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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연구 KCI 등재 The Nammyonghak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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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권 (2008년 12월) 1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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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파와 관련된 각 가문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필자는 이번에 남명 조식의 문인인 文益成 및 그의 후손의 활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합천에 거주하던 문익성은 문과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거쳤다. 그의 아들 문 려도 마찬가지로 문과를 거쳐 중요 관직을 역임하였고, 문할도 진사시에 합격 하였다. 두 형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형제간의 우 애도 돈독하고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였다. 이런 행적으로 인해 그들의 가 문은 경상 우도에서 손색없는 사대부 가문으로 자리잡게 된다. 진주로 이거한 문할의 후손들은 이후에도 이런 사족 가문의 전통을 계승하면 서 진주에서 명망가문으로 뿌리내리게 된다. 그들은 선조의 가학을 잇는 입장 에서 남명학파의 맥을 이어갔고, 또 조선 후기의 정치적 변화 속에서 남인 입장 을 견지하였다. 다른 사대부 가문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멸망한 명나라를 대신해 中華문화를 굳건하게 이어 간다는 입장에서 존주의식을 꾸준히 계승해 가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그들 가문에 대대로 전해지던 大明花의 보호・전승을 통해 이를 실천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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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劼은 어려서부터 문명을 떨쳐 소년시인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뛰어난 시 작 품을 남겼고, 정유재란에 하수일과 의병을 일으켜 하동의 악양에서 활동함으로 써 이들 덕분에 이 지방이 온전하였다는 평과 조정의 상을 받기도 하였다. 文弘 運은 아버지를 따라 악양에 있다가 아버지가 병사함에 전란의 와중에서도 장례 를 치루고 그 이후로는 유거하며 지냈으며, 그가 남긴 「頭流八仙遊篇」은 지리 산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頭流八仙遊篇」은 문홍운 자신을 비롯하여 성여신, 정대순, 강민효, 박민, 이 중훈, 성박, 성순의 여덟 사람이 성여신의 제의에 따라 두류산을 유람한 과정과 느낌을 읊은 시이다. 이 시는 지리산 유람을 노래한 여러 시편 가운데 가장 긴 것으로 240구 1,200자에 이르는 장편 5언시이다. 특기할 것은 성여신의 「방장 산선유일기」 가운데에도 보이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시의 제목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지리산으로 유람을 떠나는 여덟 사람을 신선이라 부른 것이다. 선비들이 자신들이 유람을 가는 곳을 신선세계라 하며, 그곳을 속세와 구분하 여 마치 신선세계에 오른 듯이 그 감회를 기록한 것은 있지만, 유람 가는 자신 들을 신선이라 하였을 뿐만 아니라 각인에게 신선의 이름을 이처럼 지어붙인 경우는 거의 없다. 그만큼 이들의 신선세계에 대한 동경이 컸음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의 이러한 신선놀이는 또한 한 번의 일회적인 유희에 그치지 않고 유람하 는 동안 내내 이어졌음을 성여신과 문홍운의 글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성여신이 “속에 들어가서는 눈에 띄는 사람 모두 선인이었고, 산 밖으 로 나와서는 만나는 사람 모두 범인이었다.”라고 한 바와 같이 이들의 이러한 신선놀이는 결국 유자로서 신선에 인식의 테두리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 다. 