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물

남명학연구 KCI 등재 The Nammyonghak Study

권호리스트/논문검색
이 간행물 논문 검색

권호

제37권 (2013년 3월) 10

1.
2013.03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의령지역을 대표하는 학자 西岡 李中厚의 생애와 시세계를 다룬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張福樞의 문하에서 학문을 하였으나 중년에 건강이 악화되어 더 이상 공부를 하지 못하고 건강의 회복에 힘을 썼다. 그는 요양에 집중하는 동안에 다른 한편으로는 근검절약하여 가산을 모았고, 부친의 유명에 따라 종족이 돈목하게 지낼 방책으로 別莊을 지어 집안의 大小事를 의논하고 도왔다. 이렇게 하던 공부를 그만두고 집안을 일으키는 데에 평생의 심력을 다한 그에게 자제들이 별장 곁에 西岡精舍를 지어주었다. 그는 만년에 이곳에서 그간 하지 못한 공부를 다시 하면서 집안을 다스렸는데, 무엇보다도 이곳에서 자제들이 열심히 공부하여 가업을 일으켜 주기를 바랐다. 그는 이처럼 질병과 가산을 모으는 일에 힘을 썼지만 선비로서의 도리는 잊지 않아 인근의 지인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 지은 輓詩가 100여 편에 이르고, 또 공부하고 요양하는 여가에 벗들과 모여 명승을 찾아 즐기기도 하였는데 이 때 한편으로는 술을 마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시에 전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시는 상당히 수준에 이르러 그와 절친하게 지내던 深齋 曺兢燮이 시에는 情來·氣來·神來의 三來가 있는데 그의 시는 이것을 거의 이루었다고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시 가운데 가장 분량이 많은 輓詩는 일반적인 만사와는 달리 자신의 슬픈 감정과 마음을 드러내기 보다는 고인의 생애를 정리한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어떤 시는 만시라기보다는 고인의 일생을 정리한 誄詞와 비슷한 성격을 갖는 것이 많다. 반면에 次韻詩는 다른 사람이 지은 시를 따라서 짓는 제약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서정적인 표현을 통하여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많다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2.
2013.03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覺齋 權參鉉은, 평생을 宜寧에서 초야에 묻혀 학자로서 일생을 보냈다. 선조인 霜嵒의 志節을 물려받고, 어린 나이에 淵齋 宋秉璿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栗谷, 尤庵의 학통을 계승한 학자였다. 그는 격변하는 시대조류 속에서 전통 儒學者의 자세를 견지하며 道學의 연구와 보전에 힘썼고, 제자 교육에 誠力을 다했다. 그리고 평생 많은 漢詩文을 저술하여 자신의 감정과 사상을 표현하여 남겼다. 신학문의 보급과 확대 속에서 유학의 보전과 전승에 힘을 다 쏟았지만, 이미 유학은 시대의 主潮가 아니라 국가나 대중으로부터 관심 밖으로 말려나는 상황이었으므로, 시대와 인심은 그의 뜻과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좌절하기 않고 최후의 일각까지도 자신의 召命이 무엇인지를 자각하고 바른 길을 추구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수준 높은 저술과 많은 제자들을 길러 전통유학자로서 마지막 세대를 의미 있게 보냈다. 새로운 문명을 거부한 고루한 儒學者로 볼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 점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3.
