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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布告天下文(이하, 포고문)은 1896년 2월 7일 재야 유림인 郭鍾錫이 姜龜相, 尹冑夏, 李承熙, 張完相, 李斗勳과 함께 서울에 있는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 의 공사관에 일제의 국권 침탈에 대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발송한 서한이었 다. 본 논문은 당시 곽종석이 지역 유림의 비난을 예상하면서도 유교적 세계관 인 華夷論에서 夷狄으로 이해되던 구미열강에 도움을 호소한 이유가 무엇이었 는가를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곽종석의 문집인 󰡔俛宇集󰡕에 수록된 1895~1896년 편지들을 분석 했다. 󰡔면우집󰡕에는 편지가 다량 수록되어 있어 곽종석의 사상과 행적을 파악 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1895~1896년의 편지는 대개 곽종석이 1895년 12월 안동의병에 불참하게 된 배경과 1896년 2월 구미열강의 공사관 에 도움을 호소하는 서한을 보낸 배경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필자는 곽종석이 포고문을 발송한 경위를 일제의 국권 침탈을 강력히 규탄함 과 동시에 아관파천 이후 고종집권세력에 대해 지지 의사를 표시하고, 유교문 화를 수호하겠다는 강고한 의지를 표명한 데에서 찾고자 했다. 포고문 발송은 고종집권세력과 정치적 공감대를 확인하고 아관파천 이후 조성된 정국에 지지 를 표명하기 위해 진행한 행위라는 점에서 정치적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곽종석의 포고문 발송에는 사상적인 목적도 개재되어 있었다. 즉 포고문은 유 림 지도자로서 1894, 1895년 두 차례의 ‘개혁’을 통해 유교문화가 급격히 쇠퇴 하는 상황에 직면하여 유교문화의 붕괴를 막아야 한다는 위기의식과 소명의식 을 반영하였다. 본 논문은 곽종석이 1895~1896년 의병운동 제의를 거절하면서도 구미열강 의 공사관에 포고문을 발송하는 데에는 적극적이었던 정치적, 유교적 배경을 이해하고, 곽종석이 1919년의 巴里長書運動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상황을 이해 하는데 하나의 단서를 제공하리라 판단된다. 1896년의 포고문과 1919년의 파 리장서에는 20여 년의 시간적 간극과 사상적 차이가 있었지만, 유림의 지도자 로서 유교문명의 붕괴를 막아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상호 유사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