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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연구 KCI 등재 The Nammyonghak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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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제27권 (2009년 6월) 13

1.
2009.06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한국유학사에서 면우 곽종석이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학문과 사상, 그리고 현실 대응 등 그의 삶과 학문 전반에 대해 폭넓게 살폈다. 곽종석은 조선 말기로부터 일제강점기에 간재 전우와 함께 조선유학의 쌍벽으 로 추앙을 받았다. 그는 학통과 당색에서 완전히 초탈하지는 못했지만 일생을 융합주의 신념 아래 살았다. 그는 평생에 걸쳐 퇴계학과 남명학을 아우르고 영 남학파와 기호학파를 넘나드는 등 보폭 넓은 활동을 하였으며, 유림을 세력화 하고 대동단결하는 데 힘썼다. 그의 학문 특성은 ‘집약’과 ‘會通’에 있다. 여러 학자들의 학설을 종합한 뒤 자기의 관점에서 다시 체계화하였으며, 연구방법론 에서도 여타의 학자들과는 확연히 비교가 되었다. 곽종석은 전통과 근대 사이에서 가교적 구실을 하였다. 그의 개명적이고 시대 를 앞서가는 안목과 시대인식은 후학들에게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문하에서 배출된 수많은 문인 제자들은 철학․종교․교육․역사학 및 독립운동 여러 방면에서 큰 구실을 하였다. 유학사상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전통의 근대적 계 승을 위해 신학(서구사조)에 대해서도 폭넓은 이해를 가졌던 곽종석의 학문관, 학문 방법은 후학들에게 계승되었고, 전통 학문의 근대적 계승을 위한 방법을 모색하도록 방향성을 제공하였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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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俛宇 郭鍾錫(1846-1919)의 󰡔大學󰡕 해석 중 특히 ‘明德’에 대한 해석 및 그와 관련해 다른 사람과 논쟁한 것을 중심으로 그 설의 특징과 의미를 논한 것이다. ‘明德’에 대해, 기호학파 洛論은 本然之氣로 보고, 湖論은 心의 光明處 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데, 이는 모두 心卽氣의 입장을 전제로 한 것이다. 반 면 嶺南學派는 朱子가 心統性情으로 해석한 것에 근거하여 心合理氣의 관점에 서 理를 위주로 해석하였다. 19세기 퇴계학파의 정맥을 이은 柳致明은 명덕을 氣淸理徹이라 하였는데, 그 의 문인 朴致馥은 ‘주자 이래 相傳한 嫡訣이라’ 하였다. 유치명의 견해는 명덕을 心合理氣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그런데 李震相의 心卽理를 위주로 하는 학자 들은 氣를 겸하여 논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이런 점에서 郭鍾錫의 설도 마찬가 지이다. 그런데 곽종석은 󰡔대학󰡕 삼강령․팔조목의 논의구조에 나아가 明德과 心을 엄 격히 다른 것으로 변별함으로써 하늘에서 얻은 心之本體를 가리킬 뿐만 아니 라, 行事를 통해 얻어지는 孝忠恭重 등까지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 점이 스승 이진상의 설 및 동문들의 설과 변별되는 가장 특징적인 점으로, 동문 들과 논쟁한 핵심 사안이었다. 그는 명덕을 선험적인 본원은 물론 후천적인 경 험을 모두 아우르는 것으로 보았는데, 이는 丁若鏞이 후천적 경험만을 중시한 것과도 일정 부분 연관성을 갖는다. 대체로 19세기 主理論者들이 主宰性을 강조하기 위해 본체․본원을 강조하고 있는데 비해, 곽종석은 행사를 얻어지는 實得을 모두 명덕에 포함시키고 있어 主宰性과 아울러 實用性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다른 학자들과 변별되는 점이 다. 이런 점에서 그의 체용론은 본체에 치중하지 않고 該體用의 논리를 갖고 있 다 하겠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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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우 곽종석은 한주 이진상의 학설을 이어 받아 조선 말 최대의 학파라고 일 컬을 수 있는 한주학파를 선두에 서서 이끌면서 ‘개명한 도학자’로서 일생을 살 았다. 곧 그는 이진상의 竪看·橫看·到看의 三看法과 理發一途說, 心卽理說을 계 승하여 옹호하고, 이진상이야말로 공자와 맹자, 주자, 이황을 정통으로 계승하 였다고 주장하였다. 