 인물 가운데 남명학파로 거론되지 않은 인물들을 새롭게 발굴하고 연구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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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동와 조휘진(1729-1797)의 생애와 활동을 밝히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正祖가 남명 조식에게 사제(賜祭)하였던 시기를 남명학 부흥의 시발점으로 일컫는데, 그는 이때 남명학파의 중심인 덕천서원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각종 진주 관련 지리지에 그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고, 출중한 인물로 많은 인물과 교유하고 있었음을 밝히고 있으나 자세한 연구가 이루어진 바가 아직 없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함안에 세거하였다. 조선 건국 후 출사를 거부하고 함안에 은거하였던 趙悅, 단종 때의 생육신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趙旅, 임진왜란 때 순사한 趙宗道가 그의 선조이다. 그는 평소 효를 실천함과 동시에 선조의 忠을 드러낸 것 역시 효의 실천으로 보았다. 선조 열 명의 업적을 기록한 『趙氏十忠實錄』은 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남명학의 전수자로서 덕천서원을 중심으로 유림을 규합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의 문집인 『東窩遺集』에 보이는 창화시 및 만사를 통해 그의 교유범위가 퇴계학파와 중앙의 남인까지 포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기개와 절조를 숭상하고 處士的인 학풍을 견지하던 남명학파의 유풍을 그대로 견지하였던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기획논문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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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滄浪亭 李尙靖(1725∼1788)삶과 그의 문학에 나타난 정신을 고찰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조선 후기의 문학이 한창 무르익었던 시대였다. 학문적으로는 義理學과 事理學이 병행하던 때였다. 그가 어렸을 때는 그다지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하지는 않았다. 그의 학문 방향은 爲己之學에 있었다. 그가 많은 선비들과 교유하였다. 특히 그가 嶺南 左道와 右道 학자들의 소통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예로 그가 도산서원을 참배하고 그곳 선비들과 교유하였다. 그의 문학에 나타난 정신은 크게 4가지이다. 첫째 큰 국량을 바탕한 追遠精神이다. 그가 선비로서 마음공부를 열심히 하였지만 그의 식견이 편협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가문의 전통을 계승하여 집안을 부흥시키려고 하였다. 둘째 經術을 바탕 한 道學精神이다. 그의 학문은 육경에 연원을 두고 많은 책을 읽었다. 그는 知行合一한 道學者였다. 셋째 마음을 바탕 한 義理精神이다. 그가 爲己之學을 바탕으로 義理學 에 전념하였다. 그는 모든 일에 있어 正心이 바탕이 된다고 하였다. 넷째 그의 가슴속에는 尊王攘夷 정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가 道德的 理想主義의 실행을 바라고 있었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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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9세기 후반 경상우도 宜寧에 살았던 송파 강우영의 생애와 시세계를 고찰한 글이다. 송파는 忠孝로 이름나고 南冥學派를 연원으로 하는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정치적으로 남명학파가 몰락함으로써 張福樞와 金道和를 스승으로 섬겨 남인계열이 되었고, 張錫贇・ 張升澤・田珪鎭・安鼎漢 등과 당색을 초월하여 교유하였다. 만년인 60세 무렵에 鳳里精舍를 지어 考槃亭 등의 이름을 붙이고 隱居自靖하였다. 송파의 은거는 19세기 후반 대내외적으로 혼란을 겪다가 일제치하로 변한 시대에 대한 현실인식과 대응방식이었다.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송파는 시를 통해 드러내었다. 송파는 101題에 112수의 시를 남겼는데, 시세계는 크게 세 가지 양상을 띤다. 첫째, 松節 지향은 복잡다단한 世事와 일제치하라는 시대현실의 파고를 넘기 위한 修身의 표상을 소나무로 설정하고, 根固・晩翠・直幹 등의 소나무 본질을 자신이 지향하는 덕목으로 표현한 것이다. 