2013.03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退休 姜獻之는 肅宗 대에 仕宦한 宜寧의 인물이다. 출처의 대절에 돈독하여 당시 권력 장악의 다툼 속에서 결연히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당호를 退休라 짓고 「漁樵問答」을 지어 자신의 뜻을 표출하였다. 본고는 퇴휴가 혼란한 정국에서 居官하면서도 禍를 입지 않고 온전하게 생애를 마칠 수 있었던 점에 착안하여 그의 남다른 지취에 주목하였다. 그 핵심 요인은 바로 퇴휴가 자신의 호로 삼은 退休라는 의미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퇴휴가 忽忽히 퇴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출사하여 유자로서의 포부는 웅대하였으나 功績과 職位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언제든 퇴휴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인생을 관조하면서 삶의 한 지표였던 퇴휴의 의미가 마음에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에 물러날 때를 알고 퇴처할 수 있었다. 퇴휴는 어버이를 天地와 같은 존재로 여기며 부모님께 事親의 예와 자신의 愛敬을 다하고자 하였다. 학문에 뜻을 두었을 때 역사서를 탐독하여 작자의 법도를 터득하고 사리판단을 하는 분별력을 키웠다. 논의가 直截하였고 大義를 우선하여 쉽게 남을 따르지 않았다는 후인의 평가는 史書에서 받은 영향의 일면이다. 퇴휴의 지취를 살펴보면 첫째 일상을 중시한 면모가 드러난다. 訓蒙을 위해 『小學』을 표준으로 내용을 절취하여 실천이 실제에 번거롭지 않도록 「擊蒙家訓」을 지었다. 고원한 이치의 탐구가 아닌 언행을 단속하며 예로써 자신에게 엄격하였던 퇴휴의 일상이 엿보였다. 둘째 지나친 욕심을 경계하면서 閑居하는 삶을 보여주었다. 벼슬살이에서 퇴처하지 않아 재앙을 당한 역사적 인물을 당대 관료들에게 견주며 만족과 知止를 명심하였다. 따라서 만년에 인생을 반추하고 자연과 더불어 한거하며 自足할 수 있었다. 셋째 靜慮를 통해 마음을 수양하며 樂志하는 삶을 추구하였다. 퇴휴는 본디부터 맑고 밝은 본심을 깨닫기 위해 생각을 고요히 하는 것을 우선하였다. 이러한 과정의 수양을 통하여 정신적 지표를 확고히 해 진정으로 즐기는 삶을 추구할 수 있었다. 퇴휴는 어디에 있든 마음의 가짐에 따라 자신이 있는 곳이 桃源이라고 하여 무한한 정신 경계와 은일한 삶을 지향한 자취를 남겼다.
4.
2013.03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한말과 일제시대에 주리론과 위정척사사상을 고수하였던 의령의 입암 남정우의 교유관계와 학문세계를 분석한 것이다. 입암은 영남의 盧沙 학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로서 寒洲 학파의 인물과 교유가 깊었기 때문에, 한말 유학계를 대표하는 두 학파의 상호교류나 학설의 발전을 살피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입암은 노사학맥에서는 노백헌 정재규, 農山 鄭冕圭, 한주 학맥에서는 俛宇 郭鍾錫, 弘窩 李斗勳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에 그의 성리설은 노사학설과 한주학설이 종합되어 나타난다. 그는 노백헌과 농산의 학설을 한주의 학설과 동일한 心卽理와 理體理用으로 이해하였다. 한주의 심즉리설은 본래 노사의 리주재와 이일분수의 관점을 보다 발전시킨 것이기 때문에 노백헌이 한주의 설을 수용하는데 큰 무리가 없었다. 입암은 허령도 아예 리로 이해하여 노백헌의 심설에서 논란이 되었던 리의 작용성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입암의 심성론은 곧바로 기의 작용을 중시하였던 夷川 南昌熙 등에 의해 심은 기로 보아야 한다는 반박을 받기도 하였으나, 노백헌의 뒤를 이었던 농산이나 송산 등의 지지를 받아 심즉리설이 노백헌의 정통설로 굳어지게 되었다. 또한 입암은 심을 리의 차원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敬을 통해 인심을 억제하고 도심을 온전히 발현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매사에 선악을 구분하여 절대선을 지향하고자 하였으며,예설에서도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의리에 부당하다고 하여 명분에 입각한 예설을 따랐다. 이러한 입암의 학문은 주자와 노사, 노백헌의 학풍을 계승하여 이기, 심성에서의 주리설과 경을 통한 수양을 중시하였으며, 사상적으로는 衛正斥邪를 고수하였다고 할 수 있다.
5.
