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엽, 특히 아편전쟁 이후 排外主義運動이 아시아를 석권했다. 한국 과 일본의 배외주의자는 종종 비슷한 구호를 외쳤는데 ‘尊華攘夷’와 ‘尊王攘夷’ 가 그것이다. 이들은 그러한 슬로건을 ‘尊攘’이라고 약칭했다. ‘존양’사상은 배 외주의뿐만 아니라 전근대적이기는 하지만 민족주의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이 논문의 목적은 한국의 后山 許愈(1833-1904)와 일본의 吉田松陰 (1830-1859)에 있어서의 尊攘 사상에 대한 비교연구이다. 허유는 그의 스승인 寒洲 李震相에 의해 수립된 寒洲學派의 구한말의 저명한 학자이다. 당시 한국은 서양과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직면해 있던 때였으 므로 그는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시대에 많은 유학자가 義兵 을 일으켰지만 그는 그와는 다른 한편에서 제자 양성, 南冥集․理學綜要의 校正, 그리고 스승 이진상의 選集인 寒洲集 출간에 자신의 모든 정력을 바쳤 다. 이것은 그가 ‘隱者의 나라’에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모 든 학술활동은 이러한 전면적 위기에 대항하는 ‘鬪爭’이었던 것이다. 그는 主理 說을 주장하였지만, 그것은 그가 社稷과 人倫을 회복하는 수단으로는 오직 朱․ 李(朱子와 李退溪)의 학통을 밝히는 것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일본의 尊王家인 吉田松陰은 形而上學的인 ‘理’를 결코 주장하 지 않았다. 차라리 그는 강경한 主氣派라고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의 이 론과 실천은 現象世界 - 곧 일본이 ‘국제사회’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 한다 - 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는 현실 세계에 있어서 일본의 고유성을 모색해 나아갔던 것이다. 허유와 吉田松陰은 동시에 尊攘을 주장하였지만 그들이 근거하는 바는 곧 主 理와 主氣로 서로 달랐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과 일본의 유학에 있어서 차이점을 반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