둘째, 隱居求道의 志趣는 격동하는 시대현실에 대해 鳳里精舍를 지어 隱居自靖으로 대응하면서, 持敬工夫를 통한 心수양 등의 道學추구를 표출한 것이다. 셋째, 報本追遠의 정성은 충효가문의 후손으로서 선조에 대한 추모를 다짐하며 정려 도모, 비석 설립, 묘지명 찬술, 제각 수리 등의 사업을 실천하여 선조의 미덕을 현창한 것이다. 이러한 송파의 모습은 19세기 후반 의령지역 士人들의 현실인식과 대응방식의 일면을 견지한 것이라 하겠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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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崗 安益濟는 한말시기 경상우도 의령지역의 대표적 士人이다. 남명학의 磁場이 남아있는 강우지역에 세거하였으나 그에게서 남명학파의 성향은 드러나지 않았고, 耽津安氏家의 문중적 성향으로 보면 寒洲 李震相(1818~1886)의 계열임에도 이와 관련한 師承이나 학설이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타고난 문학적 자질을 지닌 뛰어난 문학가였다. 안익제는 19-20세기 어려운 시대에 재야사인으로서의 삶을 살아 현달한 치적을 남기진 않았지만,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활용해 다양한 장르에서 양적으로도 적지 않은 문학작품을 창작하였다. 소재 면에서도 일상에서 접하는 모든 것들을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작품으로 승화시켜 표현하였다. 주변의 돌 하나 꽃 한 송이도 모두 문학적 소재로 활용하였고, 특히 치열한 士意識을 일상의 소재에 투영함으로써 주변의 소소한 것들이 그의 작품 속에서 살아 숨 쉬도록 만들었다. 여기에 그의 독특한 학문태도와 의식 성향이 더해져, 그의 작품은 차별적 특징을 드러내었다. 날짜 중심이 아닌 記事 서술 방식을 통해 지리산권역에 대한 세세한 기록을 남겼고, 지역문화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광범위하고도 섬세한 공부가 있었으며, 이에서 파생된 오류 정정의 태도 등은 이전 시기 강우학자에게선 보기 드문 현상이었다. 더욱이 自問自答의 학문태도는 매우 참신하면서도 유효한 방식이었다. 貧寒한 가정형편으로 배움의 기회마저 잃은 士人이었지만, 이처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학문적 성취를 구현하고 이를 문학작품으로 표출하였다. 그러나 본고에서 미처 수렴하지 못한 아쉬운 부분도 있다. 예컨대 그의 일생을 지배했던 易學과의 관계, 특히 洋學과 七佛寺 影池에서 보인 객관적 사고의 근원이 어디인가에 대한 규명 등이 부족하였다. 뚜렷한 師承 관계도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家學的 성향이 짙을 것이라 짐작되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이는 차후의 과제로 남겨둔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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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태영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쳐 영남에서 살았던 유학자이다. 나라는 망하고 유학은 몰락하던 시절, 도도하게 밀려오는 신학문의 도전에 맞서 옛 학문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고 보수하고자 노력했다. 곽종석을 통해 전수된 위정척사의 학문과 심설은 시대의 흐름을 조망하면서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도록 한 힘이었다. 또한 그는 스승을 통해 전통 학문과 신학문의 조화에 대한 관념을 얻었다. 이에 본고는 그가 시대를 인식하고 대응하는 방법을 살펴보고, 면우의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를 먼저 검토하였다. 다음으로 격동의 시대를 산 그에게 자기 정립이 중요하였기에 성리학에 토대를 둔 자아 인식의 내용을 살펴보았고, 면우학단에서 배운 심법이 이것에 어떤 기능을 하는지를 설명하였다. 마지막으로 변절하지 않는 데에는 성리학과 심법이 큰 기여를 하였지만, 그들의 세계 독해에는 한계가 있어 도래하는 새 시대에 대한 대응에는 실패하였음을 논하였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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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慶南 宜寧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간재학파 문인인 新庵 田溶珪(1884~1962)의 학문 활동을 艮齋學 계승의 면모를 중심으로 고찰한 것이다. 