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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연구 KCI 등재 The Nammyonghak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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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제20권 (2005년 12월) 11

1.
2005.1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江右地域은 아득한 三韓시대부터 전국의 학문적 문화적 중심지가 되어 본 적 은 없었다. 高麗中期 이후 晋州를 본관으로 한 姜氏 河氏 鄭氏의 문중에서 걸출 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나, 이들은 현달한 이후로 주로 중앙으로 이주하 였기 때문에 후대의 영향이 크게 없었다. 江右地域의 학문이 본격적으로 흥기한 것은, 佔畢齋가 咸陽郡守로 부임하여 비교적 장기적으로 재직하면서 적극적으로 인재를 양성함으로 인해서이다. 점 필재는 經學과 文章을 융합하는 학문으로 교육하여 그의 제자들은 문학과 경학 에 모두 우수하여 내용 있는 시문을 창작하여 당시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또 그들은 과거를 통해서 중앙관계에서도 嶺南士林派를 형성하여, 朝鮮 건국 이후 확고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勳舊派를 견제하는 위치에까지 이르렀다. 왕조교체기에 節義를 지키지 않았고, 경학적 뿌리가 없는 詞章 일변도의 시문 을 짓는 훈구파에 대해서 이들은 우월의식을 갖고서 배타적으로 처신하는 경향 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점은 훈구파에게 빌미를 제공하여 戊午士禍에 일 망타진되는 비극을 당하게 되었다. 점필재에 의해서 형성된 朝鮮 前期의 嶺南士林派가 戊午士禍와 甲子士禍로 인하여 그 學脈이 후세에 직접적으로 계승되지는 못했지만, 그 한 세대 뒤에 南 冥 같은 대학자가 崛起하는 데 토양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리고 전기 嶺南士林 派에 의해서 형성된 선비정신은 남명이나 그 제자들에 의해서 더욱 정제될 수 있었을 것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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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계는 忠孝淸儉하고 沈重簡嚴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시를 지나치게 좋아하였 고, 眞醇한 儒者로서 忠義를 분발하였으며, 현실세계에 살면서도 늘 物外의 仙 界를 동경하였고, 圭角이 없는 성품에 達觀의 세계관을 지녔던 인물이다. 그는 詩癖이 있을 정도로 시를 탐닉하였고, 당대를 요ㆍ순 시대로 만들고 싶은 포부 를 갖고 있었으며, 身病과 客苦로 고향을 끝없이 그리워하였고, 현실세계와의 불화를 달래기 위해 物外의 仙界를 정신적 귀의처로 삼았다. 이런 점이 그의 志 趣다. 뇌계는 金宗直의 문인이며 성종조 신신자류로서, 당대의 모순을 개혁하여 새 로운 시대를 만들고 싶은 士意識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백성들에 대한 애정 과 재난에 대해 우려하였으며, 불교의 폐단을 인식하고 배척하였으며, 현실제 도의 모순을 개혁하는 데 동참하였다. 뇌계의 處世觀은 그의 개인적 사유와 정 치적 사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귀향의식으로 집결된 다. 그리고 이런 귀향의식의 저변에는 物外의 세계를 꿈꾸는 정신적 지향이 자 리하고 있다. 뇌계의 詩風은 黃庭堅ㆍ陳師道ㆍ陳與義 등 江西詩派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方回의 一祖三宗說을 수용하여, 황정견ㆍ진사도ㆍ진여 의를 통해 杜甫에 도달하는 시문학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氣豪意豁한 蘇軾의 시풍에서 벗어나 唐詩風에 접근할 수 있었다. 뇌계의 시에는 사찰ㆍ유 적지ㆍ객지 등에서의 所懷를 노래하거나 벗ㆍ승려 등에게 內面의 情緖를 보여 준 시편들이 많다. 이 글에서는 歷史에 대한 回顧, 民生에 대한 愛情과 憂慮, 故 鄕에 대한 그리움, 物外의 仙界 志向 등을 시세계의 주요 성향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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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위의 학문연원과 시세계 가운데 특히 조위가 김종직 문하에서 차지 하고 있던 위치와 무오사화를 전후로 하여 달라지는 시세계의 두 국면을 중심 으로 논의를 전개하였다. 