문홍운이 지리산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신선세계에 대한 동경과 예찬이 극 에 달하였지만, 막상 그가 지리산에 당도한 뒤 특히 지리산 청학동이나 향로봉 에 올라 읊은 평범한 시구는 그러한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문홍운은 그의 시에서 청학동이나 향로봉에서 신선세계에 당도하여 신선을 보았다고 했으나, 이는 보통 사람들의 신선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곧 문홍운의 신선놀음도 결국은 성여신이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의 선유는 이름은 비록 ‘仙’이나, 실제는 ‘仙’이 아닌 것 이다.”라고 한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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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益成은 1526년에 태어나 1584년 肅川都護府使로 재직 중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친 인물이다. 그의 문집인 󰡔옥동집󰡕은 전란으로 잃어버리고 남은 詩文 들을 모은 것으로 그 분량이 매우 적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여 본고는 특히 관직 생활과 연관된 시를 중심으로, 그 삶의 과정들을 살펴본 것이다. 먼저 승문원과 사섬시에 근무할 때 지은 것으로 보이는 「禁中題立春」과 「題 司贍寺契軸贈同僚」에서는 관직 생활의 희망, 임금을 송축하는 마음이 작품의 주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洪原縣樓贈別朴公鳴渭」 「次端川上房韻」에서는 향수와 함께 약간 울적한 심사를 내비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澤稚」라는 작품을 들고, 그것이 울산군수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즈음에 지어진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보았다. 매우 위험한 추정이지만, 관련 자료가 소략한 상황에서 조금 과감한 상상을 해 본 것이다. 마지막으로 숙천도호부사 시절에 지은 「聞雁 有感」은 아마 문익성이 남긴 마직막 시가 아닌가 여겨진다. 그는 벼슬에서 완전 히 물러나 여생을 마무리할 뜻을 굳힌 상태에서, 다시 고향을 떠나 평안도 숙천 에 부임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삶을 마쳤다. 이 시에서는 나 라를 걱정하는 마음과 함께 인생의 종착점을 목전에 둔 비장함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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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溪 文勵(1553-1605)는 曹植의 제자인 文益成의 아들이자, 조식의 고제자 인 鄭仁弘의 제자이다. 그는 임진왜란 중 의병장으로 활약했으며, 난후에는 그 의 충의에 감격한 명나라 장수들에게서 󰡔翰墨流芳󰡕을 선물받기도 했다. 지역 한문학적 측면에서 陜川을 연구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南平 文氏의 학맥을 연 구하기 위해서도 문여에 대한 연구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의 생몰연대는 물 론 죽음의 이유까지 그릇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본고는 이에 그의 삶과 시를 조명하고자 하였다. 그는 일찍이 학문보다는 姜呂尙처럼 출사하여 경제제민의 포부를 펼치고자 했다. 그러나 뇌물수수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사하고 말았으 니, 그의 꿈은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시는 자연의 승경 을 노래한 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눈물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다. 임진왜란 중의 우국충정의 시, 이별을 읊은 시, 보고픈 이를 그리워하고 고 향을 그리워하는 시가 그러하다. 이것은 민족의 대재앙이었던 임진왜란이라는 시대상을 반영한 것으로, 그의 시는 길 위에서 방황하는 동시대인의 아픔과 소 망을 대변하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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滄海 文尙海(1765-1835)는 18세기 말 19세기 초 진주 인근에 살았던 남명 연원가의 한 사람이다. 이 시기 경상우도 지역의 학자들이 인조반정 이후 出仕 하지 않고 지방에 퇴처하여 학문연구와 修身에 치중하여 살았던 것처럼, 창해 또한 재야지식인으로서의 전형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일생 출사하지 않고 향리에서 不斷한 수양자세로 일관하였는데, 이러한 삶의 자세는 그의 문 학작품 속에 고스란히 표출되어 있다. ..