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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연구 KCI 등재 The Nammyonghak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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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권 (2004년 12월)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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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가 근세사회로 진입하면, 주자학이 보편적인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게 된 다. 그러나 한중얼 삼국에서 주자학에 대한 견해는 동일하지 않다. 본고는 야 점 을, 王夫之(중국), 이또진사이(일본), 정약용{한국)의 『중용』해석을 비교함으로써 그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밝히 고자 한다. w중용』가운데에서도 처1]1장에 나오는 천 성 도에 대한 주석을 그 분석 대상으로 한다. (1) 왕부지는 ‘천이 리이다.’라는 명제를 전면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기의 리가 된 뒤에 천야 리라는 뭇이 성립된다. 라고 하여 기를 강조한다. 같은 맥락에서 ‘성즉리‘를 긍정하연서도 이 라는 ‘거의 리’라는 점을 지적한다. 여기에서 천과 연성 은 동일한 기반을 갖는다. 이 점은 인성을 ‘연간에게 내재한 천도’라고 하는 명제 에서 확인된다. 자연의 음양 · 오행과 언간의 인의 · 오상이라는 덕목을 대응시키는 것도 같은 논리이다. 천도와 안도는 연속된다. 연성/울성, 인도/물도의 관계 에 있어, 왕부지는 철저하게 분리의 입장을 취한다. 인성=선, 물성=불선으로 규정한다. 도의 문제에 있어서도 物道를 인간이 물을 이용하는 인도로 본다. (2) 진사이는 ‘천이 리’라는 명제를 부정하고 주자학의 ‘이선기후’적 관점을 강하 게 비판한다. 그는 천을 원기로 보고 리는 그 조리로 한정시킨다. 그리고 천 혹은 천도를 유행/주재의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전자를 탈 도덕적 존재, 후자를 도덕적 존재로 본다. 전자는 인도와 구별되며, 후자는 인도가 도출되는 근거가 된다. 여기 에서 천도와 인도는 단절과 연속의 이중성을 갖는다. 진사이는 ‘성즉리’를 부정하고 기질의 레벨에서 접근하여 구체적인 정강의 선지향성을 성선이라고 주장한다. 이성은 인간만이 갖고 있으며 사물은 탈 도덕적인 닫힌 존재이다. 그려나 동물이나 식물에게도 인륜적인 규범을 인정함으로서 인간과 사물의 연속성이 확보된다. 천-인관계와 동일하게 인-물도 단절/연속의 이중성을 갖는다. (3) 다산은 천=리, 성=리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천을 인격적 존재로 성을 선 지향적언 기호로 규정한다. 그리고 천의 영명성을 인간이 부여받아 영명무형한 본성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함으로서 천-인은 근원적 동일성을 갖는다. 이 점은 천명이 인간의 도심에 내재하며 도심의 경고가 곧 천의 명령이라고 말한 데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다산은 인간에게만 도덕성과 자율성을 인정하고 사물은 자연성만을 갖는 닫힌 존재로 보아 인/물을 철저하게 분리시킨다. 지금까지 정리한 바와 같이, 세 명의 유학자들이 천-인, 인-물의 관계를 연속/단절로 보는 시각은 각각 다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근대지향성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강한 도덕성을 지향한다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왕부지가 중용의 성과 도를 인간에게 한정시킨 것은 ‘계신공구’라는 도덕적 수양을 전제로 한 것이며, 진사이가 천의 주재성 및 도의 연륜성을 강조한 것과 다산이 천의 인격성을 강조하고 성을 기호로 보며 언간에게만 도덕성과 자율성을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 이유는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한가지, 동아시아 사회가 근세에 접어들면서 기존의 주자학의 형이상학적 이론체계만으로는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들이 제기되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이 문제들을 타개하기 위한 이론적 장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천 • 성 • 도라는 유교 본체론의 핵심 개념 틀이 리에서부터 이탈하여, 기 • 정감 • 인륜 등 보다 구체적언 레벨에서 규정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개념의 변용이 일어난다. 