조위의 이복누이가 김종직에게 시집을 감으로써 조위는 김종직과 처남ㆍ자형 의 지친이 되었고, 이것을 인연으로 김종직의 제자가 되어 도학을 강론하였으 며, 김종직이 죽은 뒤에 그의 처남이며 문집을 수찬하였다는 이유로 갑자사화 때에는 김종직과 마찬가지로 천양지화를 당하였다. 당시에 수많은 제자를 길렀던 김종직 문하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는 데, 조위는 여러 부류의 제자들 가운데에서도 문학으로 이름이 났고, 결국 문학 으로 입신하여 성종의 지우를 받아 「호당기」를 짓고, 󰡔두시언해󰡕를 편찬하고 그 서문을 쓰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성종 사후 연산군이 즉위한 뒤 유자광 등이 무오사화를 일으켜서 승승 장구하던 그의 벼슬길이 급전직하하여 귀양길로 이어지는 시기를 당해서는 글 에 대한 그의 생각과 철학이 바뀌었다. 그는 무오사화 이전에는 김종직의 문학에서 다진 도학을 바탕으로 문학으로 발양하였고, 이 시기의 그의 시는 벼슬살이 가운데의 한가함을 노래한 것이 주 조를 이루었다. 그러나 무오사화를 지나면서는 실의에 빠지고 문학에 대한 관심이 도학으로 회귀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그의 시는 귀양살이 속에서의 한가함을 노 래하는 가운데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노래한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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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계 표연말(1449-1498)은 훈구파와 사림파가 교체되던 시기에 사림파의 입장에 선 김종직의 문인 중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했던 인물로 연산군이라는 폭군을 만나 사림파의 올곧은 정신을 꺾지 않다가 생애를 마친 인물이다. 남계의 생애는 왕조와 벼슬에 따라 효행을 실천하고 과거를 준비하던 초년기, 과거에 출사하여 告身을 빼앗기고 유배를 당하기도 하는 출사와 좌절기, 예문 관,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등 삼사를 거치면서 간관활동을 하던 출세기, 그리 고 연산조에 들어 대사간까지 올랐다가 사초로 유배되어 죽은 쇠퇴기 등 4기로 나누어진다. 남계의 교유는 김종직, 서거정, 유호인과의 교유 정도만이 보이는데 김종직과 서거정은 당대 훈구관료와 사림을 대표하는 인물로 대립적인 관계였으나 남계 에게는 각별한 선생들이었다. 김종직은 늘 서릿발 같은 기상을 길러 엄정한 판 단을 할 것을 요구하였고 서거정은 그런 기상도 좋지만 백성을 포용하는 관대 함도 지니라고 하였다. 유호인은 함양을 동향으로 김종직의 문인 동료로, 또한 거의 비슷한 환로를 거친 절친한 사이로 고향, 사림, 조정에서 바라는 인물이 되기 위해 함께 힘썼던 師友이다. 남계의 학문과 문학은 남겨진 글이 시 9제 20수, 산문 4편 밖에 없어 제대로 알기 어려우나 학문관은 주자와 같이 마음을 높이고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세세한 일도 강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마 음만을 강조한 육구연을 이단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성현과 같이 되려면 마음 보존을 잘 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당대 사림파처럼의 주자일변도 학풍을 그대 로 따른 셈이다. 남계의 문학은 당대 신진사류가 지향하던 東國文明의 懷古, 禮俗敎化, 우국애 민, 절의와 강개 등을 아울렀다고 여겨지나 남은 작품이 적어 전모를 알 수 없 다. 그러나 문장 공부보다는 현실참여를 중시했으며, 글로 표현하는 일과 관계 없이 본래의 자질은 불변한다는 생각을 가졌음이 작품에 나타난다. 한편 만년 에 가서는 현실참여를 통한 정치개혁의 한계를 깨닫고 고향 자연 속에서의 깨 달음을 추구하려는 태도변화를 보였다. 남계를 비롯한 성종조 신진사류들은 훈구파에 대적할 만한 문학적 재능을 지 녔으되 이를 발휘하기 보다는 도학적 수양을 바탕으로 한 실천행위를 중시하였 고 이를 정치적으로 실현하려고 하였으며, 도의 실현을 위해 현실의 위기를 두 려워하지 않는 지조 있는 조선 선비의 표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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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溪 姜渾(1464-1519)은 중종반정에 참여한 靖國功臣으로, 홍문관 대제학 과 이조ㆍ공조ㆍ형조 판사를 두루 거쳐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특히 그의 시 는 晩唐의 체를 얻어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일컬어졌으며, 그는 뛰어난 문장과 인품으로 뭇 선비들은 물론 성종에게도 촉망받던 인재였다. 