창해집..에는 그 분량이 많지는 않으나 이 시기 경상우도 지역의 여느 지식 인의 문집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다양한 문체의 글이 실려 있다. 漢詩의 경우 조선조 지식인에게 통용되던 오언시와 칠언시 외에도 六言詩가 6수나 들어 있 으며, 그 외 記·說·詞·傳·訓·銘·歌·賦 등 다양한 문체의 작품이 골고루 실려 있다. 그 내용에 있어서는 재야지식인으로서의 ‘끊임없는 수양하기’가 일관되게 나타 난다. 곧 유사한 내용을 읊어내더라도 다양한 형식으로 표출해 낸 경우인데, 이 는 창해가 그만큼 풍부한 문학적 소양과 다양한 창작활동 욕구를 지녔음을 의 미한다. 문학작품 가운데 특히 시를 중심으로 효용론적 측면에서 孝行詩·紀行詩·愛民 詩·修養詩·隱居詩로 분류하여 살펴보았는데, 그 속에 드러난 창해의 문학적 志 趣는 재야지식인으로서 삶 그 자체였다고 하겠다. 그는 출사하여 자신의 이상 을 펼치지는 못하였으나 조선조 지식인으로서의 處世, 士意識, 愛民精神 등을 다양한 문체 형식을 빌어 작품 속에 표현해 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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芳洲 文國鉉은 둔암-성재-순암-성호-퇴계로 이어지는 학통에서 발견되는 보수적이고 반외세적인 영향으로 일찍부터 서구세력의 동점을 경계했다. 외세에 의한 침탈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가 제시한 것은 자기 수양과 함께 유학의 부흥과 후진의 양성이었다.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조선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과 국권의 상실의 역사적 상황은 그로 하여금 그의 이념의 적극 적인 실천 보다는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와 은둔을 선택하게 하였다. 은둔자로 자처하던 방주는 개방적이기 보다는 보수로 삶의 방향을 결정하여 유가의 전통적인 이념을 묵수하면서 혼란한 시대에서도 本性의 유지와 심성의 함양을 통한 인간 도리의 실천 그리고 유가의 전통적인 학문 공부를 통해 미래 사회에서의 재기를 꿈꾸었다. 이 시기의 방주의 학문경향이나 문예관은 조선 500여년을 면면히 이어온 유 가적 학문・문예관을 충실히 계승하기는 하였다. 그렇지만 근대로 들어서는 시 대 상황을 고려하여 평가할 때는 역사의 변화에 순응하지 못하는 또는 동참하 지 않으려는 보수적인 유학자로서의 문예관을 고수한 인물로 평가된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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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리산의 역사적 성격의 변화에 초점을 두고 名山文化로서 智異山의 正體性을 조선 초・중기의 문헌사료를 통해서 구명한 것이다. 먼저 명산은 인간 이 인위적으로 창출하고 결정한 의미에 의해서 규정・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므 로 명산은 고정되는 경우보다 변화를 겪는 존재로서 사회적 생산물의 성격을 갖고 있어 문화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명산문화는 명산이 의미하는 바의 정체성까지 수렴하는 보다 광의의 의미를 갖고 있다. 조선 초기 지리산은 太祖 李成桂에게 조선 건국과 관련해서 중요한 신성의 장 소이자 그들의 정치적 목적의 정당화를 위한 含意를 지닌 곳이었다. 한편 지리 산의 神聖은 卿·大夫·士・庶人이 숭배 대상으로 하였던 山神으로서 信仰性을 갖 고 있었다. 반면에 왕을 비롯한 위정자에게 지리산의 신성은 명산대천으로서 신성에 정치적 성격을 포함한 이중적 함의를 지녔다. 세종 같은 경우 전통문화 로서 명산대천의 신성을 인정하면서도 惑信하는 신성에 대해서 철저하게 조사 하여 금지하였다. 이처럼 鮮初 지리산의 정체성은 신성에서 신앙성・정치성 등 다양한 함의를 지녔다. 조선 중기 지리산은 지리산권역의 사림들과 수령들에게 仙遊・修養의 공간, 그리고 勳戚政治 개혁을 위한 모색의 공간으로서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럴 때 馬 崇祖가 지리산 天皇을 숭배하다가 죽임을 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지리산이 신앙으로서 神聖性을 크게 잃어갔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지리산의 정 체성은 조선 중기에 이르러 정치・사회적 함의가 커져갔다. 한편 賊徒 張永己 사 건에서 지리산이 인간의 삶 속으로 급속히 편입되는 사회성을 읽을 수 있다. 이 보다 더 사회성과 정치성을 보여주는 사건이 자칭 의병대장 宋儒眞 사건이다. 16세기 말 지리산은 王朝를 부정하였던 송유진을 따르는 한 무리의 활동 공간 이었다. 