이것은 사회에 대한 도덕적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유교이론을 재구축하는 작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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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6세기 조선시대의 南冥 曺植(1501-1572)의 정치사상과 17세기 명말 청초의 鏡萬唐甄(1630-1703)의 정치사상을 비교한 논술하였다. 두 사상가는 130 년이란 시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마치 한자리에서 같은 주제를 갖고 토론하며 교류한 듯 여러 방면에 걸쳐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특히 부패하고 부조리한 정치현실에 대한 강력한 개혁의식과 실천정신은 그야말로 不謀而合이라 할 수 있다. 보통 성리학자들의 성향은 본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현학적 • 이론적 공소함 에 빠지가 쉽다. 막상 그런 현상은 성리학자들 사이에 빈번하였다. 그런 점에서 남 명과 주만은 철저히 이런 성리학자들의 단점을 실천적 · 개혁적 관점에서 보완해 나아갔다. 이로부터 두 사상가는 정치현실에 그 누구보다 민감하였고, 구체적 개혁 정책으로 당대 사회 정치적 부조리의 문제를 해소하려고 노력하였다. 결국 두 사상가는 당대보다는 후대에더 큰 빛을 발하며 사상사에 큰 족적을 남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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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末淸初의 사상과 日本儒學에 대하여’라는 문제 설정은 江戶사상사 연구의 문맥 안에서 11세기 이전 일본 사회의 ‘주자학적 사유의 존재’라는 丸山眞男의 주장에 대한 비판 · 수정의 흐름 속에 자리 매김할 수 있다. 그러나 17세가 일본에서 수용된 명말청초의 사상을 무익하게 주자학과 떨어진 곳에서 파악하려는 것도 橋狂過正의 폐해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근년 중국 근세 사상 연구에서는 양명학은 주자학적 문제의식을 계승 · 발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는 주장이 점차로 힘을 얻어가고 있다. 이러한 연구 동향으로부터 이 논문에서는 中江藤樹의 사상을 ‘주자학’적 전개의 가능성 안에서 재구성해 보려 하였다. 그려고 이에 있어 藤樹의 사상에 대해 종래처럼 일부러 세세하게 시가를 구분하는 방법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한 시가 구분은 藤樹사상의 ‘ 日新’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가진 『藤樹先生年諸』의 기술에 의해 도출된 것으로, 오히려 이 논문에서는 초기에서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는 藤樹學특질의 추출을 기도하 였다. 그 특질은 藤樹의 사상에 합리성 • 질서성에 대한 합리적 신비 事象에 대한 신념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종래에 이 문제는 藤樹가 주자 학에서처럼 ‘理’의 자기관철을 무조건적으로 믿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이해되어왔지만, 이 에서는 오히려 藤樹가 ‘理’블 인간의 可知• 不可知에 미치는 모든 영역에 있어서 관철시켜왔기 때문에 표면상에서 그와 같은 모순이 나타남을 논하였다. 이와 같이 불가지의 영역을 신비적 인것으로 보류하지 않은 태도는 주자의 ‘象 數易’에 대한 태도와 공통된다. 또한 이것은 서구 17세기의 과학자들과도 유사한 점이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藤樹의 사상을 ‘주자학’ 안에서 이해하려는 것은, 藤樹사상의 해명에 기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사상사 전개의 재조명에도 이바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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颜习斋是中國明末淸初-立杰出的忠想家、敎育家。 他以級为豪迈的概向 两千多年来的学术威权挑战, "开二千年不能开之口, 下二千年不敢下之笔“, 猛烈批汉学与宋明理学, 强烈要求回归周孔之正学. 也以“夏古’为旗帜, 而从事 儒学新形态的探索工作, 返本开新可以恰当地概括也的思想特征。 由他的思想持 征可以窥贝明末淸初中國哲学的新动向。 不过,当地祟实习行哲学无法落实于外 在的杜会而只能向学问中探求时, 乾嘉朴学也就呼之欲出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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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元元은 중국 명말청초의 걸출한 사상가이자 교육가였다. 그는 야심찬 기백으로 2천여 년 동안의 학술 권위에 도전하고, 2천 년 동안 열지 못한 입을 열였고, 2천 년 동안 대지 못한 붓을 대였다. 그는 漢學과 宋明理學을 맹렬하게 비판하고, 周 公• 孔子의 正學으로 되돌아갈 것을 강렬히 요구하였다. 그는 ‘復古’의 깃발을 내세워 유학의 새로운 형태에 대하여 탐구하였다. 그의 사상은 한 마디로 退本開 新으로 특정지을 수 었다. 