그러나 연산조 말 승지로 있으면서 응제시로 아부하여 부귀를 탐한 간사한 인물이라는 오명을 얻 었고, 이로 인해 사림에게 배척 받은 것은 물론 그의 문집도 제대로 간행되지 못하였으니, 그의 저술은 백에 하나도 남아 있지 못한 실정이다. 그러나 여러 증언과 정황을 고려해 볼 때, 강혼이 연산군 밑에서 벼슬하고 글 을 지은 것은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으며, 그에 대한 비난도 매우 편향적이고 부당한 면이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강혼의 생애와 사상 및 그의 문학은 재평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강혼은 훈구에 속하는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김종직을 스승으로 섬기고 그 제자들과 두루 사귀었다. 이러한 점을 반영하듯 그 당시 훈구와 사림이 첨예하 게 대립한 昭陵復位論과 薦擧別試制(賢良科)를 통해 볼 때, 강혼의 정치적 입지 木溪 姜渾(1464-1519)은 중종반정에 참여한 靖國功臣으로, 홍문관 대제학 과 이조ㆍ공조ㆍ형조 판사를 두루 거쳐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특히 그의 시 는 晩唐의 체를 얻어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일컬어졌으며, 그는 뛰어난 문장과 인품으로 뭇 선비들은 물론 성종에게도 촉망받던 인재였다. 그러나 연산조 말 승지로 있으면서 응제시로 아부하여 부귀를 탐한 간사한 인물이라는 오명을 얻 었고, 이로 인해 사림에게 배척 받은 것은 물론 그의 문집도 제대로 간행되지 못하였으니, 그의 저술은 백에 하나도 남아 있지 못한 실정이다. 그러나 여러 증언과 정황을 고려해 볼 때, 강혼이 연산군 밑에서 벼슬하고 글 을 지은 것은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으며, 그에 대한 비난도 매우 편향적이고 부당한 면이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강혼의 생애와 사상 및 그의 문학은 재평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강혼은 훈구에 속하는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김종직을 스승으로 섬기고 그 제자들과 두루 사귀었다. 이러한 점을 반영하듯 그 당시 훈구와 사림이 첨예하 게 대립한 昭陵復位論과 薦擧別試制(賢良科)를 통해 볼 때, 강혼의 정치적 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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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朝鮮 成宗朝 新進士類의 일원으로서 당시 산문의 第一家로 稱譽되던 濯纓 金馹孫(1464-1498)의 생애와 문학, 정치적 역할에 대해 개괄적으로 고찰 해 보는 것에 목적이 있다. 15세기 성종조는 문학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로 서 詞章과 道學의 상대적인 비중에 대한 다양한 입장이 정치적인 성향과 연계 되어 대립의 양상을 표출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신진사류의 선두를 자임 하였던 탁영의 문학적 견해와 정치적 역할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 가 있다. 탁영은 신진사류의 실질적인 영수였던 佔畢齋 金宗直의 문인으로서, 점필재와 정치적ㆍ문학적으로 유사한 노선을 견지하였다. 훈구세력들의 전횡 에 반대해 유학적 왕도정치에 대한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으며, 훈구세력들이 崇文을 조장하여 군주의 修己任人을 방해한다거나 阿諛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한편, 본고가 江右 지역과 연관된 인사들의 학문과 생애 등을 개괄적으로 소 개, 고찰하기 위한 학술대회의 일환으로 작성된 만큼, 기존의 연구에서 비중 있 게 소개되지 않았던 부분까지도 다양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문집 의 改刪 경위나, 詩文에 대한 후대의 평가, 節義之士로서의 변화하는 위상 등에 대해 일정한 비중을 두어 소개하였다. 