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冥學’의 精髓는 學紀類編 가운데 그려놓은 24圖에 있다. 그는 산림에 은 거하여 다른데 마음을 쓰지 않고 정력을 다해 심오하고 정미한 것을 연구하여 形而上의 道體로부터 形而下의 日用에 이르는 理論의 思維 논리구조를 만들어 내었다. 「三才一太極」ㆍ「理氣」ㆍ「天理氣」ㆍ「人理氣」ㆍ「心統性情」ㆍ「天道」ㆍ「天命」 등 9개의 그림은 선생이 손수 그려서 단서를 구한 것이다. 「三才一太極圖」는 形 而上인 太極의 本體問題를 찾은 것으로, 形而上學인 理의 體와 形而下學인 氣 의 用이 體로부터 用에 이르고 用으로 體를 관통하는 體用一淵의 原理를 구현 하고, 宇宙 自然 生命과 사람의 本質ㆍ人性ㆍ道德ㆍ價值에 대한 관심을 두드러 지게 드러내었다. 南冥은 窮理明善으로부터 出發하여, 張載ㆍ二程ㆍ朱熹ㆍ黃榦ㆍ陳淳의 思想 을 이해하고서 「理氣圖」ㆍ「天理氣圖」ㆍ「人理氣圖」를 만들었다. 「理氣圖」의 상 단 중앙에 黑白으로 陰陽이 서로 나누어진 원이 있는데, 이 원은 비록 理氣로 나누었으나 體와 用은 근원이 같은 和合體인 太極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 다. 理氣 先後의 변론ㆍ理氣, 形而上下, 道器의 변론ㆍ極限 有無의 분변, 이 세 가지 변론을 통하여 理氣 關系의 性質ㆍ地位ㆍ作用ㆍ기능이 이미 밝혀졌다. 이 에 南冥은 「天理氣」와 「人理氣」의 두 圖를 만들어, 더 나아가 理氣가 天人 관계 가운데에 있어서의 體現과 運用을 밝혔다. 天의 理氣와 人의 理氣가 心에 이르 면 곧 性과 情이 되며 性情은 각각 理氣를 갖추고 있는데, 「心統性情圖」가 있다. 南冥의 「心統性情圖」는 李退溪 「聖學十圖」 중의 「心統性情圖」와 다르다. 다만 退溪는 스스로 「心統性情圖」 중의 中圖와 下圖를 만들었는데, 이 두 圖의 思想 으로 보면 南冥과 서로 통한다. 남명은 학기류편에서 「理氣」ㆍ「天理氣」ㆍ「人理氣」로부터 「心統性情」圖에 이르기까지 理氣ㆍ天人ㆍ性情의 體用 一源ㆍ理一分殊의 논리 구조를 구성하 고, 아울러 理氣의 核心 話題로 宇宙自然, 現實社會ㆍ形而上下ㆍ倫理道德ㆍ魂 氣體魄ㆍ性情中節 등을 통활하여, 상하 좌우로 하여금 전체적으로 貫通하고 원 만하여 막힘이 없게 하여 하나의 虛靈不昧하고 生生不息하는 세계를 이루었다.
