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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연구 KCI 등재 The Nammyonghak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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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권 (2004년 6월) 10

1.
2004.06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진주의 해주정씨는 17세기 이후 진주 지역의 대표적 가문 가운데 하나로 일컬어 져 왔다 이 논문에서 말하는 晉州 의 海州鄭民는 農園 鄭文孚(1565-1624)의 후손 및 농포의 아우 鄭文益(1568-1639)의 후손을 말한다. 농포의 두 아들 鄭大榮 (1586-1658)과 鄭大隆(1599-1661) 및 농포의 아우 鄭文益등 三叔姪이 어떻게 해서 진주에 정착하여 진주 지역의 대표적 가문이 되었으며,남명학파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진주 지역에서 이들이 가진 학문의 성향은 어떠한가 하는 점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진주의 해주정씨는 농포의 아우와 두 아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들이 처음 진주로 온 것은 避兵이 그 주된 목적이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전대의 혼인관계로 인 해 상속받았던 田莊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음도 또한 분명하다. 인조반정 이후에는 다시 서울 생활을 하려고 했었던 것 또한 확인되는 바였다. 그러나 농포가 李适의 난 이후 昌原府使시절에 지은 詠史詩로 인해 遊謀로 처형당하고,遺言 에 의해 그 아우와 아들들이 진주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부분은 좀 더 생각하게 하 는 점이 없지 않다. 광해군 시대 창원부사 시절의 詠史詩로 인해 반정 이후 인조 시대에 역모로 처형당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지금으로서는 자료가 부족하여 증빙하기 곤란하지만,이는 당시의 집권층이 농포가 광해군 시절 북인으로서 내암 정인흥과의 관 련이 적지 않았다고 보았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물론 농포로서는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 관련하여 환멸을 느끼고 자손들에게 정치적 은둔을 유언한 것이 아닌가 판단되는 것이다. 해주정씨가 진주에 정착한 초기에는 南冥學派를 영도하는 위치에 있던 謙齋 河弘度의 지우를 업어 남인으로 입지를 굳히는 듯하였으나,1665년을 전후하여 농포의 신원에 앞장섰던 澤堂 李植의 아들畏齋 李端夏에게 집지하는 인물이 나타나면서 서서히 노론화한 것이다. 그러나 노론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것은 경종때 남인으로부터 심각한 핍박을 받은 뒤 영조가 즉위한 이후 이에 대한 보복성 핍박을 남인에게 가함으로부터d였다. 이 일이 일어난 지 20여 년 후에 얼어난 宗川書院 禍變의 주동자가 이 가문에서 나옴으로써 남명학파를 주도하던 남인과의 관계가 극히 악화되었고,근가 지역의 노론 학자들로부터 학업을 전수함으로써 이 지역의 남명학파에 대해서는 상대 척으로 관심이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진주의 해주정씨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남인과의 관계도 대체로 나빴다고 할 수 있고,남명학파에 대한 관심의 정도 또한 보잘것없다고 할 수 있지 만,문집이나 유고 등을 남겼다는 이가 58 인이나 있다는 것은 학문에 대한 관심만큼은 여타 가문에 뒤지지 않으려 하였던 결과로 보인다. 남명학파라는 범위를 벗어나서 생각해 보면, 이와 같은 사실로 인해 해주정씨가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 경남 지역의 학문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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農圃 鄭文孚의 (1565-1624)는 서울에서 태어나,어려서부터 남다른 詩才를 보이며 성장하였다. 그는 7살 때 이미 「玉顔不及寒鴉色」이란 오언 고시로 시적인 재능을 드러내 보였고,8살때 지은 「初月」은 황진이의 詠半月로 와전되어 사람들 입에 널리 회자되었다. 그가 14세 되던 해에 陞補詩에 장원을 한 「月明花落又黃昏」은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科體詩로 明나라 사신에게 전해지기도 하였다. 그의 벼슬길은 1588년 甲科에 2등으로 급제하면서,이듬해 2월 承政院의 注書 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곧 이어 발발한 임진의 전쟁에서 그는 成慶道 北評事로써 관북 지방에 침략한 왜척들을 소탕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농포의 벼슬길은 순탄하였다. 