2013.03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弘堂 李秉灝(1892∼1964)은 宜寧 中橋里에서 태어났으며 저술로 『弘堂文集』을 남겼다. 홍당은 성품이 方正하고 流俗에 휩쓸리지 않는 耿介한 성품을 가졌다고 한다. 학문이 귀중하다는 것을 안 것은 俛宇 郭鍾錫 선생과 艾山 鄭載奎을 만나고 나서다. 한편 1910년 경술국치 이후 深齋先生(1873∼1933)이 은둔하여 정산서당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을 즈음, 23세가 된 弘堂은 1913[癸丑]년 심재선생을 알현하고 다음 해인 1914년 鼎山書堂에서 수학한다. 이곳에서 鄕約으로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 講和會議가 1919년∼1920년 사이에 진행되었을 때, 유림 측에서는 1919년 3·1운동 후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작성하여 보내려고 하였던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에 관련된 俛宇 같은 분은 심재와 긴밀한 관계였는데, 옥고를 치르고 이어 운명하게 된다. 이 일은 홍당선생이 이런 애국계몽기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다. 30세가 넘었을 때 홍당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으며 집안은 매우 화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文山亭과 中和堂에 서재가 있었고 학도를 모아 놓고 강학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文山亭은 삼성 이병철회장의 조부 文山 李洪錫翁이 건립한 것이다. 홍당은 중년이 된 이후에 馬港으로 왔다. 馬港에 우거하고 일을 때 주변에 있는 선비들과 자주 어울리면서도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단아한 모습으로 학문교류를 하며 즐거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학문을 연마하는데 있어서는 자신에게 엄격하였다. 仲兄이 운명하였을 때는 자신의 아들을 양자로 보냈고, 홍당보다 16년 전에 부인이 먼저 운명하게 되었을 때 다시 부인을 맞이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때 문장가로 알려진 山康 卞榮晩(1889~1954)과도 일정한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 서책이 불타 俛宇 같은 분들의 글이 없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홍당은 향년 73세로 馬港에 운명한다. 이때 멀고 가까운 곳에서 모인 유생 수백 명이 조문하고 아쉬워하였다. 『弘堂文集』은 선생이 스스로 교정을 보고, 필사하게 하였는데, 스스로 讀書를 잊지 않고 일생을 살았다는 것을 同好人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라고 밝히고 있다. 특히 그의 문집을 보면 만년에 학문이 더욱 정교 해졌고, 論辨도 휼룡한 것이 많았다고 한다. 홍당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선은 과거제도가 폐지되는 등 전통 사회가 변화하는 시기였다. 심재와 홍당은 宋學을 중심에 두고 학문을 한 분이다. 홍당이 고찰한 학문 세계 중에 유달리 퇴계 이황으로 이어지는 理氣論을 계승 발전시킨 내용이 자주 나타나게 되는데, 바로 이런 학문적 연원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주희는 자신이 살던 시대를 불교에 맞선 유학이 위기를 맞은 시대로 파악하였듯이 홍당은 국난이라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자기가 살던 시대를 바라보았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先祖와 연관지어 홍당의 인생행로를 짐작할 수 있기도 하다. 11대 조상 芝峯은 명리를 떠난 선비였다. 芝峯은 임진왜란 때 火旺城 전투에서 곽재우와 같이 참전하였다. 홍당이 시대를 아파할 때 남명과 곽재우처럼 다시 深齋와 俛宇을 만났고 이것은 자신의 삶에 커다란 의미로 다가온 것으로 보인다. 홍당을 통하여 영남 의령에서 거의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유학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6.
2013.03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栗山 田相武는 舊韓末 宜寧에서 살았던 인물로, 江右地域을 대표하는 儒學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激變하는 시대를 살면서 유학자로서의 自存意識과 正體性을 잃지 않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다. 이 논문은 그의 詩世界를 통하여 그가 살아온 삶의 흔적과 학문적 성향을 탐구해 보고자 하였다. 이는 특정한 지역의 인물을 발굴하여 조명함으로써 학계에 널리 알리고자 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둔 때문이다. 그 결과 日本이 懷柔策의 일환으로 집요하게 제시한 ‘恩賜金’을 栗山이 끝까지 거부하였다는 것과 그 편지를 총독부에 보내서 排日意識을 提高하여 자존의식을 고취시켰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한 不戶籍, 不墓籍을 주장하여 일본의 政策에 抗拒하는 글을 남겼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獨立宣言書’의 33인에 참여하여 국가를 위한 救國의 念願을 펼치기도 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정서적인 뒷받침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는 곧 그가 평소에 體得해 온 實踐躬行의 도리를 몸소 실천함으로써 그의 儒學者的 삶을 지켜온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정황을 역시 「赤猿日記」와 「西行日錄」을 써서 그가 당시에 보고 들은 사항과 그의 정서를 기록으로 남겼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가 일생을 단순히 明哲保身의 일환으로 삶을 영위한 것이 아니라 시대의 아픔을 여러 문학적인 요소를 활용하여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적지 않은 소득이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이 논문은 그의 正體性을 어느정도 이해하는 한편, 앞으로 지속적인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일정한 意義를 갖는다.