탁영의 문장과 절의는 당대는 물론 후대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작품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과 35세라는 짧은 생으로 인해 학통이 연결될 만한 고 리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의 문장과 절의가 후세에까지 많은 영향을 줄 정도로 뛰어났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하겠다. 특히 宋時烈 같은 道學者들조차도 탁영 문장에 대해 후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이는 탁영 문장의 내용적인 측면 과 실제로 보여준 유가로서의 실천적인 삶과 절의가 일치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도가 바탕이 된 진정한 ‘經文一致’를 추구했던 도학자들에게 탁영 의 문장은 전범이 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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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는 심성도설의 역사적 사례들을 살펴보고 심성도설의 의미와 함 께 심성도설과 심성우언소설의 관련양상을 검토하면서 심성우언소설의 문화적 위상을 점검해 보았다. 우리나라에서 도설은 매우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심성의 문제를 다룬 심성도설들은 성리학의 심성론이 심화발전하면서 매우 활발하게 나타났 다. 성리학에서는 ‘심성의 문제’를 가장 본질적인 인간 문제로 이해했으며, 인간 을 ‘심성적 존재’로 파악했다. 그리고 심성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하여 무수한 심성 논의를 펼쳤다. 심성도설들은 이러한 심성론의 인간 이해에 바탕 을 두고 번쇄한 심성의 문제와 구조를 간명한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심성도설들 중에서 조식의 신명사도는 심성우언소설을 촉발하는 직접적인 계 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추상적인 관념들을 구체적인 형상의 이미지로 표현하 는 데 성공한 거의 유일한 도상이며, 번쇄한 심성논의를 한 장으로 응축하는 데 성공한 대표적인 심성도설이다. 신명사도는 성곽이 둘러선 비장한 전쟁터로 마 음의 풍경을 표현하고 있다. 성곽 안쪽에서는 敬이, 바깥쪽에서는 義가 주로 활 동하며 誠이 중간에서 이 둘을 매개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내부적 으로는 性을 함양하고 외부적으로는 情을 처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안이 된다. 심성우언소설들은 이러한 심성론과 심성도설들을 바탕으로 하여 탄생하였다. 그러므로 심성도설을 대표하는 신명사도와 심성우언소설은 여러 가지 면에서 공통점을 보여준다. 마음이 살벌한 전쟁터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 경과 의의 실 천적 역할이 중시된다는 점, 인간의 정을 잘 처리하여 마음의 건강에 이르는 것 을 목표로 한다는 점, 불가시적인 마음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표현하는 물질화 된 상상력을 발휘하였다는 점이 그것이다. 또한 심성우언소설은 심성도설이 가 지고 있는 표현의 한계성을 극복하면서 심성담론의 지평을 새롭게 확대하였다. 심성도설이 지닌 공간적 표현의 한계를 시간적 변이에 따른 서사적인 표현을 통해 극복했다는 점,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敬ㆍ義와 같은 심성적 기제 뿐만 아니라 술ㆍ담배와 같은 비심성적 기제를 활용하였다는 점, 교훈성과 실 천성에 한정하지 않고 새롭게 흥미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 의인의 기법을 더 욱 심화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심성론과 심성도설과 심성우언소설은 마음의 성인이 되는 방식을 통해 인간 구원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 구원 방식은 「천로역정」류와 는 다른 구원 방식을 보여주고 있어 비교연구가 필요하며, 세계문학사에서 ‘신 학적 담론’이 ‘도상학적 담론’을 거쳐 ‘서사우언 담론’으로 정착되는 일련의 과 정도 비교연구해 볼만 한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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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의령향안의 작성시기 및 입록자 가문의 분포, 입록을 둘러싼 갈 등양상 등을 살펴보았다. 