중간에 몇 차례 집안의 喪으로 인해 참시 벼슬길에 물러나기도 하였지만, 영흥과 온성 · 장단 등의 부사와 걸주와 공주의 목사 등등을 역임하면서,사은부사로 중국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후 남원 부사를 지내던 중 형조참판에 제수되였으나 고사하다가,길주 목사를 끝으로 1613 년 49세의 나이로 그는 還鄕하였다. 농포는 이후 다시는 벼슬길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누차에 걸친 조정의 부름에도 끝내 응하지 않고,초야에 묻혀 일생을 마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무고에 연루되어 옥사하고 말았다. 농포는 문신으로써,우리의 역사에 빛나는 군공을 세운 몇 안 되는 인물이다. 농포의 시는 354수가 현전한다. 이 시들은 지극히 남성적인 체취와 여성적연 정감이라는 두 개의 큰 축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농포는 먼저 상당량의 古詩를 통해 일상에서 느끼는 所懷와 史實의 褒貶을 진득하게 기하면서, 남성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냐아가 文人畵창작에 직접 임하면서 선비다운 기개와 풍모를 닦고,그림과 시로 이를 내보였던 것이다. 농포의 섬세한 정감은 여성을 주제로 한 일반적인 시들과 題畵詩에서 드러난다 자신과 동등한 객체로써, 아름다운 미의 상징우로써 여성들을 직시하였다 그리고 티 없는 동심을 지닌 순수한 존재로써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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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庵 鄭栻의 은 1683(肅宗9)년에 普州 玉峯에서 태어났다. 字는 敬甫이고, 명암은 그 號이다. 明나라가 망한 것을 슬퍼하여 일생 동안 仕宦하지 않고 초야에서 포의로 지내다 일생을 마친 문학자이다. 그는 명나라를 숭상하는 인물 가운데서도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는 청나라는 미개한 오랑캐로 간주하여 철저하게 배척하여 인정하지 않았다. 명나라를 높은 학문과 찬란한 문화를 가진 중국 역사상의 正統 으로 인정하였다. 사람답게 사는 삶의 질이 높은 이상적인 국가로 명나라를 생각 하였다. 그래서 청나라가 지배하는 세상에 나가서 벼슬하는 것을 더럽게 생각하였 고, 어떻게 하면 중국 대륙에서 청나라를 섬멸하여 축출할까 하는 것이 일생의 話 頭였다 명암의 사상과 문학은 모두 이 화두에서 출발하였다. 그래서 그의 號마저도 明庵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의 고결한 정신자세는, 朝鮮의 伯夷叔齊라 일컬어 손색이 없다. 청나라가 중국을 통치하고 있던 시대에 태어나 살았던 明庵은, 名利를 초탈하여 명나라의 회복과 청나라의 축출을 염원하면서 한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스스로 포기하고서, 出處의 大節을 지켜 곧게 깨끗하게 艱苦한 삶을 영위하였다. 그는 선비 지식인으로서 국가의 운명에 무관심할 수 없였던 것이다. 伯夷叔齊이래로 이어져 온 선비의 節義사장이 이 시대상황에서 명암을 통해 體現 된 것이었다. 그의 시는 淸浮하고 肺腑한 서체에서 흘러나온 것이기에 읽는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詩想이 다채롭고 진지하고, 표현의 기볍도 독창적이라 이전의 시를 답습한 것이 아니고, 아주 逼眞하게 사물을 묘사하였다. 언어를 다루는 기술이 섬세하여 그의 시는 내용적으로 뿐만 아니라 文藝的으로 성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산문 가운데는 「矗石樓重修記」, 「義嚴碑記」등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던 글이 있지만, 문학적으로 가장 뛰어난 글은 여러 종류의 遊山錄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유산록은 산수문학의 典範으로서 韓國漢文學史에 등장시킬 가치가 있 다. 本考에서는 지금까지 학계에 소개된 척이 없였던 明庵 鄭栻의 의 생애와 그의 詩文學의 독특한 면모를 밝혀, 韓國漢文學연구의 지평을 확대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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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賣認識,現實對應, 胡論,洛論,A物性同異論爭,南冥學,外柔內剛,春秋義理,衛正斥邪,內修外壞, 이 글은 한말 儒林의 衛正斥邪論이 어떠한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현실에 적용되는지를 객관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芝窩 鄭奎元의 현실인식과 대응자세를 검토해 보고자 시도한 것이다. 