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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연구 KCI 등재 The Nammyonghak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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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권 (2018년 3월) 9

1.
2018.03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제문이 가지는 특성에 주목하여 南冥 曺植(1501-1572)의 제자들이 지은 11편의 제문을 분석한 것이다. 이 작업을 통해 남명의 제자들이 문하에 나아간 때는 언제이며, 당시에 그들이 저마다 받은 각별한 가르침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았다. 11편의 제문에 드러난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오건은 1551년에 남명의 문하에 나아갔으며, 자신이 스승에게 받은 특별한 가르침을 ‘공부하는 방법’과 ‘때를 알아보는 의리’로 함축했다. 정인홍은 남명의 교육은 책을 잡고 읽는 강학이 아니라 제자들의 정신을 깨우쳐 스스로 터득하도록 하는 방법이었다고 술회했다. 김우옹은 남들보다 백배 천배 노력하라는 말씀, 출처에 관한 경계, 성성자를 전해 받은 일, ‘雷天’ 두 글자의 훈계 등을 남명에게 받았으며, ‘서리 내린 소나무와 눈 쌓인 측백나무’처럼 어떠한 어려움에도 자신을 간직하라는 장려를 입었다. 정구는 남명이 6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 밤낮을 이어가며 강학을 진행했는데도 지치는 기색이 없었다고 회고하며 스승이 제자들에게 얼마나 지극한 정성으로 가르쳤는지를 서술했다. 최영경은 그 어떤 가르침보다 남명이 가진 ‘깔끔한 맑은 기풍’에서 큰 배움을 얻었다. 하항은 남명의 교육 방법의 특징으로 일에서 비유를 취해 깨우치게 했다는 점을 특기했다. 이 기록을 통해 남명이 문장을 지을 적에만 비유적 표현을 많이 사용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도 적절하게 활용하여 깨닫도록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로는 스승의 모습을 봄날에 눈이 녹는 듯이 감화시키는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제신은 스승의 곁에서 오랫동안 지켜보았으므로, 그분의 언행이 일치한 것은 자신만이 안다고 확신했다. 류종지는 남명의 교육 방법을 ‘병통의 뿌리를 시원하게 도려내고 뒤이어 약을 처방하는 것’이라고 기억했다. 곽율은 남명이 제자들을 가르칠 적에 두 양단을 들어 남김없이 극진하게 말씀해주셔서 정성스러운 가르침에 감화를 입어 분발하게 되었다고 서술했다. 조원은 자신의 자질이 매우 부족했지만 정성스럽게 가르쳐주셨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선비[佳士]’로 장려해주신 일에 깊이 감격했으며, 가르침의 핵심을 ‘居敬窮理’라고 요약했다. 이러한 내용에 근거하여 두 가지로 그 의미를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제문의 작자들은 남명 문하에서 중요한 비중을 가지는 제자들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데, 남명이 산청의 산천재에 은거한 만년에 입문한 학자들이 다수를 차지한다는 점이 주목된다. 둘째, 남명은 절실한 비유에 의해 새롭게 각성시키는 것, 핵심 단어와 구체적인 형상을 통해 수양의 목표를 분명하게 제시하는 것, 자신이 살아온 삶에 근거해 학자가 추구해야 할 이상을 보여주는 것 등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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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재는 남명학이 완성된 곳이자 제자들과 강학한 본산이다. 산해정이나 뇌룡정과는 달리 산천재는 남명과 특별한 연고가 없는 곳에 지은 건물이다. 남명은 그 터를 잡기 위해 11번 이상 지리산의 이곳저곳을 답사하고서 결국 『주역』 「대축괘」의 뜻을 취하여 자리를 잡았으며, 동시에 지리산의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위치를 택한 것이기도 하였다. 남명의 주요 제자들은 대부분 산천재에서 배웠으며, 그 교육의 효과는 후일 임진왜란을 당했을 때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다. 수많은 제자들이 의병장으로 궐기하여 구국의 선봉에 섰기 때문이다. 