의령향안은 16세기 말부터 1630년대까지 입록이 지 속적으로 이루어지다가 이후 한동안 향안 입록의 사실이 보이지 않는다. 1698 년에 가서 다시 입록이 이루어지고 다시 1707년에도 작성되지만, 이를 기점으 로 의령 사족층의 정상적인 향안입록은 종식된 것 같다. 원래 의령에는 의령현과 신번현의 토성이 있었지만, 그동안의 역사적 변천 속 에서 대부분 사라지거나 다른 곳으로 이동해 버렸다. 그 대신 고려 말 이후 조 선 중기에 걸쳐 다른 성씨들이 의령에 들어와 정착하였다. 이 가문의 인물들은 의령에 정착한 이후 문과와 생진과 및 무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함으로써, 사족가문으로서의 권위를 유지해 나가고 있었다. 또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임란 이후 의령에서의 그들의 입지를 강화하기도 하였다. 이들 은 상호간에 중첩적인 결혼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지배적인 지위를 유지 해 나가려 하였다. 의령에서의 향안 입록을 둘러싼 갈등양상으로는 우선 단향 모록의 문제를 들 수 있다. 단향자는 입록이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은 의령지역에서도 17세기 후반 단향자들의 입록이 이루어지는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다른 고을과 마찬 가지로 향안 입록에서 적용되던 엄격한 기준이 서서히 붕괴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17세기 후반 의령에서는 향안 입록을 둘러싼 가문간의 갈등도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이와 같이 향안 입록을 둘러싼 분쟁이 격화되면서 향안의 작성은 1707년을 마지막으로 실질적으로 종식되었다. 의령에서도 서 인, 노론의 당파 입장을 취하는 가문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향안 입록을 둘러싸 고 다른 고을에서 나타났던 당파간의 갈등현상은 의령지역에서는 향안 작성이 종식될 당시까지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인근 고을인 진주에서 당파적 갈등이 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8세기 말까지 향안 입록이 지속되고 있었던 점과도 대비된다. 이처럼 같은 경상우도 에 속해 있다 하더라도 고을마다 향안 작성의 종식 현상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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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9세기 말엽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야사총서 󰡔稗林󰡕의 가치와 특징을 분석하였다. 󰡔稗林󰡕은 일찍부터 영인되어 학계에서 널리 이용된 대표적 인 야사총서다. 하지만 사료로서의 가치나 편찬 과정에 대해 깊이 있는 학술적 분석이 가해지지 않았다. 본고는 󰡔패림󰡕이 지닌 가치와 특징을 밝히는 것을 목 표로 하였다. 󰡔패림󰡕의 편찬자는 구체적으로 이름이 밝혀지지 않지만, 󰡔대동패림󰡕을 빌려 서 轉寫할만큼 沈魯崇 집안과 친분이 두터운 서울 경기 지역의 노론 명문가의 일원이며, 역사에 관심이 깊은 학자일 가능성이 높다. 󰡔패림󰡕은 조선후기 야사총서 편찬의 과정 속에서 출현했으며, 10여종의 비 중이 큰 야사총서 가운데 마지막 단계에 위치한다. 󰡔패림󰡕에 수록된 개별야사 의 분석을 통해서, 󰡔패림󰡕은 󰡔大東稗林󰡕의 轉寫를 통하여 형성되었다는 사실 이 입증되었다. 따라서 󰡔패림󰡕은 金鑢가 편찬한 󰡔寒皐觀外史󰡕ㆍ󰡔倉可樓外史󰡕 의 계통을 밟은 野史叢書群인 󰡔대동패림󰡕, 󰡔패림󰡕, 󰡔廣史󰡕 계열에 속한다. 그러 나 󰡔패림󰡕은 내용의 일부를 󰡔鵝洲雜錄󰡕에서 취하였고, 󰡔패림󰡕만의 특색을 보여 주는 󰡔正宗紀事󰡕, 󰡔純祖紀事󰡕, 󰡔憲宗紀事󰡕, 󰡔哲宗紀事󰡕를 총서의 전면에 내세 웠으며, 비교적 방대한 분량을 지닌 야사인 󰡔我我錄󰡕, 󰡔辛壬紀年提要󰡕, 󰡔修書 雜志󰡕와 같은 야사를 포함함으로써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독자성을 확보하였 다. 󰡔패림󰡕은 기존의 야사총서가 지닌 장점을 흡수한 바탕 위에서 주로 정치사 관련 야사를 수록하였다. 따라서 19세기 야사에 대한 학자들의 관심과 야사이 해의 실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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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현행 교육용 기초한자에 대한 字形學的 검토를 위하여, 1800자를 대 상으로 字素分析을 시도한 작업이다. 