이는 그만큼 지리산의 정체성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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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 명산문화의 정체성을 인문지리적인 관점에서 탐구하기 위한 목적의 일환으로 명산문화의 개념 정의, 사상적 배경 및 구성 요소, 역사적 기원과 형성 유형을 살펴보고,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명산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중 심으로 유학적 명산문화의 전개와 의의 등을 주요 논제로 고찰하였다. 조선조 유학사상은 한국 명산문화의 인문적 발전을 이끌고 명산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바꾸었다. 道學者들에게 있어 명산경관은 天地動靜의 이치를 體現하 고 있는 공부텍스트이자 觀物察己의 유학적 存養 장소가 되었다. 그들은 명산 의 장소이미지를 인간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名山과 名儒의 이미지를 결합시켜 표상하였다. 實學者들에 있어 명산의 산수는 可居地 생활권의 한 입지 요건이 되었고, 명산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의 노력이 뒤따르게 되어 名山誌가 저술되 었다. 白頭大幹과 관련하여 명산에 대한 인식의 提高가 이루어졌고 국토의 祖 宗이 되는 명산으로서 백두산이 주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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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논자가 앞으로 10여 년간 중점적으로 탐구해야 할 과제 중 하나인 지 리산 유산기 연구의 試論이다. 논자가 진행해야 할 연구는 지리산권역을 중심 으로 한 조선조 지식인의 문학이다. 특히 조선조 지식인의 지리산 관련 遊山文 學과 영남・호남 지식인의 樓亭文學 작품을 주요 논의대상으로 삼아 그들의 山 水美學과 그 속에 융화된 자연관을 집중 탐구하고, 이의 전반적 이해를 통해 조 선조 지식인의 자연에 대한 이해, 나아가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모색하던 태도 를 밝혀내게 될 것이다. 본고는 그 첫 시도로써, 조선조 지식인이 지리산을 유 람하고 남긴 유산 작품을 대상으로 삼아 그 동안 발굴된 자료를 개괄하고, 작품 속에 내재된 그들의 산수인식을 고찰함을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조선초기 李陸의 「智異山記」에서 시작된 지리산 유산기는 20세기까지 약 90 여 편이 발굴되었다. 이를 시대별로 분류하면 15세기 6편, 16세기 5편, 17세기 전반과 후반에 각 6편과 7편, 18세기 20편, 19세기 27편, 20세기는 21편인데, 후대로 갈수록 작품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함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작품 수의 차이는 조선시대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그에 따른 지식인들의 浮沈에 그 원인 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리산 유산기에 보이는 산수인식은 4가지로 압축할 수 있었다. 먼저 유산기 담당층이 조선조 유학자인 만큼 다양한 儒家的 志趣를 先賢尊崇으로 압축하여 살펴보았고, 다음으로 지리산 산수자연 가운데 佛家的・巫俗的 유적지를 통해 異端을 배척하는 지식인의 의식을 살펴보았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오는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仙境을 찾는 그들의 遊仙 의식을 살필 수 있었다. 특히 그들은 지리산의 절경 속에서 道家的 志趣를 갈망하면서도 유학자로서의 자세 를 잃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유람을 통해 뛰어난 文學的 志趣를 표출해 내었는 데, 이는 우리 국토에 대한 예찬으로 일관되었음을 확인하였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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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중기의 유학자 퇴계 이황과 청량산의 관계를 검토한 것이다. 산과 인간의 관련성을 사상적 측면에서 고찰하려는 목표 하에, 한국 유학을 대표할 수 있는 퇴계와 그가 평생토록 그리워하고 동경한 청량산에 주목하여 탐색하였 다. 본론에서 논의한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養氣는 ‘養生的 養氣’, ‘道德的 養氣’, ‘審美的 養氣’ 등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儒家가 산수자연에 대해 가지는 입장은 道德的 養氣와 밀접한 관 계가 있다. 