이런 사상을 근본으로 한 그의 사상척 특정을 좀더 구 체적으로 상펴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명말청초의 사상적 특징은 천하의 일을 자신의 임무로 하는 유학자들이 사회적 책임의식을 강하게 전개한 점인데, 안원에게서 그런 의식이 뚜렷이 나타난다. 안원은 “성인의 책을 읽으면 세상을 바꾸는 사람야 되어야지, 세상에 따라 바뀌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여, 적극적인 사회 개혁을 주창하였다. 이처럼 그의 사상에 있어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세상을 바꾸자는 사회개혁사 상이다. 둘째, 그의 사상에는 깊은 반성과 주체적 자각이 자리하고 있다. 안원은 이론을 내세울 때는 옳고 그른 점만 따져보고 같고 다른 점은 따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그의 학술적 자각이다. 또 안원은 옳은 것이라면 비록 한두 사람의 견해일지라 도 바꿀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높은 학문척 주체의식이다. 이런 반성과 주체척 자각을 통해 안원은 송명이학은 물론 한학까지도 철저히 버판하였다. 셋째, 안원은 배워서 실제에 응용하는 것을 중시하여, 用을 본체로 삼고 用을 학문으로 삼았다. 그는 兵• 農• 錢· 穀 · 水· 火• 工· 盧를 體이면서 用으로 보아, 體와 用응 하나로 보았다. 그의 習行哲學은 이런 사상에 기반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사상척 특징으로부터 명말청초 중국철학의 새로운 동향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숭상하고 실행한 習行哲學은 外在的인 사회에서는 그 결과를 볼 수 없였고, 학문 안에서만 탐구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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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실천’은 ‘개인의 도덕수양’과 다르다. 그것에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총칙, 즉 무엇보다도 중요한 절대가치가 있다. 그리고 이런 총칙에 따라 실천할 수 있는 방법들이 존재한다. 모든 사회실천은 이런 총칙과 방법들에 근거해서 수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분명한 기준을 갖고 올바로 판단, 평가해야 한 다. 이 글은 이상의 내용을, 왕부지의 사장에 근거하여 서술한 것이다. 원론적이고 추상적이긴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인간다운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것 이 사회실천의 총칙이라는 왕부지의 주장은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총칙을 온전히 실현하기 위해 제시된 방법이나, 실천의 구체적언 내용 및 판단 평가의 기준 또한 우리가 심각하게 고려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여진다. 혹자 는 왕부지의 이런 주장은 일반적이고 추상적이기 때문에, 하등의 효과를 얻기 어렵다고 평가절하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철학사상이라는 것이 현실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하려는 학문이 아니라 그 해결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것인 한, 그와 같은 비판은 아무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분명한 이론적 근거를 갖는 원칙들이 정립된다면,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형편없는 수준의 혼란상은 자연스럽게 소멸되리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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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주로 조선의 사대부들이 남긴 지리산 한시를 통하여 지라산에 대한 그들의 사상적 인식이 어떻게 드러나 았는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비록 유학자 내지는 유학척 교양과 식견,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에 젖어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시이가는 하지만, 그들이 지리산과 관련지어 말한 사상의 폭은 외 형적으록 매우 포괄적으로 나타나 보였다. 하지만 이면적인 성격을 살펴보면 이들 의 유가척 안식도 매우 폭이 좁고, 불교나 도교 그리고 민간신앙에 대한 인식은 매우 자신틀의 편의에 맞추어져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유가적인 인식은 ‘존현’ 정신으로 특정지을 수 있다. 도가적 인식은 ‘유선’ 사상 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불가적 인식은 ‘향도’ 의식으로 특정지을 수 있다. 민간신 앙적 인식은 ‘불배’ 의지로 특정지을 수 있다. 