정규원의 현실대응 자세는 조선왕조가 안고 있던 총체적 난국을 합리적이고 탄력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 방향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사회 경제적인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국가들의 첨탈에 따른 사상적 혼 돈과 국가적 위기를 內修外壞의 방법으로 극복할 것을 주문했다. 이러한 그의 방안은 서구 열강에 대응하는 강경책이 가져올 수 있는 물리적 충돌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이는 그가 자신의 학문적 배경과 지역적 기반을 복합적으로 수용함으로서 확립한 外柔內剛의 자세를 반영한 것으로 다양한 사조를 선택적으로 포용하여 독자적 세계관을 구축한 그의 단면을 보여주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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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학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雙洲 鄭泰元(1824, 순조 24 - 1880, 고종 17)은 영남 진주에 거주하면서 대체로 栗谷과 尤菴의 학문과 인격을 존모하면서 기호학파의 학맥을 계승하였고 평생 衛正斥邪와 尊華攘奏의 이념을 고집하여 실천하였다. 그는 당시 老論의 宗匠 이었던 梅山洪直弼(영조 52, 1776 - 철종 3년, 1852)의 문하에서 師事하였지만 그렇게 크게 벼슬에 있어 출세를 하지 못한 형편 이였으며 다만 1879년(고종 16) 부친 西湖公의 遺命에 따라 56세의 老年으로 司馬試에 합격하여 士林들로부터 많이 羨望한 바 되어 矗閫 趙義贊등의 추천을 받기도 하였으나 끝내 要路에 등용되지 못한 채 57세 (1880)를 一期로 생애를 마쳤다. 그는 당시 文詞에 있어 ‘嗚國之手’가 되겠다는 칭찬을 틀을 만큼 뒤어난 학문적 역량을 갖추고 있었으며, 당시 교유한 문사로서는 많은 族叔 • 族兄· 族弟를 비롯하여 100여명의 학자가 있였는데, 특히 족형인 芝窩 鄭奎元과는 同堂講學하며 偲切琢磨한 사이였으며, 艮齋 田愚(1842-1922)의 스승이었던 鼓山 任憲晦와 는 같은 梅山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편지왕래와 직접 방문을 통해 갚이 있는 학문적 토론을 가지기도 하였다. 또 그는 ‘효’의 정신과 숭조의식에 투철하여 이를 향토 · 국토애로 승화 발전시켜 민족적 자부심과 자아의식으로 구체화하여 문명의 가운이 중국으로부터 동방의 우리나라에 도래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요컨대 쌍주는 영남 진주에 거주하면서 학맥은 대체로 金昌集, 李縡, 金元行, 朴胤源, 洪直弼로 이어지는 노론 낙론계에 속해 있고, ‘直=內修’의 도맥은 공 자一주지-송시열-매산 홍직필에 연결되어 있으며 理氣論의 사상적 도맥은 율곡 송시열에 접맥되어 있지만 ‘道心’의 개념 정의와 관련해서는 일부 율곡의 설 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內修外懷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主理적 이념 을 기초로 하는 같은 기호학파내의 衛正斥論邪과 尊華壞夷論에 기초하고 있지만 畿湖지방의 華西 李桓老(1792-1868) , 湖南의 盧沙 奇正鎭(1798-1879) , 嶺南의 寒洲 李震相(1818-1886) 등과 같이 학파적 차원 또는 집단적 그룹차원에서의 구체적이고 계획척인 대응을 하는데 까지는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일부 지식인 유생들과 함께 만동묘 복설과 華陽書院복원에 관한 상소를 올리는 등의 현설적 실천을 전개하였다는 것과 경세론과 관련해서는 주자-율 곡의 公道論的사상에 기초한 「삼정구폐소」를 올리는 정도의 현실개혁적 의지를 피력하였다는 데서 그의 학문사상의 역사적 의의를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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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陽村權近(1352-1409)의 『중용』해석에 대해 고찰한 글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첫째,양촌은 중용의 성격에 대해 주자처럼 道統論의 관점에서 ‘聖學의 心法’우로 파악하지 않고, 鄭玄의 경우처럼 ‘孔子의 聖德’에 초점을 맞추어 파악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중용』을 子思가 天 과 孔子로써 모범을 삼은 것으로 보았다. 둘째,양촌은 중용을 주자의 설처럼 도를 전한 책으로 보면서도 그 도를 어떻게 가르치고 배울 것인가 하는 敎· 學에 비중을 두어 해석하였다. 셋째, 양촌은 『중용』의 分節(단락나누기)에 있어 大탑는 三節로 나누어 보고 細分해서는 五節로 나누어 요지를 파악하는 새로운 설을 제 시하였는데, 이는 朱子의 四分節說이나 雙峯饒氏의 六分節說과 다른 독창 적인설이다. 넷째,양촌은 단락나누기를 통한 요지파악에 있어서 주자의 설을 근간으로 하되,쌍봉요씨와 番陽李氏(李靖翁)의 설 중에서 장점을 모두 취하여 자신의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였다. 다섯째,양촌은 단락나누기를 정밀히 고찰하는 과정에서 단락을 바꾸는 서술체계에 주목하여, 새 단락의 첫머리에는 반드시 子思의 말로 시작한다는 새로운 주장을 하였다. 