유가의 도덕적 양기론은 자연의 질서를 통찰함으로써 자신의 내면 에 존재하는 도덕성을 자각하며, 이 자각적 깨달음을 지속적으로 올바르게 유 지하여 내면의 기운을 자연과 같이 생명력이 넘치면서도 질서로운 상태로 만들 어 가는 것이다. 공자의 ‘樂山樂水’와 맹자의 ‘浩然之氣’에 보이는 이와 같은 도 덕적 양기론의 면모는 송대 성리학자들에 의해 더욱 심화되고 체계화되는 단계 로 나아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楊恒叔의 󰡔무이지󰡕는 퇴계를 비롯한 조선 중기의 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 쳤는데, 현재 중국에서는 일실되었으며, 寒岡 鄭逑가 이를 대본으로 삼아 개편 한 󰡔무이지󰡕(1~2권, 1책)가 우리나라에 남아 전한다. 󰡔무이지󰡕는 우리나라 山 志의 전범이 되었으며, 특히 󰡔淸凉志󰡕는 이 책을 전범으로 삼아 저술되었다. 󰡔청량지󰡕는 무이산이 주자로 인해 주자학파의 학자들에 의해 聖山으로 존숭 되는 것처럼, 퇴계학파의 학자들이 청량산을 退溪와 관련된 聖山으로 확립하여 聖域化하려고 노력한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자연과 인간이 어울려 그 자연환 경에 조응하는 새로운 인문경관을 창조하게 되는데, 󰡔청량지󰡕는 청량산과 퇴계 학파가 빚어낸 인문경관을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는 저술이다. 퇴계의 시문에 형상화된 청량산의 이미지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정신적 고향으로서 늘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산이다. 둘째, 세상의 번잡함과 구별된 곳으로서 심신을 맑게 정화해 주는 산이다. 셋째, 조용히 학문 에 힘을 쏟을 수 있는 강학처로서 성현을 배우려는 마음을 분발시켜 주는 산이 다. 그리고 이와 같은 청량산의 이미지는 퇴계가 표현한 단어 또는 내용적 의미 로써 요약하여 吾家山・仙山・聖山이라는 말로 구분지어 볼 수 있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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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산은 자연환경의 독특함이나, 혹은 문화 발생지, 무형 문화재의 본거지, 특 색 토산물의 출산지 등으로서 일반적으로 자연 풍경이 수려한 산을 일컫는다. 명산은 국가의 중요한 지점에 위치해 있으면서 산을 주거지로 하는 지역민뿐만 아니라, 각 시대 모든 계층의 유람객과의 관계를 통해 특정 지역민에 의해 생성 되는 일반 지역문화와는 다른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였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이러한 문화를 ‘명산문화’로 명명하였다. 그리고 각 주요 명산을 중심으로 명산문화 연구소와 기타 연구기관들이 설립되어 ‘사람과 산’ 에 관한 다양한 학술 연구가 진행되었다. 중국의 명산문화 연구는 국내외 학술 적 연구와 교류에만 그치지 않고, 이를 통해 중국명산의 세계적 인지도를 높여 중국 명산의 세계 자연·문화유산 등재에 일조하였으며, 국가 주요 연구과제로 대내외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 태산연구소와 오대산연구소는 연구 참여인력의 규모와 연구 성과 면에서 중 국 명산문화의 대표 연구소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눈여겨 볼만한 것은 두 연구 소가 제기 하였던 ‘태산학’, ‘오대산학’의 명산학 정립에 대한 논의이다. 비록 명 산학 정립에 대한 찬반 의견이 현재까지도 분분하지만, 명산문화 연구를 하나 의 학문으로서 정립하고자 하는 논의는 명산문화 연구발전의 한 단계라고 여겨 진다. 본고는 중국 명산문화 연구의 발전과정과 현황에 대한 분석을 통해 지리산권 문화 연구의 명산문화로서의 연구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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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함양에 있는 鄭汝昌을 모시는 남계서원은 명종대에 건립되고 대원군 의 서원 철폐에도 남게 된 영남우도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명종 7년에 姜翼 등 함양 사림 몇몇이 함양군수의 협조를 얻어 건립하기 시작 하였다. 고을 사림들의 반대, 흉년, 후임 수령들의 무관심 등으로 공사가 중단되 었으나 주변 고을 사림들의 도움, 함양과 연고가 있는 지방관들의 후원, 처음과 는 다른 함양 사림들의 협력을 얻어 10년만인 명종 16년에 강당과 묘우를 완성 하였다. 서원의 설립과 운영에 사림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는 서 원이 새로운 향촌기구로 지방 사림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남계서원은 정기적인 제례를 거행해 나갔고, 교육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기증, 구입, 內賜 등의 방법으로 많은 서적을 소장하였다. 