이들이 지리산을 가는 동안, 그리고 지리산 위에서 보고 겪은 것에 지리산에 대 한 인식이 다양하게 드려나 었는데, 지리산을 다녀온 뒤의 생각에도 또한 유가적인 생각을 바탕으후 한 감회를 피력한 것이 많다. 지리산에 오르거나 다녀오니 현 설의 막힌 것 흑은 물든 것이 터지거나 씻어졌다고 감회를 밝혔다. 한마디로 마치 신선세계에 오른 것 같다고도 하였으나, 이들이 현실로 돌아올 때의 사상적 지향 점은 역시 유가로 선회하고 었음을 볼수있다. 유학적 현실에 담갔던 몸을 빼어 지리산으로 향함에 그것에 대한 인식이 유불도 및 민간신앙에까지 미쳤지만 유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다시 현실로 돌 아옴에 유가적 본연으로 회귀함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신선세계의 하나로 일컬어 지고 하고, 가장 많은 절을 안고 있으며, 그 꼭대기에 민간신앙의 대상이 자리잡고 았는 지리산을 읊은 사대부들의 한시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 그것이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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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목적은 금오신화를 중심으로 고소설과 사상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 인가 하는 과제를 연구사적인 관점에서 밝혀보려는 데 있다. 김시습(1435-1493) 문학사상에 대한 주요 논쟁 중 하나는 그의 사상이 기일원론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기일원론은 금오신화 서사논리의 필연성을 밝히려고 시도되었다. 이러한 논의들은 금오신화의 출현 요인으로 조선 초기의 사회 변화 및 사상적 동향과 김시습 개인의 세계관을 중시하였으며, 이를 통해 사상사적인 접근으로 금오신화의 텍스트성을 깊이 이해해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일원론은 인물 의 갈등을 설명하는 데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지만, 금오신화의 역설적 미학까지 해명하지 못하는 한계가 었다. 氣가 상호모순의 원리를 통하여 생성 작용을 한다는 기일원론 측의 주장은, 곧 상반된 두 존재의 同居를 인정하지 않고 대결을 통하여 변증법적으로 변화하는 것 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로는 외부의 대립적 요소 없이, 존재 그 자체의 모순으로 개개의 본질을 그대로 인정한다는 曹洞五位의 논리를 수용할 수 없다. 따라서 기일원론은, 조동오위 포함한 김시습 사상의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曹洞五位要解는 김시습이 마흔 살이 넘어 유교, 불교, 도교 등의 사상을 융합해서 저술한 책으로 추정되는데 , 김시습 사상의 정화가 여기에 결집되어 있다고 말해도 좋으리만큼 중요하고, 또 어려운 저술이다. 그런데 이러한 조동오위의 사상 은 대립 사상이 아니라, 대립과 조화의 양면을 동시에 보여주는 사상이다. 존재론 적으로는 理-元論으로 해석되지만, 변화의 양상을 주목하면 기일원론으로 해석된 다는 점에서 앞으로 조동오위요해 에 근거하여 그의 문학과의 관련성을 깊이 있게 논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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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다산이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東坡蘇載에 대하여, 褒揚하고 貶下한 내용을 考究한 것이다. 다산은 동파를 ‘千古의 奇才’, ‘大儒’, ‘博士’라 했으며, ‘夫子’와 ‘先生’이라고 존칭했고, 그의 뛰어난 문장과 독보적인 지식은 場火에도 죽지 않아 文采는 영원히 빛난다고 포양했다. 그리고 목민관 시절의 善政한 치척을기렸다. 다산은 한편으로는 동파가 長壽와 短命과, 생과 사를 하나로 본 것을 病痛이라 했고, 反高麗노선을 취한 도량이 좁고 은혜가 적은 자이며, 輝學에 울든 이단이 라고 비판했다. 특히 동파의 ‘潮州脩韓文公廟記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上圓丘 合察六議箚子에 대하여 14개항의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 폄하한 것은 茶山學의 浩瀚한 세계를 입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다산은 학자적 양심과 학문적 소신으로 동파를 포폄했다. 다산의 동파론은 중국 문인에 대한 비평의 세계와, 다산학의 一斑 이해하는데 기여가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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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構形에 관한 분석은 한자연구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필수 불가결한 작업으로서 전통 문자학에서 알찍부터 시도되어 왔고 그에 관한 방대한 영의 著作들이 전해지고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전통적인 관점에서의 연구수요 뿐만이 아니라, 한자개혁 • 한자교학 흑은 한자의 電算化등 다양한 분야의 필요성 에 의해 이에 관한 연구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 필자 역시 몇 해 전부터 현재 우리나라에서 통용되고 있는 擔書字形을 대상으로 그 構形분석에 관심을 갖고 일련의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중이다. 