7.
2013.03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인조반정 직후 내암 정인홍 문인들의 불안 요인과 그에 대한 대응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정인홍의 문인들은 광해군 정권 시절 조야에서 폭넓게 활동하다가,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대거 숙청되어 이후로 막연한 불안감이 정인홍 문인들 사이에서 형성되었다고 판단된다. 또한 이들은 반정에 불복하는 세력을 형성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발각되어 대규모의 옥사가 일어난다. 이로써 정인홍 문인들의 불안은 더욱 가중 되었고, 불안 요인 또한 증폭된 것으로 보인다. 정인홍 문인들의 일차적인 불안 요인은 자신과 스승 정인홍과의 관련성이었다. 박건갑은 정인홍의 회퇴변척을 옹호하는 소를 올린 적이 있는데, 1624년 10월 옥사에 연루된 박건갑 3부자(박규·박구)의 추국 기록에는 첫머리부터 ‘정인홍의 여얼’이라는 내용을 명시하고 있으며, 박건갑은 이에 대한 해명으로 자신들과 정인홍은 친인척 관계가 없음을 실례를 통해 증명하였다. 특별한 죄상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들에게 중형이 내려졌고, 이후 몇 차례의 옥사를 통해 정인홍 문인들의 불안 요인은 더욱 확대되고 구체화되었다. 1631년 2월 옥사의 주모자로 지목된 정한은 추국청에서 자신은 광해군 시절 정온·이대기 등과 의견을 함께 했음을 강조하며, 자신은 애초에 대북과 거리를 두었음을 역설하였다. 또한 이 옥사 발생 직후인 1631년 3월, 박인·허돈 등 인근 유림들이 덕천서원에서 회합한 일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정인홍이 지은 남명신도비문에 대한 처리 문제를 상의하였고 결국 폐기하는 쪽으로 결론이 난 것으로 판단된다. 강우지역의 인물이 대거 연루되어 처형 등의 처벌을 당한 상황에 직면한 정인홍 문인들이 나름의 자구책을 강구한 것이다. 1633년 3월에 발생한 옥사에서는 임석간에 의해 대구·고령·성주 지역 인물들이 고발되었는데, 이들은 앞선 1631년 옥사의 주동자 박희집과의 관련성을 추궁받았다. 박희집과 그의 집안은 정인홍과의 관련이 밀접한 바, 불안의 요인은 정인홍 주변 인물과의 관련성으로 확대되는 경향을 띄게 되는 것이다. 정훤은 우연하게 이 사건에 연루되었는데, 정인홍 문인이었던 자신에 대한 변명으로 대북 시절 폐모에 반대했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었다.
8.
2013.03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조선 중기 德溪 吳健(1521-1574)의 학문에서 그의 성리학적 경세론을 알아보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하여 먼저 덕계의 학문적 배경과 그가 활동하던 조선시대의 상황을 검토하였다. 그리고 덕계가 강조한 국가의 비전과 대책을 살펴보았다. 이상의 연구결과 덕계의 經世觀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덕계의 경세관은 정통 성리학의 이념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구체적인 정치현장에서 정통유학의 의리를 그대로 실천하였다. 그는 유학의 정치 이념을 충실하게 실천한 實踐儒學者였다. 둘째, 言論은 소통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言論은 正義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언론은 역사의 기록이자 志操 곧 正義의 기록이다. 덕계는 정치에 있어서의 疏通은 바로 이 正義를 중심으로 한 자유로운 言路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셋째, 덕계의 君主論은 聖人君主의 실현이 목표였다. 덕계는 군주의 덕목으로 謙遜・慕善・樂善・敬・誠 등을 강조하였다. 재능 보다는 德을, 威嚴보다는 겸손함을, 말 보다는 실천을 중시하였다. 왜냐하면 誠實하지 않은 지도자는 자신의 말을 책임지지 않기 때문이다. 덕계는 성리학의 理想을 실현하기 위하여 꿋꿋하게 노력한 선각자였다.
9.