그리고 춘추로 講信禮를 거 행하고, 서당과 연결하여 교육하는 등 향촌의 교육과 교화에 깊게 간여하여 고 을의 중심기구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남계서원이 조식의 학문적 영향권에 속해 있어, 北人 관료들의 성장에 어느 정도 기여했음을 예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서원과 관련 있는 사림들의 科擧와 官歷을 조사해보면 관직 경험자는 미미할 정도였다. 사림파들에게 재기의 터전 이 되고, 중앙정계를 지배하게 된 기반이 된 것이 서원이었다는 개설서와 교과 서 등에서의 설명에 의심이 가게 만들고 있다. 남계서원이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리자 인근의 新溪書院과 함께 묶어 재건을 추진하였다. 신계서원의 盧禛과 강익의 위차 변경을 둘러싸고 함양 사림들이 갈등과 분열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위차의 다툼이 서인과 북인의 대 립으로까지 비화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결국 신계서원이 예전처럼 독립해 나가고, 남계서원은 옛날 위치로 다시 돌아와 재건되었다. 북인계 성향을 보이던 남계서원은 인조반정 이후 자구책으로 남인계 서원으 로 바뀌어 갔다. 별묘를 세워 강익, 鄭蘊, 兪好仁을 모셨다가, 숙종대 남인정권 에 힘입어 강익과 정온의 위패를 남계서원의 배향으로 올렸다. 하동 정씨들이 이인좌란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이후, 남계서원은 경원장 제 도를 채택하는 등 노론계 서원으로 기울어져갔다. 19세기에는 정여창 후손들이 별유사를 맡아 서원의 재정 운영과 건물 수리에 깊게 간여하고, 함양유림들과 협의 없이 묘정비를 세워 분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남계서원이 점차 문중서 원화되어 가는 가운데, 문묘에 모셔져 있는 정여창의 사액서원이라 하여 대원 군이 단행한 서원 철폐를 모면하고 존속할 수 있었다. 남계서원을 통하여 조선시대 서원은 양반 사림들의 교육기관으로, 당쟁의 여 론 기구로, 서원 후손들의 문중 기구로 성격이 변모되어 왔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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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林洞, 尋眞洞, 猿鶴洞 등 安義三洞은 예로부터 그 풍광이 아름다운 데다 뛰 어난 문인들의 자취가 서린 곳이기에 그 이름이 높았다. 심진동의 長水寺에는 노진이 젊은 시절 독서를 하였고 특히 <遊長水寺記>를 남겨 심진동의 이름을 후대에 길이 전해지게 하였다. 이 논문은 盧禛의 <遊長水寺記>를 중심으로 하 되, 杜慧의 <安陰長水寺與龍湫菴創修源流興廢錄>, 明察의 <安陰縣德裕山長水 寺大雄殿重營記>, 應允의 <德裕山尋眞洞記> 등의 새로운 자료를 통하여 장수 사의 역사를 밝혔다. 장수사는 나말여초 覺然이 창건하여 여말선초 無學이 중 창하였으며, 그 후 조선 초기 다시 朴習에 의하여 중창되어 그 집안의 원찰이 되었다. 그 후 1680년 화재로 장수사는 전소되고, 지금의 장수사 일주문이 있 는 곳으로 옮겨지었다. 1721년까지 건물이 하나씩 복원되어 大雄殿 외에, 八相 殿, 斗月寮, 滿月堂, 明鏡堂, 曺溪門, 天王門 등이 차례로 조성되었다. 또 1725 년 원래 장수사가 있던 자리에 용추암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역사를 가진 장수 사에 노진이 유람을 하고 <遊長水寺記>를 지어 세상에 그 이름을 널리 알렸다. 조선 후기에는 沈錥, 南公轍 등 뛰어난 문인이 장수사를 소재로 한 시문을 제작 하였다. 이러한 글로 인하여 장수사 일대의 아름다운 풍광이 오늘날까지 전하 게 되었다. 오늘날 장수사는 일주문만 남아 있고 근래에 세운 용추사가 그 명성 을 대신하고 있는데, 이러한 장수사를 빛낸 옛글을 통하여 장수사의 예전 모습 을 즐길 수 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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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해정변(인조반정, 1623)의 명분은 대개 廢母殺弟 등의 패륜 및 대북의 전 횡에 대한 다른 붕당들의 반발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정변이 성공한 다음날 반포된 반정교서에는 반정의 명분이 광해군의 背明親後金외교(43%), 폐모살제 (31%), 대북의 전횡(14%), 토목공사(10%) 등의 비중으로 발표되었다. 그렇다 면 반정 직후에 널리 강조되었던 외교문제가 이후에 어떻게, 왜 명분에서 사라 졌을까? 