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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天主歌辭와 反天主歌辭인 闢衛歌辭를 대상으로 가사 작품의 어조와 서술 방식을 분석하여 조선조 후기 가사의 흐름을 살피고자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박해를 당하기 이전의 작품들이기에 신앙을 지키고자 하는 처절한 절규나 교리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깨우치기보다는 천주교 신앙의 가장 근본이 되는 내용을 유교의 이념과 덕목에 견주어서 표현하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조선 사회는 성리학이 지닌 모순을 뛰어넘기 위한 대안으로 실학을 등장시켰으며,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학과 과학 문명은 조선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조선 사회의 기초가 흔들리고 민중들의 불만이 표출되면서 천주교의 평등사상은 보통 사람들에게 환영받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과 맞물리면서 조선조 후기에 모습을 드러낸 종교가사로서의 천주가사는 가사문학의 하위갈래이며, 가사라는 양식을 문학적 토양으로 하여 창작되었다. 18세기말 조선이라는 특수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낯선 사상이 낯익은 노래 양식과 만나서 내용상으로는 논증의 과정을 거치며 창작된 것이 18세기 말의 天主歌辭와 闢衛歌辭 작품이다. 이들 가사 작품은 작가 자신이 겪은 체험을 불러내어 새로운 공감의 장을 만들기도 하고 나누기도 했다. 문화 융합의 관점에서 볼 때, 천주가사가 지닌 내용들은 노래를 통해서 독자나 청자에게 체험을 나누며 긴장과 일치를 느끼게 하는 역할까지도 해내고 있다. 천주교의 핵심 교리를 짧은 노래로 전하려 했던 「天主恭敬歌」와 구약성서 십계명의 가르침을 토착 언어와 서민들의 일상을 바탕으로 표현했던 「十誡命歌」, 「天主恭敬歌」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지었던 「警世歌」를 꼼꼼하게 살피는 것은 조선 후기 가사 작품의 본질을 찾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본다. 또한, 闢邪衛正을 주장하며 五倫歌의 짜임에 따라 조목조목 천주교의 가르침을 비판했던 「尋眞曲」과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철학적 사유의 과정을 이야기로 풀어나갔던 「浪遊司」는 유학자의 입장에서는 금수만도 못한 천주교의 도리를 비판적 시각으로 표현하고 있다. 천주가사는 유학자들의 미의식이 반영되었던 사대부 가사가 지니고 있는 군주에 대한 생각과 이념을 천주로 대체하여 전통 양식에 새로운 종교적 가치와 이념을 담은 문학작품이다. 가사작품의 어조와 서술방식을 분석하면서 얻은 결과는 시가문학의 본질이자 가사의 본질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어떤 방식으로 공유되고 확장되었느냐하는 데 대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는 데서 논의를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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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산천재는 남명학이 완성된 곳이자 제자들과 강학한 본산이다. 산해정이나 뇌룡정과는 달리 산천재는 남명과 특별한 연고가 없는 곳에 지은 건물이다. 남명은 그 터를 잡기 위해 11번 이상 지리산의 이곳저곳을 답사하고서 결국 『주역』 「대축괘」의 뜻을 취하여 자리를 잡았으며, 동시에 지리산의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위치를 택한 것이기도 하였다. 남명의 주요 제자들은 대부분 산천재에서 배웠으며, 그 교육의 효과는 후일 임진왜란을 당했을 때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다. 수많은 제자들이 의병장으로 궐기하여 구국의 선봉에 섰기 때문이다. 산천재는 남명 사후 20년 만에 임진왜란으로 1592년 소실되었고, 225년 후인 1818년에 복원되었다. 산천재의 중건은 정조 때부터 있었던 남명 선양 사업의 결실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는 역사적으로 본다면 제2차 남명 선양사업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광해군 당시에 있었던 서원의 사액 및 영의정 추증 그리고 문묘종사운동이 제1차 선양사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산천재가 폐허로 남아 있던 시기 그곳을 지나간 인물들이 남긴 기록에서 우리는 경의검에 대한 새로운 정보 및 사성현유상과 남명 고택에 대한 정보도 접할 수 있었다. 남명이 손수 심었다는 소나무가 많이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1818년 복원한 산천재에서 약 반세기 후 1871년 덕천서원이 훼철되고 몇 년 뒤 곧 사성현유상을 모시고 남명을 배향하면서 채례를 계속 이어 나갔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용암서원이 훼철되고 1883년 무렵에 진행된 뇌룡정 중건과도 일맥상통 한다. 본고에서 살펴본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남명학의 계승과 선양사업이 시기별로 몇몇 열성 인사들에 의해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움직임에는 또한 늘 본손들 중에서도 정성을 기우리는 사람들이 동참하고 있다. 남명학파는 비록 그 세력은 미약했지만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고, 산천재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