과정에서 필자는 해서의 자형을 전통의 편방 개념에 의거해 단순히 의부와 음부로만 구분하고, 不成文字素나 變異字素등 에 관해서는 따로 분석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작업을 마무리해야 하는 단계에 이르러, 포괄적으로 의부와 음부로만 나누어서는 명쾌하게 해결될 수 없었던 부분들을 정리해야 하고, 또한 이 과정에서 그 동안 필자가 견지하고 었던 자소의 개념과 용어 역시 알부 수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였다. 이를 위하여, 본고에 서는 학계에서 사용해 온 기존의 개념과 용어 및 현재 사용되고 있는 개념과 용어 들에 대한 설명과 분석을 통하여 취할 바와 버릴 바를 구하고, 이것으로서 필자의 il3îï던 부분을 보충하여 자소에 대한 개념과 분류에 관한 졸견을 피력해 보고자 하였다. 본고에서는, 필획에서 시작하여 整字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한자를 구성하는 모 든 요소들을 ‘字素’라 하고, 이들 자소들을 크게 두 부류로 구분하여 ‘構形素’와 ‘機能素’로 칭하였다. 구형소는 자형의 構造形態를 분석하고 이를 통하여 그 층차를 파악하가 위한 구별이고, 기능소는 평면적으로 자소가 담당하는 역할을 분석 하기 위한 구별이다. 양자는 서로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고 상호 보완적 관계로서, 모든 기능소는 구형소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며, 모든 구형소는 단독 흑은 두개 이상이 일정한 방법의 조합과정을 거쳐 가능소의 역할을 하게 된다. 구형소는 세분하면 다시 筆劃I字素· 基本字素· 特珠字素• 變異字素· 形體字素등의 네 가지로 구분되며, 필획자소는 구형소 가운데 최하위 단위로서 기본자 소를 비롯한 기타자소를 구성하는 筆形에 관여하는 자소이다. 기본자소는 일련의 독채자와 소수의 합체자가 이에 해당하며, 가능소를 구성하는 根幹역할을 하는 자소이다. 특수자소는 사용범위가 극히 제한되거나 사용빈도가 아주 낮은 자소들을 지칭하는 것이며, 변이자소는 慧變과정에서 자소의 자형을 필사의 편리나 모양을 고려하여 자연스럽게 변화되었거나 의도적으로 변형시킨 경우이고, 그 來源은 대부분 기본자소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 來源을 잘못 파악하여 전혀 다른 형태로 변한 경우도 적지 않다. 형체자소는 특정한 기본자소와 결합했을 때만 일정한 의미를 갖게 되는, 音義가 없이 형체만 존재하는 不成文부호를 지칭하는 것이다. 기능소는 합체자의 분석을 위해 전통적 사용해 온 편방의 개념과 동일하며, 다만 그 명칭을 表意字素(意、符)와 表흡字素(홈符)로 나누었다. 이외에도 자소의 또 다른 분류방법으로 根源字素와 派生字素, 同形字素와 同 義字素, 獨體字素와 合體字素, 成字字素와 非字字素등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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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嘿守堂 崔有海(1 588-1641)의 경학관과 대학 해석에 관해 살핀 것이 다. 묵수당의 경학관은 懷疑를 통한 義理의 發明, 곧 道를 추구하는 것이였다. 그는 이와 같은 관점으후 先需의 설만 固執하는 사람들을 拘需로 보고 墨守主義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런 경학관으로 경전을 해석하였는데, 특히 대학에 관심을 집중하여 아래와 같은 설을 발영하였다. 첫째, 주자의 『대학장구』를 텍스트로 하지 않고 고본대학을 취하여 독자적으로 체제를 개편하였는데, 삼강령을 기본골격으로 하여 明明德傳• 新民傳• 止於 至善傳으로 배열한 뒤, 팔조목을 명명덕의 일로 보아 명명덕전에 포함시켰다. 둘째,명명덕전은 釋明明德• 釋格物致知 · 釋誠意• 釋正心修身 • 釋修身齊家• 釋 齊家治國• 釋治國平天下순으후 배열하여 대체로 『대학장구」의 체제를 따르고 있다. 셋째, 대학의 작자에 대해,經文 제1 절만 孔子의 말씀이고, 경문의 팔조목 공부와 공효를 말한 두 절은 曾子의 말씀이며,나머지는 모두 傳文으로 후인이 지 은 것으로 보았다. 넷째, 明德의 明이 致知로부터 발하기 때문에 명덕이 격물치지 로 연결되어야 하고, 평천하도 自明에 해당하는 명명덕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新民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고 하였다. 다섯째, 『대학장구』 경일장의 제2절 • 제 3 절 • 제 6철 • 제 7철 및 청송장을 합해 격물치지전을 새롭게 구성하였다. 여섯째, 正心章의 四有를 주자차럼 心之用으로 보지 않고 情이 치성해 방탕해진 것으로 보았다. 일곱째, 평천하장의 緊短에 대해 累之以短• 契而巨之를 모두 취하지 않고,以쭉則如方이라는 독특한 해석을 제시하였다. 여덟째, 평천하장의 제 6절부터 제 10절까지의 다섯 절을 제 18 절 뒤로 옮겨놓았다. 아흡째,지어지선전을 功效로 보고 『중용』에서처럼 五引詩로 끝맺었다고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