산천재는 남명 사후 20년 만에 임진왜란으로 1592년 소실되었고, 225년 후인 1818년에 복원되었다. 산천재의 중건은 정조 때부터 있었던 남명 선양 사업의 결실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는 역사적으로 본다면 제2차 남명 선양사업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광해군 당시에 있었던 서원의 사액 및 영의정 추증 그리고 문묘종사운동이 제1차 선양사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산천재가 폐허로 남아 있던 시기 그곳을 지나간 인물들이 남긴 기록에서 우리는 경의검에 대한 새로운 정보 및 사성현유상과 남명 고택에 대한 정보도 접할 수 있었다. 남명이 손수 심었다는 소나무가 많이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1818년 복원한 산천재에서 약 반세기 후 1871년 덕천서원이 훼철되고 몇 년 뒤 곧 사성현유상을 모시고 남명을 배향하면서 채례를 계속 이어 나갔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용암서원이 훼철되고 1883년 무렵에 진행된 뇌룡정 중건과도 일맥상통 한다. 본고에서 살펴본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남명학의 계승과 선양사업이 시기별로 몇몇 열성 인사들에 의해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움직임에는 또한 늘 본손들 중에서도 정성을 기우리는 사람들이 동참하고 있다. 남명학파는 비록 그 세력은 미약했지만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고, 산천재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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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月川學團의 초기 성격을 살피기 위해 조목의 합천지역 교유인물과 조목에 대한 도산서원 종향 과정을 고찰한 것이다. 조목은 1598년 1월부터 2년 5개월 동안 합천 군수로 재임하면서 지역 학자들과 교유하였는데, 합천이 來庵 鄭仁弘의 지역적 기반이었던 만큼 정인홍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교유가 이루어졌으며, 특히 조목이 尤谷齋에서 『心經講錄』을 강학하면서 이 지역에 퇴계의 학문이 전수되기도 하였다. ‘조목과 정인홍 문인들의 친연성을 월천학단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였는가’하는 문제는 󰡔월천집󰡕 판본 비교를 통해 그 대략을 확인할 수 있다. 초고에 해당하는 필사본과 1666년 간행본의 내용을 비교‧검토해 보았을 때 필사본에 수록된 합천과 관련된 기록들이 간행본에는 모두 산삭되어 있었다. 더구나 간행본에는 남명을 추모하는 내용의 「聞曺南冥訃」가 산삭되고 정인홍을 강도 높게 비판한 「偶見仁弘南冥集跋語」가 수록되었다는 점에 주목하면, 간행본의 정리 과정이 정인홍과 그 문인들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에서 진행되었으며 이와 반대로 초기의 필사본은 수용의 입장에서 정리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한편 조목 사후에 그를 도산서원에 종향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啓請과 종향·배향에 대해 향촌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종향이 지연되다가 金中淸이 조정에 나아가 직접 啓請을 준비하면서 빠르게 추진되었다. 때문에 종향을 비판하는 일부 인사들은 대북파의 지원이 있었다고 의심했지만, 또한 그것을 확신하지는 못했다. 이 글에서는 대북파와 대립 없이 종향이 공론화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정인홍의 문인들과 친연성을 보이는 조목의 교유활동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정리하면, 조목 사후 초기에 조목의 문집을 정리했던 문인들은 조목과 정인홍 문인들과의 친연성을 수용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종향을 추진하여 대북정권 내에서 무리 없이 공론화 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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茅谿 文緯는 그의 『茅谿日錄』 끝부분에서 「義兵三將事蹟」이란 글을 실어 두었는데, 여기서의 義兵三將이란 鄭仁弘‧金沔‧郭再祐를 가리키는 말이다. 