이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소에 관한 개념과 범위의 설정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字素의 槪念과 分類」 라는 제목으로 構形分析에 관한 기존의 용어와 개념, 현재 중국 및 우리나라 학 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용어와 구분상의 문제점 등을 정리하여 발표한 바 있다. 본고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하여, 교육용 기초한자들의 자소를 構形素와 機能 素로 나누고, 구형소는 다시 筆劃字素ㆍ基本字素ㆍ特殊字素ㆍ形體字素 등으로 분류하여 나열하였으며, 이들 자소들의 變異形態를 變異字素와 同形字素로 구 분하여 첨부하였다. 機能素는 表意字素와 表音字素로 분류하였다. 구체적 작업 의 내용은, 우선 구형소에 있어서 필획자소를 제외한 기본자소 208개와 특수자 소 73개를 추출하여 나열하였으며, 형체자소는 따로 제시하지 아니하고, 변이 자소와 동형자소에 포함시켜 함께 열거하였다. 기능소로서의 표의자소는 269 개, 표음자소는 모두 513개를 추출하여 열거하였다. 작업결과, 자소의 분석 작업이 교육용 기초한자의 字數 제한으로 인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최소한의 보완책이라는 필자의 소견이 일정 정도는 확인이 되었 고, 아울러 한자학습과정에서 발생하는 字形上의 諸問題를 해결하는데도 도움 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검증이 될 수 있었다. 다만, 용어의 설정이나 기본자소의 선정 등의 문제들은 필자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며, 한자교학에 종 사하는 이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문제점이 지적되고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자 소학습의 대중화 역시 같은 전제하에서야 비로소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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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엽, 특히 아편전쟁 이후 排外主義運動이 아시아를 석권했다. 한국 과 일본의 배외주의자는 종종 비슷한 구호를 외쳤는데 ‘尊華攘夷’와 ‘尊王攘夷’ 가 그것이다. 이들은 그러한 슬로건을 ‘尊攘’이라고 약칭했다. ‘존양’사상은 배 외주의뿐만 아니라 전근대적이기는 하지만 민족주의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이 논문의 목적은 한국의 后山 許愈(1833-1904)와 일본의 吉田松陰 (1830-1859)에 있어서의 尊攘 사상에 대한 비교연구이다. 허유는 그의 스승인 寒洲 李震相에 의해 수립된 寒洲學派의 구한말의 저명한 학자이다. 당시 한국은 서양과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직면해 있던 때였으 므로 그는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시대에 많은 유학자가 義兵 을 일으켰지만 그는 그와는 다른 한편에서 제자 양성, 󰡔南冥集󰡕․󰡔理學綜要󰡕의 校正, 그리고 스승 이진상의 選集인 󰡔寒洲集󰡕 출간에 자신의 모든 정력을 바쳤 다. 이것은 그가 ‘隱者의 나라’에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모 든 학술활동은 이러한 전면적 위기에 대항하는 ‘鬪爭’이었던 것이다. 그는 主理 說을 주장하였지만, 그것은 그가 社稷과 人倫을 회복하는 수단으로는 오직 朱․ 李(朱子와 李退溪)의 학통을 밝히는 것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일본의 尊王家인 吉田松陰은 形而上學的인 ‘理’를 결코 주장하 지 않았다. 차라리 그는 강경한 主氣派라고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의 이 론과 실천은 現象世界 - 곧 일본이 ‘국제사회’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 한다 - 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는 현실 세계에 있어서 일본의 고유성을 모색해 나아갔던 것이다. 허유와 吉田松陰은 동시에 尊攘을 주장하였지만 그들이 근거하는 바는 곧 主 理와 主氣로 서로 달랐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과 일본의 유학에 있어서 차이점을 반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