여섯째,양촌은 중용의 요지를 道와 德 으로 파악하여,제 1장부터 제 20장까지의 제 1 대절은 君子之德을 말한 것으로, 제 21 장부터 제 32장까지의 제2대절은 聖人之德을 말한 것으로, 제 33장 제3 대절은 결어로 파악하였다. 이는 주자가 제 1절은 中庸을 말한 것으로, 제2절은 費隱小大를 말한 것으로, 제3철은 天道人道를 말한 것으로 제4절은 결어로 파악한 것과 상당히 다른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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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6세기에 걸쳐 계속된 몇 차례의 사화로 많은 지식인들은 은거의 길을 선택 하였다. 이들은 물러나 있지만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기울였고,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는 서슴없이 비판하였다. 그들은 ‘隱進’ · ‘處士’ · ‘逸士’ · ‘徵士’ · ‘居士’ 등의 영예로운 호칭으로 불리었으며, 국가에서는 遺逸薦擧制라는 독특한 천거 방식을 통해 그들을 예우하였다. 동주 성제원(1 506-1559) 또한 기묘사화의 참혹한 피해 상을 직접 보고 은거하였다가 후에 遺逸로 천거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당시 退處型사림들의 보편적 학문 성향, 곧 이론적이고 성리학 일변도의 학문 추구보다는 실천적이고 현실적이며, 어디까지나 성리학에 근본을 두되 성리학 외의 불교 · 노장은 물론 천문 · 복서 · 의 학에 이르는 잡학까지 두루 섭렵하는 탄력적인 학문성향을 나타내였다. 士의 출처 에 대해서는 그 시대가 왕도를 실행할 만한가, 士자신이 그 소임을 감당할 충분 한 능력과 자질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라야만 출사가 가능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평생 출사하지 않다가 말년에 遺逸薦擧로 보은현감에 제수되었는데, 이를 그 동안 자신이 축적한 능력을 발휘할 계기로 삼았다. 이는 3년 간의 치세를 마치자 곧바로 은거의 삶으로 돌아간 그의 결단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동주를 비롯한 이 시기 遺逸之士들의 이 같은 처세는 후세 여러 학자들에 의해 칭송을 받았으며, 출처의 자세와 방향에 準據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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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 덕계의 문언이 생존하였던 당시는 중종 16년에서 선조 7년에 걸친 시대적 상황이었다. 중종초의 정국은 공신중심의 통치체제가 유지되었고, 왕권의 약화라는 훈구세력의 견제를 위한 대응세력의 필요성에서 사림파의 재진출 기회가 열렸다. 중종 9년부터 사림파는 言官에 활발하게 진출하게 되었고, 이러한 인적 기반을 토대로 사림파의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개혁정치를 추진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덕계는 정계에 진출하여 자신의 이상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덕계는 산음에서 남명으로부터 『중용』, 『대학」, 『심경』, 『근사록』 등을 배웠고, 궁리와 거경에 바탕한 덕계의 학문관에 입각한 교육은 남명으로부터 계승한 학습 자의 개인차를 중시하는 교육과 지득을 강조하는 교육, 그리고 당시 성균관 학유 시절에 행했던 교육으로 구체화되어 냐타났다. 뿐만 아니라, 덕계의 문인들은 다양 한 급문동기에 의해 얼련의 문인집단이 형성된다. 지역적으로는 당시 덕계가 거주 하였던 산청, 한양, 성주지역 등지에서 강학 및 학술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산청 및 함양지역에서의 학술회의로 그 절정을 보게 되는데, 이른바 지곡 사, 단속사, 남계서원에서의 학술회의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강학활동은 대체로 학습자의 개인차와 자득을 강조하는 교육, 유생의 평가방법으로서의 4등급 분반 교육, 그리고 평생교육의 장으로서의 강학활동의 의의를 지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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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7세기 후반에 黨爭의 와중에 평생을 살다간 農嚴金昌協(1651-1708) 의 삶속에 잠재되어 있는 出處와 去就에 대한 문제와 그의 한시 작품에 나타난 은자적 삶의 경향과 변화, 그리고 의미를 살펴본 글이다. 