남명 조식은 자신에 대해서는 실천적 행실을 무엇보다 강조하였고, 대물에 대 한 관점은 실용적 측면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그의 문학에 대한 태 도에 있어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문학을 대하여 서도 실용성을 매우 강조하였다. 그는 젊었을 적에 한 때 문학으로 이름을 드러내기도 하였으나, 성인의 학문 을 자신이 공부할 목표로 정한 뒤로부터는 문학을 멀리하였다. 그는 스스로 시 는 완물상지하기 쉬우므로 배워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그의 제자 정인홍에 따 르면 그는 항상 시황계를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남명이 이처럼 시를 배격하였다면 그의 문집에 시가 있을 수가 없을 것이지 만, 그의 문집에는 많은 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시 벽이 있어 시를 짓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고 하였다. 남명은 결국 시를 멀리 하면서도 시를 짓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물론 시흥이 나서 어쩔 수 없이 지은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바로 실용적인 목적으로 시를 지었던 것이 다. 특히 문장의 경우에는 이른바 문예문에 속하는 글도 전혀 없지는 않으나, 많은 작품들이 실용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처럼 실용성에 근거하는 남명의 문학관은 작품 속에서 대략 세 가지 정도로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첫째는 본성이나 바탕과 같은 근본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는 「원천부」에서 온 갖 이치가 모두 본성에 갖추어져 있다고 하였는데, 작품을 지음에 있어서도 이 러한 생각은 그대로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다. 둘째는 현실과 일상과 같은 현재를 중시하는 것이다. 그가 「을묘사직소」와 「무 진봉사」에서 드러낸 것과 같이 작품 속에서 현실과 일상을 중시하는 생각은 다른 산문에서 뿐만 아니라, 몇몇 시 속에서도 이러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셋째는 사실을 중시하고 허명을 싫어하는 것이다. 그가 사실을 중시하였던 점 은 그의 작품 속에서 그가 스스로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다. 특히 묘문을 지으면 서 그는 고인에게 아첨하지 않겠다고 하였으며, 훌륭한 학자라는 빈 이름으로 세상을 속인다는 생각을 여러 작품 속에서 밝힌 바 있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남명의 문학작품 속에는 그가 문학을 멀리하면서도 왜 작품을 짓지 안 되었는가 하는 사실과 문학작품을 지음에 있어서 무엇을 강 조하였는가, 그리고 문학작품 속에 드러난 것을 통해서 그가 무엇을 중시하였 는가를 살필 수 있었는데, 이러한 것이 결론적으로 그의 실용주의적 생각과 맞 닿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글은 남명사상을 조선성리학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그 성격을 道學으로 규정한 뒤, 남명이 남긴 시 속에 나타난 도학적 성향을 밝힌 것이다. 이를 요약 하면 다음과 같다. 남명은 조선성리학이 발흥하는 시기에 몸으로 공부를 한 道學者다. 그는 反求 自得의 깨달음을 중시했고, 그 깨달음을 자신의 몸에 실천해 나가는 反躬實踐 을 강조했다. 또 存養-省察-克治의 修養論으로 本源을 끝없이 涵養하였다. 그 는 이러한 실천을 통해 天德을 성취하려 하였고, 그것을 통해 王道를 구현하고 자 하는 이상을 가졌다. 비록 그가 왕도를 이룩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인간이 하늘과 합하는 길을 평생 추구한 위대한 求道者였다. 그래서 나는 顔淵의 ‘克己 復禮’․‘三月不違仁’의 경지에 오른 인물로는 후세에 南冥만한 학자가 없다고 생 각한다. 그는 25세 때 顔淵이 되기를 목표로 한 뒤, 끝임 없는 노력을 통해 안연 의 경지에 오른 인물이다. 남명의 시에는 天德의 成就를 위한 求道的 修行, 王道를 현실세계에 이룩하고 싶은 理想과 그럴 수 없는 현실의 間隙이 잘 나타나 있다. 天德의 성취를 위한 구도적 수행에는 「易書學庸語孟一道」․「神明舍圖」․「神明舍銘」 등에서 살펴본 存 養-省察-克治의 수양론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데, 특히 淵黙의 涵養이 본원을 이룬다. 그는 王道의 이상을 현실에 구현할 수 없었지만, 伯夷나 嚴廣처럼 현실 을 떠나 隱逸自適하지 않고, 연꽃처럼 오염된 현실세계에서 涵養을 통해 이룩 한 천덕의 향기를 퍼뜨리려 하였다. 남명의 시에는 淵黙의 涵養을 통해 고도로 정제된 솔․명월․연꽃 등의 맑고 밝은 常惺惺한 정신세계가 들어 있고, 또 고사리 로 상징되는 伯夷보다는 연꽃으로 상징되는 柳下惠에 자신의 정체성을 둔 現實 主義精神이 빛나고 있다.