임진왜란 이후 200년 이상 지나는 동안 이들이 모두 남명 문인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송암 김면이 남명 문인일 뿐만 아니라 퇴계의 문인이기도 하다는 기록이 나옴으로 인해 의병활동의 분석과 의미 부여에 석연치 않은 변화가 일어났다. 필자 또한 변개된 자료를 보고 김면이 남명 문인이면서 퇴계 문인이라고 人名錄을 정리한 적이 있다. 그러나 두 차례 간행된 『송암실기』와 『송암유고』 및 『송암연보』, 樊巖 蔡濟恭이 찬술한 金沔 神道碑의 내용과 실제 신도비를 대조해 본 결과, 이들을 면밀히 검토하여 진실을 밝혀야겠다고 생각하여 본고를 집필하게 되었다. 송암 김면에 관한 전기자료는 모두 세 차례 간행되었다. 최초의 것은 1786년에 간행된 『松庵先生實紀』이다. 그 다음의 것은 1885년에 간행된 『松菴先生遺稿』이다. 세 번째는 1903년 이후에 간행된 『松庵先生實紀』이다. 작자 미상의 김면 家狀은 1786년에 간행된 초간본 『松庵實紀』에 실려 있다. 여기에는 “師事曺南冥先生”이라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책에 실린 洪重鉉 所撰 諡狀에 “遊南冥之門”이라 되어 있다. 이는 송암 김면에 관한 최초의 전기자료라는 점에서 가장 믿을 만한 기록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1885년에 간행된 再刊本 『松菴遺稿』에 실린 崔興璧 所撰 請諡疏와 蔡濟恭 所撰 神道碑에도 각각 “先正臣文貞公曺植之高弟”, “弱冠以南冥爲師”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1903년 이후에 간행된 三刊本 『松庵實紀』에는 家狀과 洪重鉉 所撰 諡狀이 빠지고 金演 所撰 祭文과 許傳 所撰 諡狀이 들어 있는데, 여기에는 각각 “從遊溪冥”, “早遊退溪南冥兩先生之門”이라 되어 있다. 崔興璧 所撰 請諡疏 末尾의 기록으로 보면 1885년 재간본 󰡔송암유고󰡕의 간행은 性齋 許傳 所撰 諡狀을 넣어 김면이 퇴계의 문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려고 한 것이었다. 이것이 여의치 않자 1903년 무렵에 다시 三刊本 『松庵實紀』를 간행하여 金演 所撰 祭文과 許傳 所撰 諡狀을 添入하였다. 이렇게 하여 김면이 퇴계의 문인이라는 점을 근거로 1914년 간행된 『陶山及門諸賢錄』에 登載하였다. 그러나 1916년에 『陶山及門諸賢錄辨訂』이란 책이 나와 퇴계의 문인이라 볼 수 없는 인물이 문인록에 들어 있음을 변정하였다. 『송암연보』는 이에 대응하기 위한 구체적 자료의 성격으로 만들어진 듯하다. 연보의 載錄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았고, 편찬자와 편찬시기도 전혀 밝혀져 있지 않다. 본론에서 필자는 『송암연보』의 경우 27개 조항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논술하였다. 이는 27개 조항이 이처럼 문제가 심각하니 나머지도 이미 알려진 것 이외에는 인용할 만한 근거 자료가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수많은 학자들이 논문을 쓰면서 김면이 퇴계의 문인임을 말하고, 이를 근거로 김면의 처신을 논술하고 있다. 김면이 퇴계의 문인이어야 더욱 훌륭하게 드러날 수 있다는 일부 후손의 생각이 이처럼 많은 오류를 생산하기에 이르렀고, 결과적으로는 세상 사람들에게 김면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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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제1차 진주성전투에 있어서 경상우도관찰사 김성일의 역할을 구명하기 위한 논고이다. 주지하다시피, 진주성전투는 진주목사 김시민 등이 혈투를 전개하여 진주성을 지켰던 승첩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때 김성일은 경상우도관찰사로사 김시민 등을 지휘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초유사로 활동하던 김성일은 경상좌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초유사직에 물러나 잠시 경상우도를 떠났다가 다시 경상우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그 사이에 개령, 성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이 거창 방면을 위협하고 있는 가운데, 부산 창원 방면으로부터 일본군이 진주성을 공격해 왔다. 경상우도 관찰사로 부임한 김성일은 최고의 지휘관으로서 탁월한 역량과 전술운용으로 진주성을 지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김성일은 진주목사 김시민 등을 주축으로 관군 중심의 수성체계를 구축하고, 진주성 외곽에 관군과 의병을 배치하여 구원하게 함으로써 진주성을 공격하도록하는 전략을 운영하여 진주성 방어력을 강화함은 물론, 분산전을 유도하여 일본군의 진주성 공격의 전력을 약화시켜 진주 수성군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아울러 포위된 진주성에 화살 등의 물자를 공급하여 줌으로써 전투력을 유지하고 군사의 사기를 높여주었다. 