전용규의 학문은 기본적으로 의령의 儒風과 潭陽田氏 가학을 배경으로 그 기초가 형성되고, 20대 이후 간재 문하에 입문한 이후에는 간재의 사상을 바탕으로 전개된 만큼, 그의 학문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의령의 儒風 및 담양전씨 가학, 그리고 간재학의 중심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 유의하여 본고에서는 전용규의 학문 활동을 검토하기에 앞서 그 배경으로서 의령 지역 및 담양전씨 문중의 학문적 특징을 고찰하였다. 그리고 그의 학문 활동을 간재학 계승과 전개를 중심에 두고 학파를 넘나든 교유 활동, 유교 문화의 계승과 보존에 주목한 강학 활동 등에 초점을 맞추어 검토하였다. 이러한 검토를 통해 전용규의 학문 활동은 지역과 문중의 개방적 학풍 및 의리 정신을 바탕으로 암울한 시대 상황 하에서 적극적인 무장 투쟁을 대신하여 유학의 맥을 보존하기 위해 은거 및 강학을 선택하여 전개됨으로써 유교 문화의 보존과 계승에 주안점이 두어졌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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隱 權平鉉은 19세기 끄트머리인 1897년에 태어나 20세기 중반인 1969년까지 살면서 평생 한문지식인으로 자처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일제 식민지기를 거치고 다시 한국전쟁을 겪는 그야말로 평안한 날이 없는 날들이었다. 또한 그가 학문에 입문할 시기는 한문폐지론이 일었고, 儒學은 타파의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한문-유학을 자신의 학문으로 선택했고, 栗谷 李珥를 스승으로 받들었다. 특히 율곡의 四七說에 대한 독실한 믿음은 그와 다른 그 어떤 논의도 수용하지 않았다. 화은의 삶과 학문은 주변이나 시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여긴 바를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간 그의 강인한 정신의 징표이다. 그는 성현의 도를 지키는 것이 시대 변화를 追隨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비록 과거의 문자와 학문으로 전락한 한문과 유학이지만 거기에 새로운 미래를 위한 답이 있다고 그는 믿었던 것이다. 예컨대 陰이 가득하면 반드시 陽이 다시 차오르는 이치와 같이 조국의 광복도 그런 이치 속에 이루어질 것이라 그는 믿었다. 그러나 그의 삶과 학문적 태도를 時宜라는 점에서 보면 아쉬움이 없지 않다. 하지만 철저하게 성현의 말씀을 따르고 체현하려 노력했던 20세기 마지막 유학자의 모습은 개인의 이익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이 행동을 바꾸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일반논문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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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시대 생산된 中庸圖說을 분석해 해석 양상과 특징을 논구한 것이다. 『중용』해석은 단락을 나누어 요지를 파악하는 구조분석과 핵심주제어에 대한 심층해석으로 양분할 수 있다. 본고는 이 가운데 전자에 중점을 두어 도설을 통한 『중용』해석의 양상을 살핀 것이다. 조선시대 작성된 147개의 중용도를 분석한 결과 전체의 요지를 뽑아 그린 全圖는 30여 개이고, 나머지는 장별로 요지를 뽑아 그린 章圖이거나 人心道心 등 핵심주제어를 도표화한 것들이다. 이 가운데 全圖는 구조분석과 논리접속에 관한 해석을 엿볼 수 있어 『중용』해석사에서 매우 주목할 만하다. 조선시대 최초로 中庸全圖를 그린 인물은 영남학파의 張顯光인데, 그의 「中庸之圖」는 주자의 4대지설이나 6대절설을 따르지 않고 정자의 설에 자신의 견해 더해 5대절설을 주장한 것이다. 그 뒤 17세기 후반 기호학파 朴世采가 「中庸總圖」를 그렸는데, 장하주의 설에 의거해 4大支로 구분한 최초의 도표이다. 17세기 후반 韓汝愈는 남송 말 饒魯의 6대절설에 의거하여 독자적인 6대절설을 제시하였으며, 주자의 『중용장구』 33장 체제를 수용하되 제5대절의 편차를 일부 개편해 재구성하였다. 한편 18세기 전반 기호학파 李泰壽는 대절별로 6장의 도표를 그려 전체의 구조와 요지를 도표화하였으며, 金載海는 『중용장구』 33장을 1綱·2目·4結로 파악하여 독특한 중용도를 그렸으며, 李顯益은 제1장을 외곽에 그리고 그 안에 나머지 장을 그렸는데 4대지설에 의거해 단락을 나누었다. 이처럼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에 기호학파에서는 다양한 중용도가 그려졌는데, 송시열의 학통을 이은 韓元震의 중용도가 나온 뒤로 기호학파의 『중용』해석은 한원진의 4대절설이 널리 수용되면서 한동안 다른 성향의 도표가 나타나지 않고 大節圖나 章圖만 나타난다. 