이 논문은 南冥과 退溪 先生의 用韻 系統을 歸納했는데, 이 系統으로 平水韻 과 比較하고, 中國의 詩人인 蘇軾과 高啟의 用韻 系統을 比較하여 退溪와 南冥 의 用韻 系統의 특징을 지적해내고, 朝鮮 16세기 文學語音에 대한 초보적인 탐 구를 했다. 南冥이 入聲 韻尾를 쓰는데 혼란한 것이 대략 100분의 8을 점하고, 退溪는 入 聲 韻尾를 쓰는데 혼란한 것이 대략 100분의 13을 점한다. 응당 入聲 韻尾인- p・-l・-k가 셋으로 나누어진 상황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실제 用韻 에 통용한 상황이 있는데, 南冥은 用韻의 혼란이 많지 않은데, 退溪는 用韻의 혼란이 비교적 많다. 平水韻은 13세기에 출현한 뒤로 줄곧 清나라에 이르기까지 影響이 매우 컸 다. 中國의 지식인이 格律詩를 쓰면서, 韻字를 고르고 平仄을 배치할 때 모두 平水韻의 규정을 준수했다. 우리들은 응당 南冥・退溪의 押韻 체계가 平水韻과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를 보아야 한다. 쉽게 말을 하기 위해서 또한 廣韻 의 韻目으로 기초를 삼는다. 눈에 뜨이게 하기 위해서 또한 표를 열거하는 방법을 쓰는데, 첫 번째 줄은 廣韻 208韻 韻目이고, 두 번째 줄은 平水韻 106韻의 韻目이고, 세 번째 줄은 退溪先生이 用 韻한 韻部이고, 네 번째 줄은 南冥先生이 用韻한 韻部이다. 韻目은 平聲이 上聲 과 去聲을 포괄한다. 廣韻으로부터 平水韻에 이르고, 다시 朝鮮詩人의 用韻 에 이르러 韻部는 간단해지고 통합되었는데 이러한 변화는 부호로 표기한다.
주지하다시피 남명 몰후 인조반정 이전까지 약 50년 동안은 남명학파가 역사 의 전면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던 시기라 할 수 있거니와, 인조반정으로 인 해 남명학파를 이끌던 내암 정인홍이 적신으로 몰려 처형된 뒤로부터 남명학파 는 급격히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북인이었던 남명학파가 인조반정 이후 남명집에 실린 정인홍의 흔적을 없애는 과정에서 적극적인 부류와 소극적인 부류가 대립하면서 남인과 서인으로 분열하게 되었다. 이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남인은 퇴계학파화하고 서인은 율곡학파화하였다. 그러나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江右 지역의 인물 가운데 남인화 또는 서인화한 두드러진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면, 그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체로 남명 학파의 학문정신을 나름대로 계승해 왔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리고 이러한 지역적 분위기는 남인화 또는 서인화한 인물의 경우도 남명학파의 학문정신을 근본적으로 배제한 채 퇴계학파 또는 율곡학파의 학문을 수용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던 것이다. 영조 4년(서기 1728년)에 일어난 무신사태 때 강우 지역에서 동계 정온의 현 손 정희량과 도촌 조응인의 5대손 조성좌가 세력을 규합하여 안의․거창․합천․삼 가를 한 때 점령했던 일이 일어났다. 이 일로 인해 강우 지역은 반역향이라는 인식이 심화되었으며, 이 지역의 선비들도 그 기상이 저하되고 남명학파로서의 학문정신에 대한 자긍심에 상처를 입었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이르면 학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16-17세기의 학 문적 영화를 다시 보는 듯하였다. 당시 강우지역의 학자들의 남명학 계승양상 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우선, 조선말기에 이르기까지 경상우도 지역에서는 그들이 비록 영남 남인 정 재 유치명의 문인이거나 기호남인 성재 허전의 문인이거나 호남 노론 노사 기 정진의 문인이거나 간에 남명의 경의 사상에 대한 계승의 의지가 확고함을 알 수 있다. 