그는 農嚴家와 직접 연루된 己亥禮訟, 甲寅禮訟, 康申大黜陸, 己巳換局, 甲戌換局등의 浮沈을 몸소 체험하면서, 생애에서 9년간(1680-1689년)의 환로를 제외하고는 주로 강호에 은거 하며 도학과 창작저술, 그리고 후학 양성에 몰두하며 생을 마쳤다 그는 聖賢의 出處를 크게 두 가지로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伊尹과 太公과 같이 때를 얻어 자신의 도를 천하에 행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고 행할 수 있으면 행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공자와 같이 미미한 관직으로도 천하를 주유하면서 도를 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유형화한 출처의 원칙은 바로 명분있는 時中의 得失에 있다. 한 걸음 나아가 그는 출처란 단순히 강호에 은거하거나 세상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만약 세상에 나아가 벼슬을 하게 된다면 나라플를 위해 하는 일이 있어야 하고 [出爲], 물러나 은거하게 된다면 스스로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處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 인식한 진정한 은자의 삶은 劉癡之와 같이 많은 작록으로도 은자의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 진정한 은자의 삶을 선호하였다. 농암은 20대 이후 약 40년간 자신의 出處와 去就에 대한 엽장과 은자적 삶에서 느끼는 감회를 주어진 현실 공간에서 다양한 詩語와 用事를 통하여 진솔하게 시적으로 표현하였다. 그의 시 세계를 살펴보면, 몇 차례의 당쟁으로 인한 그의 규정된 삶으로 인한 좌절과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 주변을 배회하면서 겪는 갖가지 고뇌와 갈등 등을 한시라는 문학적 표현 도구를 통하여 형상화한 작품이 다수를 이 루고 있다. 작품에서 그는 이미 20대 초에 世士의 일반적인 선비이기보다는 達士 의 삶을 갈망하는 귀은적 의지를 피력하였다. 특히 그는 己巳換局이후에 창작한 작품에서는 이러한 정서가 더욱 짙게 배여있다 그는 ‘五憶’ · ‘梁鴻’ · ‘九辯’ · ‘宋玉’ · ‘飯牛’ 등의 고사를 인용하거나 屈原 · 梁鴻 · 甯戚 그리고 商山에 은거 했던 四晧·康樂公등에 비유하여 주어진 현실을 작품에 투영함으로써 자신의 의지와 심정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농암의 평생 이력과 시 세계를 살펴볼 때, 그는 젊어서부터 去就의 문제 에서 出보다는 處에 뜻을 두였기 때문에 환로에 나아갈 수 있는 많은 가회와 공간이 주어졌지만 그는 9년간의 환로를 제외하고 주로 강호에 은거하며 창작과 저술,그리고 후학 양성으로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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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子書節要』는 退溪 李滉(1501-1570)이 1558년 중국 宋나라 朱子(1130-1200)의 書札중 학문에 긴요한 것을 뽑아 편찬한 것이고, 『大東韻府群玉」은 草澗 權文海 (1534-1591)가 1589년 우리 나라 檀君으로부터 조선조 宣祖까지 역사 · 인물 · 지 리 등의 다양한 일을 韻字에 따라 표제어를 만들어 배열한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따라서 兩書는 중국 것과 우리의 것이라는 큰 차이가 있다. 이 책의 편찬자인 퇴계와 초간은 사제간이였으며, 두 저술은 31 년 간격을 두고 이루어졌다. 양서의 간행과 보급 그리고 후대 영향과 활용에 있어서도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간행과 보급에 있어서는, 『주자서절요』는 편찬된 직후에 많은 제자들이 서로 앞다 투어 간행하였다. 그 결과 편찬 직후 10년 내에 5차례나 출판되는 획기적인 기록을 세웠다. 이는 우리 나라 출판문화 역사에 있어서 단기간에 동일 서적을 여러 차례 출판한 것으로 찾아보기 힘든 예이다. 뿐만 아니라 그 뒤에도 지속적으로 간행하여 널리 보급되었기에 가가호호 구비되게 되었다. 반면에, 대동운부군옥은 편찬되어도 아무도 간행해주지 않았으며, 후손의 지극히 힘겨운 노력으로 펀찬된 지 248년만에야 겨우 간행되게 되었다 양서가 후대에 미친 영향과 그것의 활용에 있어서는, 『주자서절요」는 후대의 반향과 활용이 엄청나서 조선조 성리학자라면 누구나 필독서로 읽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 나오는 용어와 고사 그리고 내용 등이 우리 나라 문인들의 문집에 다량으 로 반영되고 응용되어 활용의 반향이 대단하였다. 반면에, 대동운부구옥은 지극 히 미미하여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48년간만에 간행된 요인도 있지만 간행된 이후에도 중국의 것에 경도되어 있는 우리 나라 사대부들의 學風的영향 때문에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 책에 살려 있는 내용이 활용되는 것은 아예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일제시대와 현대에 와서야 민족적인 것을 강 조하면서 주목받게 되었다. 요즘 학계에서 많은 저술과 논문에서 이 책을 언급하 여 매우주목받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