진주성 전투 직후 그는 거창 방면으로 쳐들어 오는 일본군에 대응하기 위하여 삼가로 달려가, 주변 지역의 관군을 거느리고 의병장 김면, 정인홍 등을 도와 이를 막아내었다. 이후 의병장 김면, 정인홍 등은 전라도 의병장인 최경회 임계영 등이 성주, 개령 지역의 일본군을 지속적으로 공격하여, 마침내대 다음해 2월 성주, 개령지역을 수복하였는데, 여기에도 관찰사로서 김성일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진주성전투의 승리는 경상우도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김성일의 전략과 진주성의 수성장이었던 김시민의 절묘한 전술운용, 그리고 각 전투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를 수행했던 제장과 사졸의 분전이 어우러진 값진 결과였다. 진주성 전투에서의 승리는 진주성을 지킴으로써 수만의 성내 관민의 목숨을 구한 것은 물론이고, 경상우도가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게 하였으며, 나아가 일본군이 호남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목을 차단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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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張顯光(1554-1637)의 『대학』 해석에 대해 기왕의 연구가 문집에 수록된 「錄疑竢質」만을 분석해 논한 것을 반성하고, 『역학도설』에 수록된 「大學圖」·「大學改正之圖」를 함께 분석하여 그의 『대학』 해석의 성취과정 및 특징을 밝힌 것이다. 장현광의 『대학』 해석은 세 단계로 성취되었다. 제1단계는 주자의 『대학장구』에 따라 해석하면서 權近·李滉 등의 설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그의 「大學圖」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대학도」는 주자의 「대학도」를 따르지 않고 권근·이황의 대학도를 수용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데 이황의 대학도보다는 권근의 대학도에 가깝다. 제2단계의 해석은 선유들의 『대학장구』개정설을 보고서 다시 「大學改正之圖」를 작성한 것이다. 이 「대학개정지도」는 권근·이황의 대학도와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만든 것이다. 특히 명명덕·신민 밑에 팔조목의 공부를 배열하고, 지어지선 밑에 팔조목의 공효를 나누어 배열한 것, 전 제4장의 청송장을 경문 맨 뒤로 옮기고, 경문 제2절·제3절을 뒤로 옮겨 순서를 바꾸어서 격물치지장으로 삼은 것, 전 제4장을 없앰으로써 전체를 經一章·傳九章으로 파악한 것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설은 이언적의 설과 유사하지만, 지어지선 밑에 팔조목의 공효를 배열한 것과 전 제1장·제2장의 논리구조를 端(本)-事-極으로 파악한 것 등은 그만의 독특한 설이다. 제3단계는 자신의 개정설을 다시 수정하여 『대학장구』개정설을 제기한 것으로, 「錄疑竢質」에 수록되어 있는 설이 그것이다. 이 설의 핵심은 격물치지장을 재구성한 데 있는데, 채청·이언적의 설을 수용하여 맨 앞에 ‘所謂致知在格物者’ 8자를 보충하고, 그 다음에 경문 제3절, 청송장, 경문 제2절을 배열하고 ‘此謂知本’을 ‘此謂物格’의 오자로 보아 수정하여 ‘此謂知之至也’와 함께 격물치지의 공효로 삼은 것이 특징이다. 장현광은 『대학』을 해석하면서 내용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탐구를 하였는데, 誠意章 ‘誠於中’을 주자 및 쌍봉요씨의 설과는 달리 선이 마음속에 가득 찬 것으로 해석한 것이 독특하다. 이러한 장현광의 설은 경학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첫째, 선유의 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문제의식을 키웠고 독자적인 시각으로 『대학장구』개정설을 제기하였다. 둘째, 「대학도」·「대학개정지도」 등을 작성하여 삼경령·팔조목의 공부와 공효에 대한 연관성을 보다 정밀하게 밝혔다. 셋째, 傳文은 經文을 해석한 것이라는 傳文釋經之法의 논리를 개발하여 전문의 논리적 흠결을 보완하였다. 넷째, 격물치지의 개념을 주자와는 다르게 정의하여 격물치지장의 논리적 정합성을 선명하게 하였다. 