특히 퇴계를 경모하면서 한주의 주리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후산 허유가, 남명의 신명사도와 신명사명에 대한 정밀한 주해를 하면서 경상우도의 당대 선후배 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하여 완성시켰던 점은 남명 사상의 근저를 확고히 하려는 의식의 소산이었다. 출처관 또한 남명의 영향이 당시까지 깊이 남아 있었다. 만성・단계・후산・노 백헌・물천・면우는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었음에도 과거로 발신한 사람은 단계 김인섭 뿐이다. 그런데 그 단계가 조정에서 물러난 뒤 수령들의 횡포가 극에 달 한 것을 보고 그 아버지와 함께 민란을 주도한 것은, 남명의 출처관과 현실비판 의 정신이 변모된 양상으로 후대에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남명이 남긴 시황계의 영향은 조선말기에 이르면 상당히 퇴색해지고, 성리학 이론에 관한 탐구를 배격하였던 남명의 정신도 많이 허물어졌다. 그러나 남명의 경의 사상과 출처관 등은 조선말기까지도 확고하고, 실천을 중 시하는 학풍 또한 깊이 젖어 있어서 성리설에 대한 학설 전개를 못마땅해 하는 분위기가 1900년 무렵에도 광범위하게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겉으 로 드러난 학맥상으로 보면 남명학파가 와해되어 사라진 듯하여도 실상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는 분명한 증거인 것이다.
南冥 曹植은 退溪 李滉과 더불어 朝鮮時代 학계의 양대산맥이다. 그는 일생 동안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서 독서와 講學으로 일생을 보냈다. 그는 실천위주의 선비였고, 이런 학풍을 제자들에게 전수하였다. 이로 인하여 壬辰倭亂 이 일어나자 南冥의 제자들은 모두 목숨을 걸고 義兵을 일으켜 나라 를 위해 싸워 나라를 구출해 내었다. 이런 공훈으로 인하여 宣祖의 신임을 받아 조정에 발탁되게 되었고, 光海朝에는 大北政權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너 무 자신들 위주로 정치를 해 나가고 반대당을 철저하게 배척한 관계로 1623년 仁祖反正을 맞게 되어 몰락하게 되었다. 大北派는 대부분 처형되거나 유배 당 하였고, 南冥學派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仁祖反正 이후 새로 결성된 南人들은, 본래의 南人에다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몰락한 北人일부가 새로 편입한 것이다. 이들 남인은, 서울 경기지역에 기반을 두고서 西人들과 연합정권을 형성하여 官職에도 나갔으므로 嶺南南人을 포함 한 전체 南人을 주도하였고, 많은 학자 문인들이 나왔다. 이들을 특별히 近畿南 人學派라 일컫는다. 이들은 退溪學派의 한 갈래로서 寒岡 鄭逑의 제자인 眉叟 許穆을 통해서 近畿 地域에 退溪學脈을 전파시켰다. 이들은 줄곧 嶺南에 근거를 둔 南人들과 활발 하게 교류를 했다. 이 近畿南人學者들의 대표라 할 수 있는 龍洲 趙絅, 眉叟 許穆, 星湖 李瀷, 順 菴 安鼎福, 樊巖 蔡濟恭, 性齋 許傳 등이 近畿南人學派의 學統을 이어왔다. 이들 은 退溪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켜 實學과 접목시켜 독특한 학문을 형성하였다. 이들 近畿南人학자들은, 仁祖反正 이후, 西人들의 의도적인 집요한 南冥 貶下 의 상황에서, 南冥을 옹호하고 南冥의 位相을 높이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해 왔 다. 그들은 비록 南冥을 尊崇하는 정도가 退溪에게는 미치지 못했지만, 南冥學 이 명맥을 유지하는 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英祖朝의 星 湖 李瀷, 正祖朝의 樊巖 蔡濟恭과 朝鮮末期의 性齋 許傳 등은 南冥의 位相을 提 高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오늘날 南冥學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이 세 분의 학자가 노력한 것에 힘입은 바 크다.