반면 18세기 전반 근기남인계의 李瀷은 『중용』도 『대학』처럼 經文과 傳文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해 제2장부터 제11장까지 공자의 말씀을 기록해 놓은 부분을 孔子中庸으로 보고, 그 나머지 장은 子思傳으로 보아 매우 독특한 해석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문인 愼後聃은 스승의 설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중용도를 그렸다. 18세기 조선학계는 중앙학계와 지방학계로 확연히 구분된다. 중앙학계의 소수학자들은 청대 고증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학풍이 변하였는데, 지방학계는 여전히 주자학을 근거로 하여 시대변화에 대응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방학계에서도 영남학계와 기호학계가 다른 성향을 보이는데,『중용』해석의 경우 18세기 후반 이후 작성된 독창적인 중용도를 그린 학자 20명 가운데 15명이 영남출신으로 영남학계에서는 주자학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다양한 모색을 하며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다. 18세기 후반 이후 영남지방에서 작성된 중용도를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보면, 정자의 3분설,『중용장구』장하주의 4대지설, 「독중용법」의 6대절설, 4대지설과 6대절설을 통합하는 설, 3분설 및 4대지설과 6대절설을 모두 수용하는 설, 독자적인 5대절설 등이 있다. 이 가운데서 특히 이진상과 그의 문인 허유·곽종석 등에게서 나타나는 4대지설과 6대절설을 하나로 합해 유기적으로 파악하려 한 노력은 『중용』해석사에 주목할 만하다. 이 시기 기호학파에서도 한원진의 설과 다른 설이 등장하지만 소수에 불과하다. 조선시대 중용도 가운데 章別로 요지를 파악해 그린 章圖는 제1장도가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제20장과 제33장을 그린 도표가 많이 보인다. 한편 중용도 가운데 『중용』을 이해하는 핵심주제어인 天命, 中庸, 中和, 九經, 天道人道 등을 그린 도표도 다수 발견되며, 「중용장구서」를 어떻게 구조적으로 이해할 것인가에 관한 序分節圖와 「중용장구서」에서 언급한 人心道心의 문제를 해명한 人心道心圖도 많이 발견된다. 이처럼 조선시대 학자들은 『중용』의 본지를 터득하기 위해 수많은 도표를 그려 논리구조와 논리접속을 파악하는 한편, 핵심주제어에 대한 부단한 논구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러한 다양한 특징을 가진 해석은 동아시아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조선에서만 나타나는 해석의 특징이라는 점에 그 의의가 자못 크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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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處는 儒學에서 선비들에게 요구한 중요한 덕목이며, 많은 유학자들이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표적으로 남명 조식은 출처를 君子의 큰 절조로 보았으며, 평생 ‘處士’로 실천했다. 그런데 문제는 조정의 계속된 출사요구를 거부한 남명을 퇴계와 같은 당대의 유학자들은 부정적으로 보아 그 의미를 축소하거나, 학문적 體認의 결과가 아닌 개인적 기질의 결과로 이해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에도 ‘기절’이나 ‘기상’, ‘절개’등 개인적 차원의 의미만을 강조하여, ‘정치를 외면하지 않았다’며 정치적 의미에 대해선 소극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이 연구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남명의 처사적 삶과 사상을 보다 적극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남명의 ‘처’ 즉 ‘물러남’이 가지는 국가권력과의 ‘거리감’에 주목한다. 유학은 현실정치를 긍정하여 ‘나아가감(出)’을 강조했지만, ‘處-물러남’ 또한 강조했다. 이러한 ‘처’는 유학자들이 현실의 정치권력과 적절한 거리를 둠으로써 견제와 긴장을 만들어낸 요소이기도 했다. 남명은 이러한 ‘물러남의 정치학’을 잘 이해했으며, 그의 출처사상과 처사로서의 삶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래서 남명의 處는 개인적 기절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국가권력에 대한 ‘경계’와 ‘비판’ ‘저항’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나아가 ‘폭력적 국가권력’을 ‘공공의 국가권력’으로 변화 시키려는 문제제기도 담고 있었다.