2013.03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호남지역 유학자들의 초기 箴 작품은 蘇沿(1390-1441)이 창작한 것으로부터 李恒(1499-1576)이 지은 것에 이르기까지 총 6편이 지어졌다. 그 가운데 2편이 中宗에게 올려진 官箴이다. 그리고 경전 구절을 해석한 것이 3편, 전대의 작품에 차운하여 계승한 것이 1편으로, 의리의 발현을 수사 기법으로 삼은 작품이 상당한 비율을 차지한다. 중기는 箴을 지은 유학자가 4명밖에 되지 않아 초기에 비해 인원수가 더욱 줄었지만, 작품의 수량은 7편으로 1편이 더 많이 늘어났다. 하지만 安邦俊(1573-1654)으로부터 黃胤錫(1729-1791)에 이르기까지 150년이 넘는 시기 동안 4명의 유학자가 7편의 작품을 지었다는 것은 초기와 마찬가지로 매우 영성한 상황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中庸』 제1장의 ‘莫見乎隱’을 해석한 황위의 「莫見乎隱箴」을 제외하고는 모두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할 수양의 덕목을 해설한 내용들이다. 다만 경계하는 대상이 자신에게 한정되느냐 아니면 자식이나 주변의 타인에게 확장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개인적인 용도인 私箴의 범위를 벗어나는 작품은 없다. 후기는 초기 및 중기에 비해 거의 5~6배가 넘을 정도로 많은 분량의 箴 작품이 창작되었다. 그리고 경계의 내용과 방법이 이전과 달리 다양하게 확산되는 경향을 보인다. 奇正鎭(1798-1880)으로부터 柳永善(1893-1961)에 이르기까지 100년 동안 14명의 유학자에 의해 37편의 箴이 지어졌다. 이 시기는 이전보다 양적으로도 월등하게 많을 뿐만 아니라, 수사 기법도 다양한 양상으로 서술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타인을 경계한 작품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구한말의 절박한 시대적·역사적 상황 때문에 箴을 통해 同道의 사람들에게 권면하고자 하는 의식이 반영된 현상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자신 및 학파가 주창하는 성리설을 箴의 문체로 드러내어 밝히고자 한 것도 이전 시기에는 없는 하나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10.
2013.03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오늘날 유학은 그 존립의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공자가 요순시대를 이상으로 생각하면서, 주나라의 주공이 만든 통치체계를 모델로 하여 정립한 것이 유학이다. 유학자는 경전과 육예에 밝으면서 여러 형태의 의례를 집행하는 사람으로 정의되었다. 공자로부터 유학의 목적은 ‘극기복례’로 규정되었고, 이후에는 이 개념이 ‘수기치인’과 ‘내성외왕’으로 확대되었다. 내면적 인격을 완성하고, 이를 통하여 이상적 정치를 구현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념은 왕조시대의 통치논리를 정당화 하는 것이지, 오늘날의 민주주의 체제에는 맞지 않는다. 본고는 유학의 현대적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하나의 모색이다. 전통적으로 유학은 중용을 중요한 덕목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공자 이전의 유학은 ‘황극’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으며, 공자로부터 ‘중용’이 강조되면서 커다란 변신을 가져왔다고 본다. 이에 대해서는 북송시대의 승려인 계숭이 파악한 유학의 본질에 대한 관점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 또한 왕조시대의 인물이었으므로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필자는 오늘날 유학은 새로운 변신이 필요하며, 그 중심에 근본 덕목의 변화가 요구된다고 보면서 이를 ‘大公’으로 제시한다. 정치의 형태에 따라 고대 요순시대에는 천자가 중심이 되어 ‘황극’에 의지해 ‘덕화’를 시행하였으며, 공자 이후로는 사대부가 중심이 되어 ‘중용’에 의지해 ‘교화’를 시행하였다고 파악한다. 그리고 오늘날은 국민 모두가 중심이 되어 ‘대공’에 의한 ‘同化’가 시행되어야 하며, 그 세부절목의 마련이 필요하다고 본다. 유학이 꿈꾸는 이상사회는 ‘大中至正’한 사회이다. 어느 편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모두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가는 사회를 의미한다. 이러한 사회는 민주주의의 공화국 체제에서 가장 용이하게 달성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유학의 역할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예의의 강조이다. 각종 제례에서의 예의는 이미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가정과 사회에서의 공공예절은 어느 시대에나 필요한 것이다. 오늘날의 유학이 스스로의 존속을 위한 정체성의 확보를 위해서는 예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현대사회에 필요한 예의 절목을 마련하여 모두가 함께 지키도록 홍보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