의궤는 조선전기부터 제작된 것으로 기록에 나타나지만, 현존하는 의궤 중 가 장 오래된 것이 선조대 후반에 제작된 것들이다. 따라서 광해군대에 제작된 의 궤는 현존 의궤 중에는 상당히 시기가 오래된 것으로 분류된다. 광해군대에 제 작된 주요 의궤는, 1) 선조의 국장, 부묘, 묘호 개상, 존호와 관련 의궤, 2) 명나 라 사신을 영접한 의궤, 3) 생모인 공성왕후의 추숭에 관계된 의궤, 4) 화약무기 를 제작한 과정인 화기도감의궤, 5) 천문관측기구를 보관하는 흠경각과 보루 각 건축 의궤, 6) 제기 제작에 관한 의궤, 7) 삼강행실도를 새로 펴낸 과정을 정리한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 등이다. 이 중 화기도감의궤와 흠경 각영건의궤, 보루각영건의궤, 영접도감도청의궤는 광해군대에만 특별히 제작된 의궤들로서, 국방과 외교 분야에서 큰 성과를 이룬 광해군 정권의 성격 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여겨진다. 광해군 재위 16년간 27종의 의궤가 편찬되었 다. 그런데 그 중에 6종이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외교와 관련되는 의궤라는 점이 우선 주목이 된다. 광해군은 국방이나 외교, 과학에서만은 탁월한 군주임 에는 분명하였다. 명과 청의 세력교체라는 국제정세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바 탕으로 실리외교를 수행한 것이나 화기제작을 통해 국방 강화에 주력함으로써, ‘예견된 전쟁’을 슬기롭게 막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과학 중시의 사고가 그 바탕 에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의 시대에 제작된 영접도감의궤과 화기도감의궤, 흠경각영건의궤 등은 그 능력을 축소판처럼 보여주고 있다. 특히 광해군 정 권의 주역인 북인인 점을 고려하면, 북인의 학문적 원류가 되었던 남명학파나 화담학파의 博學, 실천 중시의 사상적 흐름이 광해군대의 국방, 외교, 과학적 분 위기와도 일정한 연관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경남 산청군 신등면 법물은 상산 김씨 가문의 세거지이다. 상산 김씨 가문은 이곳에 세거하면서 향촌 사족으로 성장하였으며, 관료들과 학자들을 다수 배출 하였다. 19세기 박치복, 허전, 이진상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섭렵한 학자 인 김진호도 그 중 한사람이다. 그는 법물의 이택당을 중심으로 강우지역 학자 들과 폭넓은 교유관계를 맺었으며, 물천서당 등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후학 양 성에도 힘썼다. 19세기 김진호가 학문 활동을 하던 시기의 고문서 1,709건이 김진호의 후손 댁에 소장되어 있다. 1,709건의 고문서는 간찰․만사․시문․제문․혼서․잡저․기문․서 문․발문․단자․상량문․행적기․고유문 등이다. 이들 1,709건의 고문서 가운데 약 64.2%에 달하는 1,097건이 간찰이다. 1,097건 간찰은 상당 부분 김진호에게 발신된 것이며, 또 성재집의 간행처로 사용되던 은낙재나 강학의 장소인 이 택당에 기거하던 학자들에게 발신된 간찰들도 있다. 그러므로 서로의 안부나 개인적인 용무를 위한 간찰도 있으나, 강우지역 학자들의 학문 활동과 관련된 간찰이 많다. 간찰은 문집에 실리기는 하지만 문집 편집자의 편찬 방향에 따라서 선별되고, 선별된 친필 간찰의 전문을 싣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강우 지역 학자들의 학문 활동을 볼 수 있는 친필 간찰은 사료적 가치가 크다. 그러 므로 간찰을 바탕으로 김진호를 중심한 강우 학자들의 교유관계, 학문 활동의 양상, 사회 현실의 인식과 대처에 대하여 정리하였다. 김진호는 혼맥에 의한 교유와 학문 활동에 의한 교유 관계를 유지하였다. 특 히 박치복, 허전, 이진상의 문인이었던 그는 강우 지역 학자들과 폭 넓은 교제 를 가졌는데, 허유․곽종석 등과 친분이 두터웠다. 상산 김씨 가문은 남인적 성향 을 가졌으나, 혼맥이나 학문 교유 관계에서는 노론과의 교유도 보인다. 학문 활 동은 각종 문집 간행과 강회를 통한 토론 등으로 대별된다. 