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 모른다’는 당대 지식인들에 대한 남명의 비판과 그가 실천한 ‘물러남의 정치학’은 현대의 정치현실에 있어서도 부당한 권력을 비판하고 거부하는 정신으로 계승될 수 있으며, 나아가 권력의 성격을 보다 공적인 것으로 만들어나가 현대의 민주주의 발전에도 도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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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사회 전반에 걸친 연구에서 유학에 관한 이해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유학에 대한 다양한 학문적 접근과 통합적 방법론의 모색은 동아시아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연구주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동아시아에 대한 전 세계적 관심은 아주 뜨겁다. 한반도의 정세나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심해지는 현황에서 동아시아를 정확히 보는 혜안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유학의 다변적 해석에 관한 연구는 동아시아학 연구자들에게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여겨진다. 다만 하나의 사상을 특정한 시대의 요구나 편의성에 따라 임의적으로 해석하고 이용하는 일은 삼가야 할 것이다. 유학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영위해 나아가면서 필요로 한 동아시아적 복잡한 요소들이 융합되어 만들어진 보편적 가치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유학에 대하여 다시금 짚어보는 것은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철학, 사학 등 무한의 영역들이 세대를 뛰어넘어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실현됨으로써 공감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다변화된 동아시아 세계에서 인간의 존재와 역할의 상실에 따른 근본적인 해결을 유학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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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학 유산과 관련이 있는 대상들은 의식주 전반에 걸쳐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데, 이 가운데에서도 전통한옥은 1990년대 이래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상당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문화재적 가치를 비롯해 관광 자원으로서도 매우 비중 있는 유형 유산임은 굳이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전통한옥과 연관된 한문학 유산 중에서도 樓亭記는 가장 풍부하고 깊이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 자료이다. 이에 따라 본고에서는 누정기에 집중하였으며, 누정기를 단지 한문학 텍스트로만 간주하는 차원을 넘어 문화콘텐츠로서 활용할 수 있는 이야기 소재로서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를 디지털 아카이브(Digital Archive)로 구축하여 전문 연구자뿐만이 아니라 문화계 종사자 및 일반 대중들도 편리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누정기에서 문화콘텐츠로서 의미를 가질만한 요소들은 크게 세 가지로 상정해볼 수 있는데, 첫째는 인물에 대한 정보로서 누정기 내에 언급된 건립자 및 여러 관련 인물들에 대한 정보이다. 둘째는 전통한옥에 대한 정보로서 전통한옥을 어떻게 지었는지, 그렇게 지은 이유가 무엇인지, 건물의 구성 하나하나에 담긴 생각은 무엇인지 등에 관한 정보이다. 셋째는 전통한옥의 이름과 관련된 정보로서 집 이름에 담긴 당대 지식인의 세계관에 대한 정보이다. 위와 같은 관점 하에서 보다 구체적인 논의를 위해 누정기 1편을 집중 분석하였다. 누정기-문화콘텐츠의 디지털 아카이브는 위키 소프트웨어를 활용하여 구축하였는데, 위키 소프트웨어의 장점은 다음의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누구나 쉽게 작성할 수 있으며 무료로 제작할 수 있다. 둘째, 하이퍼링크(Hyperlink) 기능을 쉽게 실현시킬 수 있다. 셋째,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다. 넷째, ‘분류’ 기능을 사용하여 자동으로 색인(index)이 만들어진다. 위와 같은 장점을 충분히 수용하여 본고에서는 위키 소프트웨어로 제작한 아카이브 구축 예시를 제시하였다. 앞 장에서 자세히 분석한 바를 아카이빙한 것이다. 실제로 구현된 모니터 화면을 부분별로 캡처하여 설명을 덧붙였으며, 이것이 문화콘텐츠로 편리하게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