한주학파의 리발일도설과 심즉리설의 핵심은 심과 그 속에 있는 리의 주재성을 확보하여 주체에 철학적 무게를 실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작업은 단순히 이론적 영역에서만 머물지 않고, 가까이로는 어려운 시 기 도학자로서 삶을 살아가는 데 긴요한 것이었으며, 나아가서는 눈앞의 현실 을 인식하고 참여하는 데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쳤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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布告天下文(이하, 포고문)은 1896년 2월 7일 재야 유림인 郭鍾錫이 姜龜相, 尹冑夏, 李承熙, 張完相, 李斗勳과 함께 서울에 있는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 의 공사관에 일제의 국권 침탈에 대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발송한 서한이었 다. 본 논문은 당시 곽종석이 지역 유림의 비난을 예상하면서도 유교적 세계관 인 華夷論에서 夷狄으로 이해되던 구미열강에 도움을 호소한 이유가 무엇이었 는가를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곽종석의 문집인 󰡔俛宇集󰡕에 수록된 1895~1896년 편지들을 분석 했다. 󰡔면우집󰡕에는 편지가 다량 수록되어 있어 곽종석의 사상과 행적을 파악 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1895~1896년의 편지는 대개 곽종석이 1895년 12월 안동의병에 불참하게 된 배경과 1896년 2월 구미열강의 공사관 에 도움을 호소하는 서한을 보낸 배경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필자는 곽종석이 포고문을 발송한 경위를 일제의 국권 침탈을 강력히 규탄함 과 동시에 아관파천 이후 고종집권세력에 대해 지지 의사를 표시하고, 유교문 화를 수호하겠다는 강고한 의지를 표명한 데에서 찾고자 했다. 포고문 발송은 고종집권세력과 정치적 공감대를 확인하고 아관파천 이후 조성된 정국에 지지 를 표명하기 위해 진행한 행위라는 점에서 정치적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곽종석의 포고문 발송에는 사상적인 목적도 개재되어 있었다. 즉 포고문은 유 림 지도자로서 1894, 1895년 두 차례의 ‘개혁’을 통해 유교문화가 급격히 쇠퇴 하는 상황에 직면하여 유교문화의 붕괴를 막아야 한다는 위기의식과 소명의식 을 반영하였다. 본 논문은 곽종석이 1895~1896년 의병운동 제의를 거절하면서도 구미열강 의 공사관에 포고문을 발송하는 데에는 적극적이었던 정치적, 유교적 배경을 이해하고, 곽종석이 1919년의 巴里長書運動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상황을 이해 하는데 하나의 단서를 제공하리라 판단된다. 1896년의 포고문과 1919년의 파 리장서에는 20여 년의 시간적 간극과 사상적 차이가 있었지만, 유림의 지도자 로서 유교문명의 붕괴를 막아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상호 유사했기 때문이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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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俛宇 郭鍾錫의 漢詩에 부조된 지리산의 형상을 조명한 것이다. 논의는 곽종석이 경상우도의 지역적 기반을 가진 지식인으로서 지리산과 南冥 曺植을 어떻게 인식하였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곽종석은 학통으로는 퇴계학파에 속하는 일원이었으나 19-20세기 경상우도 의 학풍에 대응하여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을 함께 존숭하는 태도를 취했다. 다 만 본고에서 곽종석의 시문 중 지리산 한시로 대상을 제한한 까닭은 ‘남명학파 의 계승과 발전’이라는 기획주제에 부응하기 위함이었다. 남명 조식의 만년 강 학처였던 지리산 덕천 일대를 방문하고 쓴 곽종석의 기행시는 다분히 남명학과 의 연장선상에서 진단해야 진가가 드러날 수 있는 자료라고 판단했다. 실제로 29부터 33세 상간에 지리산을 방문하고 남긴 곽종석의 한시는 남명 조식과의 정신적 교감이 정서적인 축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는 29세부터 33 세까지 수차례 지리산을 방문하면서 「入德門賦」를 비롯하여 「頭流記行二十五 篇」, 「後頭流記行三十篇」이라는 연작을 남겼거니와, 이 일련의 작품 속에는 남 명 조식을 추념하고, 도학의 맥락을 구성하려는 정신적 경향이 농후하였다. 이 에 본고는 「入德門賦」를 통하여 곽종석의 지리산 기행이 지닌 의미를 탐색하였 으며, 2차에 걸친 頭流記行 연작을 통해 그의 한시에 투영된 巡禮山水志로서의 성격, 看山看水 看人看世의 雙觀的 경향, 朱子에서 南冥으로 이어지는 道學區 구축의 성향을 조명할 수 있었다. 본고에서 간추린 이러한 성격들은 남명 조식에 대한 19-20세기 경상우도 지 식인의 지적 풍토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으며, 덕천 일대의 지리산이 어떤 상징적 의미를 축적하게 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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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그동안 지금까지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俛宇 郭鍾錫(1846- 1919)의 傳 6편을 검토하여 본 것이다. 