병자호란 때 인조는 직접 청 태종 앞에 나아가 叩頭禮를 행하며 항복하 였으며, 정묘호란 때에도 사실상 후금의 무력에 굴복하여 화친을 맺었다. ‘반정’ 을 한 지 4년 만에 그 핵심 명분 하나를 상실한 것이다. 이에 다른 명분인 폐모 살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記述들이 후대에 이르도록 사 실로 받아들여졌다. 그런가 하면, 폐모 논의에 가담하였던 북인계열 저자들은 폐모살제보다 권력의 전횡을 더 강조하는 경향이 뚜렷하였다. 폐모 논의에 참 여한 약점을 덮기 위해 폐모문제를 최대한 덮고, 그 다음 명분인 권력의 전횡을 강조한 것이다. 이렇듯 인조의 거사가 反正이라는 점에는 다들 동의하였으나, 어떤 亂에서 어떤 正으로 돌이켰는지에 대한 세부 문제에 있어서는 강조점이 시대에 따라, 또 저자의 정치적 배경에 따라 달랐다. 결국, 반정의 본래 명분에 대한 후대의 손질은 ‘반정’의 명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조선후기사회 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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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수와의 혼인이라는 혼속은 아시아・유럽・북부아프리카・아메리카 등 세계의 원주민 사이에 이루어졌던 혼속을 말한다. 인도나 일본의 소수민족 사이에는 최근까지도 위와 같은 혼속이 있었다고 보고되었다. 대완에서는 서조모와 혼인을 하였으며 흉노에서도 서모・형수・계수・며느리와 혼인할 수 있었다. 서역의 당항족은 백모・서모・형수・며느리와 혼인할 수 있고 돌궐에서는 후모・백숙모・형수와도 혼인할 수 있었다. 오・여진・몽골・부여 등에 서는 형수와 혼인하는 혼속이 있었다. 󰡔양서󰡕・󰡔남사󰡕・󰡔태평어람󰡕 등의 사서에 서는 고구려에서도 형수와 혼인하였다고 전한다. 형수와의 혼인이라는 혼속이 최초로 나타난 사서는 󰡔삼국사기󰡕이다. 고국천 왕이 뒤를 이을 아들 없이 죽자 우씨왕후는 시동생 연우와 통정하고 그를 왕위 에 앉히니 이가 산상왕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고국천왕 부분에 ‘立妃于 氏爲王后’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우씨가 고국천왕의 왕비가 되기 전에 이 미 ‘妃’였을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연나부의 명림씨 가문의 권세를 등에 업고 왕 후 우씨는 신대왕・고국천왕・산상왕・동천왕 등 4대에 걸쳐 왕후로 또는 왕태후 로 권세를 누렸다. 뿐만 아니라, 명림씨 가문의 대모 노릇까지 한다. 산상왕은 우씨로 말미암아 왕위에 올라 우씨를 왕후로 삼은 각시바치의 전형이다. 그러 나, 정치적 재능을 지녔던 산상왕은 연나부와 정략적 거리를 유지하며 진대법 을 실시하고 국상 을파소를 기용하는 등으로 연나부를 제어하였다. 산상왕과 우씨왕후 사이에 이루어진 형수와의 혼인 문제를 둘러싸고 당사자 인 산상왕과 우씨왕후는 물론 산상왕의 형제들인 발기・계수・고국천왕은 각기 다른 의식변화를 보여준다. 발기는 산상왕과 우씨왕후의 혼인을 역수와 천륜을 어긴 비례라고 하여 군사를 일으켜 싸웠으나 실패하고 만다. 산상왕의 명에 따 라 발기를 정벌하러 나섰던 계수도 산상왕이 국양하지 않은 것을 불의라고 하 면서도 남의 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종국을 멸망시키려 한 발기의 행위 역시 죽 어서 선인을 볼 때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였다. 발기를 왕의 예로 장사 지낸 뒤 산상왕은 우씨왕후와의 사이에 뒤를 이을 아 들이 없으므로 소후를 얻겠다는 뜻을 비친다. 산상왕이 주통촌녀와 상관한 것 을 안 우씨왕후는 질투하여 병사를 보내 주통촌녀를 죽이려고 한다. 이 과정에 서 주통촌녀의 유체가 자신의 후사임을 확인한 산상왕은 이를 우씨왕후에게 말 하여 주통촌녀에 대한 우씨왕후의 횡포를 제어하고 주통촌녀를 소후로 삼은 다 음 아들 교체를 태자로 봉하니 이가 동천왕이다. 산상왕의 의식은 다분히 정치 적이고 정략적이다. 왕의 아이를 임신한 주통촌녀를 병사를 보내 죽이려 한 투 기 죄를 짓고도 우씨왕후가 무사했던 것으로 보아 왕후와 연나부의 권력이 산 상왕을 능가했던 것 같다. 우씨왕후는 죽을 때 스스로의 행위를 첩실행이라고 부끄러워하면서 신하들에 게 자신을 구렁에 버리지 못하겠거든 산상왕릉 곁에 묻어 달라고 유언한다. 이 미 죽은 고국천왕은 무당의 입을 빌어 우씨왕후의 행위를 낯이 뜨거워 백성을 볼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산상왕과 우씨왕후의 혼인문제를 놓고 권근・서거정・안정복・최 보 등이 천륜을 어긴 수혼이라고 비판하였다. 󰡔경국대전󰡕과 󰡔증보문헌비고󰡕에 서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첩이나, 백모나 숙모, 형수나 계수와 혼인한 자를 극 형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까지 형수와의 혼인이라는 유습 이 남아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