다섯째, 경문 제2절(知止而后有定……)의 知止·定·靜·安·慮·得을 새롭게 해석하여 팔조목과 연관시킴으로써 삼강령의 공효로 막연히 이해하던 해석을 명료하게 하였다. 여섯째, 誠意章의 ‘誠於中’을 善이 마음속에 가득한 것으로 해석하여 해석의 다양성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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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無何堂 洪柱元 한시의 내용과 형식의 특질, 그리고 표현방식의 특징적 면모에 대해 살펴보려는 것이다. 무하당 한시의 내용적인 특질로서는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輓詩가 다른 사람의 경우에 비해 훨씬 많다는 것과 내용과는 상관없이 형식상 특이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서는 대작이 많이 보이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만시는 다른 사람들의 문집에도 흔히 보이는 것이지만, 무하당의 경우 양적으로 많을 뿐만 아니라, 특히 국왕이나 왕비, 공주 등 왕실의 인물들에 대한 만시, 더 나아가서는 왕실과 관련이 깊은 여러 인물들에 대한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사람이 죽었을 때 지은 것 이외에 묘를 옮길 때 지은 遷葬輓詩도 제법 있음을 볼 수 있다. 대작은 고관대작을 위하여 지은 것도 있지만, 일반사대부나 혹은 아녀자들을 위하여 지은 것도 있다. 그리고 고관대작을 대신하여 지은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지만, 자신의 아우나 매형 등을 대신하여 지은 것도 있다. 누구의 대작인 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특히 자신의 매형인 李時述을 위하여 지은 것처럼 이름이 드러난 경우도 있다. 무하당 한시의 표현방식으로서의 특징으로는 첫째 대립적인 뜻으로 형성된 단어의 사용이 눈에 많이 띄며, 둘째는 한 인물을 용사하여 이끌어다가 씀에 있어 반복적일 뿐만 아니라 복합적으로 다양하게 사용하였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대립적인 개념어의 사용은 存亡, 存沒, 生死, 幽顯, 去住, 昇沈, 憂寧 등 특히 죽음과 이별에 당면하여 지은 시에 특히 많이 보인다. 이러한 표현방식은 서로 대척점에 있는 개념을 병렬하여 드러냄으로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뜻을 더욱 강하게 나타내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용사의 복합적인 사용은 晉나라 때의 문인 潘岳에 대한 용사에서 두드러진다. 반악은 한시에서 지방관을 하며 어머니를 板輿에 모시고 명승을 구경시킨 효자, 미모와 함께 32살에 일찍 센머리가 나 더욱 드러나는 老病, 河陽의 도리화로 대표되는 善政, 아내가 죽었을 때 지은 「悼亡詩」에 드러난 슬픔, 「秋興賦」에 드러난 가을의 서글픈 서정 등 여러 가지 면모로 복합적으로 드러난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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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서는 조선초기부터 도성 내외와 연해지역에 禁山을 설정하고 禁松정책을 취했다. 한편 민간이 山林을 사적으로 점유해 이용하는 것도 허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 서민에게는 그 기회가 별로 없었고, 그 대상은 주로 양반층이었다. 국가의 禁山정책에도 문제가 많았다. 따라서 일반 서민들에게도 수목 채취를 어느 정도 보장하는 다른 대책이 필요했다.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숙종 21년 당시 민간에서 시행되고 있던 禁松契를 참조해 마을마다 금송계를 만들어 스스로 금송활동을 하게 하는 조치를 충청도에 시험적으로 시행해 보기도 하지만, 이후 국가에서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시행하는 조치는 없었다. 다만 조정에서 여러 차례 논의가 이루어져 금송계 문제가 부각되고, 또 일부 관리들이 작성한 牧民書에 이런 방안이 소개되면서, 금송계가 전국적으로 점차 확산된 것 같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마을마다 금양의 경계가 지워져 마을 단위로 禁養하고 採樵하는 관행이 점차 일반화되어 간다. 이런 추세 속에서 禁養權과 그 경계를 둘러싸고 양반층과 사찰, 그리고 금양처를 새롭게 마련해 가던 마을 간에 갈등이 생기게 된다. 