면우는 文에서의 道의 중요성을 절실히 인식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문의 역할 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문과 도는 구분될 수 없다고 본 그는 이들을 하나로 묶는 사람의 역할을 중요시 했다. 문의 목적을 明道에 두어 문은 義理에 근본하 여야 한다고 보았다. 「李德敏傳」은 25세(1870)에 지은 작품으로 忠毅膽略을 지녔으나 때를 만나 지 못해 능력을 펼치지 못한 인물인 이덕민을 칭송하고 한편으로 안타까워했 다. 이덕민의 󰡔梅溪集󰡕을 수용하면서도 작가적 솜씨를 발휘해 이덕민의 인물됨 을 효과적으로 형상화시켰다. 논평에 면우의 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河孝子傳」은 58세(1903) 때의 작품으로 효자 河達圭의 14세 때의 행적을 주로 다루면서 감동을 통해 남을 변화시킬 수 있는 효성의 힘을 강조했다. 69세 (1914) 때 지은 「金孝子傳」은 金致明을 입전대상으로 하였다. 奇異事가 나타나 는데 일의 결정의 기준을 부모의 뜻에 두는 김치명의 효심을 드러냈다. 60세 (1905) 때에 宋義用의 婦인 密陽 朴氏를 입전한 「宋烈婦傳」에는 군자도 행하기 어려운 道를 행한 烈婦에 대한 기림과 당시의 세태에 대한 한탄이 나타나 있다. 69세에 지은 「洪烈婦傳」은 주인공의 身體 毁損 사실이 나타나며 평결부가 길다. 주인공의 자결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른 부득이한 행위였음을 강조하였다. 「殷孺人傳」은 68세(1913) 때의 작품으로 입전대상은 咸昌의 선비인 金啓烈 의 妻 幸州 殷氏이다. 면우는 門人인 殷氏의 長男 基浩를 통해 은씨에 대한 정 보를 습득하였다. 주인공이 여자의 몸이었음에도 士君子의 德을 지녔음을 나타 냈다. 賢母良妻의 전형인 주인공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등장 인물의 發話가 빈번히 나타난다. 면우 전의 특징은 評結部에서 論評이 두 번 행해지는 점이다. 이는 총 6편 중 4편에서 나타난다. 논평 1에는 주인공의 행적에 대한 칭송이, 논평 2에는 작가 의 사상․창작관 등이 나타나 있다. 기존 전의 결말부에서 행해지던 논평의 예를 수용하면서도 논의를 확대할 수 있는 방편으로 또 한 번의 논평을 하여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담았다. 면우는 傳을 통해 당시의 사대부의 각성을 촉구했다. 또 한 윤리가 무너진 현실도 인간의 실천적 노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의미에서 사물의 변치 않는 道를 중요시했다. 그는 孝烈 등의 행위는 남의 인정의 여부와 관계없이 고귀하다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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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a representative of Mountain culture, Mount Tai’s description and discussing can be dated from pre-qin dynasty, bloomed in Ming and Qing Dynasties. But its beginning of entering Modern Academic Visual Field started from the Twentieth Century. This dissertation made three analyses on the Retrospect and Prospect of Mount Tai Cultural Studies: The first part, made a brief retrospect of Mount Tai Culture of the Twentieth Century; The second part, mainly commented on Mount Tai Culture Research Results of the Twentieth Century; The third part, prospected the Mount Tai cultural orientation and topic sele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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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은 중국 산악문화의 으뜸으로서, 태산에 관한 기록은 선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명․청대에 이르러 성황을 이룬다. 하지만, 학계에서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진입한 후이다. 본고는 태산문화연구의 회고와 전망을 3장으로 나누어 시론하였다. 