김진호는 특히 허전 의 저서를 간행․중간하는데 관심을 많이 기울였는데, 그것은 특히 예론에 관심 을 갖고 실천하고자 한 김진호의 성향을 드러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강우 지역 학자들은 19세기 조선의 현실을 직시하였으나, 강우지역의 공론이 형성되지 않 아 현실 참여에는 적극적이지 못한 측면이 있다. 서구 사상에 대해서는 성리학 을 통해서 전통을 고수하고자 하는 경향과 적극적으로 서학을 탐구하고자 하는 경향 등 학자들의 다양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이 글은 일제강점기 한국에서 孔敎運動을 주도한 眞菴 李炳憲(1870~1940) 의 유교개혁론의 배경과 성격을 검토한 것이다. 이병헌은 3·1 민족해방운동이 전개되고 있던 1919년 유교의 자발적 개혁과 변신만이 민족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孔子를 敎主로 하는 유교의 종교화를 골자로 한 儒敎 復原論을 저술했다. 유교의 종교화를 통한 복원은 일차적으로 그의 학문적 토 대가 되는 寒洲學派의 心卽理說에 이론적 기반을 두고 있었다. 심즉리설은 純 善인 理의 절대적 가치를 부각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으며, 그것을 적극적 으로 적용할 경우 理를 上帝의 개념과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그것을 토대로 그는 중국에서 戊戌變法을 주도하며 공교운동을 전개하던 康有爲의 지 도를 받으며 한국에서 유교의 종교화 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공 교운동은 공자 이후 모든 학문적 경향을 부정하고 공자의 정신을 복원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리학적 우주론에 입각한 수양론을 확립하고 있던 학파들의 반발로 인해 순조롭게 전개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그의 유교복원론 은 유교의 개혁필요성을 제기했다는 점, 그것의 생명력을 견지하는 방안으로 종교화를 모색했다는 점에서 일정한 역사적 의미를 확보하고 있었던 것으로 평 가된다.
필자는 연계재에 소장된 여러 종류의 사마안, 연계안을 통해 조선 후기 진주 사마소의 건립과 변화에 대해 살펴보았다. 조선 전기 유향소를 능가하는 막대한 영향력을 향촌사회에 행사하고 있었던 사마소는 1603년에 혁파되었지만, 이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1620년대에 와서 사마소가 다시 세워지고 있다. 사마소는 고을의 역사적 조건에 따라 일찍 부터 지속적으로 운영되기도 하고 아주 늦은 시기에 설립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진주에서도 조선 전기에 사마소가 세워졌다가 혁파된 이후 한동안 운영되지 않다가 1736년에 새로 창건되었고, 이에 따른 명안인 ‘사마안’도 만들어졌다. 이후 1812년에는 다시 ‘청금록’이 작성되었는데, 입록의 시기적 범위가 넓혀지 고 문과 급제자도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1841년에 와서는 연방안과 계적안이 별도로 작성되었고 사마소의 명칭도 ‘연계재’로 바뀌었다. 이후에 가서도 새로 운 명안이 여러 차례 만들어진다. 18세기 전반 진주에 사마소가 창건된 것은 우선 진주 지역에서 좀더 많은 과 거 합격자가 배출되기를 열망하는 교육적 목적 때문이었다. 사마소가 건립된 또 하나의 배경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진주 내에서 열세이던 노론세력들 이 그들의 입지를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던 점이다. 그런데 후대로 오면서 사마소의 성격은 변화양상을 보인다. 참여가문이 증가 하고 사마시 합격자뿐만 아니라 문과 급제자도 포함되면서 점차 연계안 체제로 변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연계안에 입록된 인물의 수도 점차 증가한다. 많은 가문들이 연계안에 관심을 가지고 조상을 입록시키기 위해 경쟁하면서 과거합 격 여부가 분명치 않은 인물들도 수록되기 시작하고, 가문간에 여러 가지 분쟁 도 발생하였다.