이런 갈등 상황에 직면하여 양반층은 마을과 연대하여 금송계를 결성·활용하는 방법을 적극 모색하였다. 이런 금송계는 사족이 주도하면서도 주민이 함께 화합하고 채초문제를 잘 해결해 가려는 것이었지만, 일부 금송계에서는 양반층의 입지가 약화되고 서민들의 입지가 강화되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금양경계를 둘러싼 마을 간의 다툼도 적지 않았다. 산송이 계속되면서 관에서는 애매했던 경계를 좀 더 분명히 하고 소송 당사자 간의 권리를 좀더 구체적으로 조정하고 구분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처럼 사족, 사찰, 마을 간에 금양권과 그 경계를 둘러싸고 갈등이 생기는 것은 산림 중에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은 공한지가 있었다거나, 또 금양경계가 분명하게 처리되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것에서도 연유한 것 같다. 또 금양처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여 생존권 차원에서 다른 마을과 채초를 둘러싸고 갈등을 벌이는 마을도 있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금양권 확보를 위한 마을 간의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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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天主歌辭와 反天主歌辭인 闢衛歌辭를 대상으로 가사 작품의 어조와 서술 방식을 분석하여 조선조 후기 가사의 흐름을 살피고자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박해를 당하기 이전의 작품들이기에 신앙을 지키고자 하는 처절한 절규나 교리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깨우치기보다는 천주교 신앙의 가장 근본이 되는 내용을 유교의 이념과 덕목에 견주어서 표현하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조선 사회는 성리학이 지닌 모순을 뛰어넘기 위한 대안으로 실학을 등장시켰으며,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학과 과학 문명은 조선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조선 사회의 기초가 흔들리고 민중들의 불만이 표출되면서 천주교의 평등사상은 보통 사람들에게 환영받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과 맞물리면서 조선조 후기에 모습을 드러낸 종교가사로서의 천주가사는 가사문학의 하위갈래이며, 가사라는 양식을 문학적 토양으로 하여 창작되었다. 18세기말 조선이라는 특수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낯선 사상이 낯익은 노래 양식과 만나서 내용상으로는 논증의 과정을 거치며 창작된 것이 18세기 말의 天主歌辭와 闢衛歌辭 작품이다. 이들 가사 작품은 작가 자신이 겪은 체험을 불러내어 새로운 공감의 장을 만들기도 하고 나누기도 했다. 문화 융합의 관점에서 볼 때, 천주가사가 지닌 내용들은 노래를 통해서 독자나 청자에게 체험을 나누며 긴장과 일치를 느끼게 하는 역할까지도 해내고 있다. 천주교의 핵심 교리를 짧은 노래로 전하려 했던 「天主恭敬歌」와 구약성서 십계명의 가르침을 토착 언어와 서민들의 일상을 바탕으로 표현했던 「十誡命歌」, 「天主恭敬歌」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지었던 「警世歌」를 꼼꼼하게 살피는 것은 조선 후기 가사 작품의 본질을 찾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본다. 또한, 闢邪衛正을 주장하며 五倫歌의 짜임에 따라 조목조목 천주교의 가르침을 비판했던 「尋眞曲」과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철학적 사유의 과정을 이야기로 풀어나갔던 「浪遊司」는 유학자의 입장에서는 금수만도 못한 천주교의 도리를 비판적 시각으로 표현하고 있다. 천주가사는 유학자들의 미의식이 반영되었던 사대부 가사가 지니고 있는 군주에 대한 생각과 이념을 천주로 대체하여 전통 양식에 새로운 종교적 가치와 이념을 담은 문학작품이다. 가사작품의 어조와 서술방식을 분석하면서 얻은 결과는 시가문학의 본질이자 가사의 본질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어떤 방식으로 공유되고 확장되었느냐하는 데 대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는 데서 논의를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