1장에서는 20세기의 태산문화연구를 회고하고, 2장에서는 신세기 이후의 태산문화연구의 성과에 대해 정리하였으며, 마지막 3장에서는 앞으로 전개할 태산문화연구의 방향과 계획에 대해 기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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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青藏高原東緣有一高山縱谷地帶﹐藏﹑羌﹑漢族居住於此。由於高山﹑河谷將人類 居地分割成一個個的獨立生態區﹐因此為了標記﹑維護各個村落人群的資源領域及 其邊緣﹐“山神” 成為一種普遍的人群認同標誌與信仰。對本地人來說﹐一層層由小 而大的山神﹐護衛由近而遠一層層的人群資源邊界。 不只如此﹐受漢﹑藏文化影響﹐本地較高層的山神被納入漢藏文化中的 “名山” 體系 之中。這些青藏高原東緣人群熟悉的 “名山”﹐如漢文化中的 “峨眉山”﹐藏文化中的 “墨爾多神山”。本文介紹﹑探討青藏高原東緣岷江流域藏﹑羌族的山神信仰﹐以及它 們如何與漢﹑藏文化中的神山信仰結合﹔我也將說明山神與神山信仰在人類經濟﹑社 會﹑宗教生活中的意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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青藏高原 동쪽 언저리를 따라 솟아있는 고산 縱谷지대에 藏族, 羌族, 漢族이 거주하고 있다. 높은 산과 계곡 때문에 각 집단들의 거주지가 각각 독립된 생태 구역으로 분리되어 있어 각 집단의 자원영역과 그 경계를 표시하고 보호하기 위해, “山神”이 각 집단을 구분하는 일종의 표식과 신앙이 되고 있다. 원주민들 은 크고 작은 여러 산신들이 가까운 곳에서 먼 곳까지 각각의 집단자원경계를 지키는 것으로 여긴다. 이 뿐만 아니라, 漢藏문화의 영향을 받아 본 지역의 지위가 비교적 높은 산신 들이 漢藏문화 중의 “명산(예를 들어 한족문화 중의 ‘峨眉山’이나 장족문화 중 의 ‘墨爾多神山” 체계 속에 포함되어 있다. 본 논문은 青藏高原의 동쪽주변의 민강유역 藏族, 羌族의 산신신앙을 연구하여 그들이 어떻게 漢.藏族문화 중의 신산신앙과 결합시키는지를 소개하였다. 아울러 산신과 신산신앙이 인류경제 와 사회, 종교생활에서의 의의를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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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신앙(富士信仰)은 에도(江戶)시대 후기에 에도와 관동(關東)지역에 있었 던 대표적인 서민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후지강(富士講)의 원류가 된 후지신앙 은 修驗道系의 廻國修行者였던 角行藤佛을 시조로 전개됐다. 본 논문에서는 寬保 2년(1742) 9월부터 享和 2년(1802) 7월까지 있었던 후 지강 단속령을 검토하였다. 그리고 막부의 이러한 단속 정책이 후지신앙의 어 떠한 실태를 반영한 것인가? 후지산 北口師職에게는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등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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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 말기에 서인순과 권도용이 창작한 「천령악부」의 내용과 특징을 처음으로 검토하여 소개하였다. 서인순의 「천령악부」20수는 칠언절구 연작시 형태로 구성된 것으로, 함양 지방의 유적지와 명승지를 집중적으로 읊은 죽지 사 계열의 작품이었다. 권도용의 「천령악부」50수는 이동양의 악부시를 참고하 여 창작한 것으로, 작품의 구성방식이나 형식 등이 조선후기 영사악부과 동일 한 계열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은 기존의 죽지사나 영사악부와 크게 다른 특징을 드러내었 다. 서인순의 작품은 민풍습속보다 지방관의 행적을 중시하고, 비판정신보다 지방민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고자 하였으며, 작품의 서사적 배경보다 작자의 현 재적 감회를 충실하게 드러내어, 죽지사 다운 특징이 크게 약화되는 현상을 보 여주었다. 권도용의 작품도 함양 지방에서만 작품 소재를 찾고, 이를 시간 순서 에 따라 정리하지 않은 점이 기존 영사악부와 크게 달랐다. 이런 점은 죽지사와 유사한 특징인데, 작품의 소재 선택이나 서술 시각은 죽지사와도 또 달랐다. 민 풍습속보다 모범적인 삶을 중시하고, 충 효 열 등 유교적 덕목을 강조하였으며, 비판과 고발보다 교훈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 그런 점이다. 이처럼 서인순과 권도용의 「천령악부」는 죽지사와 영사악부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실상에 있어서는 크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변화는 한국 악부시의 말기적 창작 실상을 보다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도 록 해준다는 점에 중요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변화의 방향이 악부시의 고유한 가치를 상실하는 쪽으로 귀결되었던 점에서는 한계 또한 분명한 작품이었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