이 글은 조선조 말엽 유행한 명현록에 나타나는 명현가의 전국적 현황과 도별 양상, 경상도 지역 명망 문중 및 그 현조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명현록은 처음 ‘道學’의 계보에 연결되는 인물을 수록하는 것에서 비롯되었으나, 점차 道學 뿐 만 아니라 忠節이나 여러 방면의 업적으로 현저한 국가적 공헌이 있는 인물로 수록 범위가 확대되고, 이후 각 성관별로 이를 정리, 수록하는 형태로 진전되었 다. 각 성관별 명현을 수록한 명현록은 뒷 시기로 가면서 명현 후손의 세거지와 사승 관계를 명시하는 것이 기록상 중요시 되고, 뒤이어 이를 경상도라는 일정 권역에 한정해서 명현가와 그 현조의 휘·호·본 정도를 간략히 명시 수록하는 경 우로 나타난다. 한편 이 단계에 이르면 명현록에 등재된 인물은 조선조의 수많 은 명현들 가운데 그들의 후손이 동족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인물만을 대상으 로 하게 된다. 전국의 각 성관별 명현의 후손 거주지를 볼 때 서울이 압도적 다수를 점하여 조선조 말엽에 있어서 서울은 여러 명현가의 소굴로 나타나며, 경상도가 타도 에 비해 많은 등재 인물수를 보임이 주목된다. 고을로는 청주, 진주, 양주, 안동, 성주 등의 순으로 등재 인물의 후손 세거지가 많은 것으로 나타나, 명현가가 지 방 행정의 중심지에 비교적 많이 집중되어 있는 점도 주목된다. 경상도 각읍 명현가를 등재 수록한 수종의 명현록을 통해서 특정 성씨 앞에 특정 촌명을 冠하여 ‘○○金氏’와 같이 불리워진 5백 수십여 문중의 존재가 조 선조 말엽 경상도 지역에서 확인되며, 이들 가운데는 200여 내외의 숫자에 달 하는 명망 문중의 존재도 추측된다. 경상도 각읍 가운데 진주는 도내에서 가장 명현가의 수가 많은 고을로 나타나며, 우도가 좌도에 비해 2배나 등재 인물이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이들 지역에서 특정의 현조를 중심으로 동성의 씨 족이 결집되는 움직임이 활발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본다. 명현록에 등재된 경상도 각읍 명현가의 현조는, 단성 지역을 중심으로 살필 때, 주로 남명학파가 형성되고 당쟁이 전개되던 선조-인조 년간의 시기에 즈음 하여 지역 사회에서 주목되는 활약을 보였던 유명 인사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 들 유명 인사의 후손은 17-18세기에 걸쳐 향권을 지속적으로 장악하는 유력 씨족으로 자리를 잡았고, 이후 19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도 문집을 남기는 인사 를 많이 배출하는 등으로 해서 여전히 명망을 유지하는 씨족으로 나타난다. 이 같은 제조건을 충족하는 유력 씨족이 조선조 말 명현가로 알려져 여러 명현록 에 기록되어 나타나는 바, 이는 비단 단성 지역만이 아니라 경상도내 다른 고을 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