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는 澗隱 林台煥(1874-1929)의 생애를 개괄하고, 그의 시대 인식과 學的 지향을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 임태환의 자필 원고 『睡語』를 활용하였다. 임태환은 林谷 林眞怤의 9대손으로, 그의 가계와 혼맥은 南冥學派的 경향이 강하다. 그는 三嘉 大田에서 遺腹子로 태어나, 백형 林宗煥의 보살핌으로 성장했다. 어린 시절부터 인근에 있던 朴致馥·許愈·尹夏植 등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에게 배웠고, 郭鍾錫·尹冑夏의 영향을 받았다. 33세 때부터는 다수의 종족들이 세거하던 安義 葛溪로 이주하였는데, 이 때문 에 교유 범위도 삼가·단성·합천·안의·거창 등지에 걸쳐 있었다. 또한 안의, 삼가 등지에서 강학 활동을 지속했는데, 특히 1919년 무렵 栗里書塾에서 20세 전후의 학생들에게 1년 남짓 四書와 『詩經』등을 지도하였다. 임태환은 儒學的 전통이 있는 가계에서 성장하여 당대의 名儒를 사사하였으며, 학생들을 교육한 내용도 전통 학문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았다. 그는 조선이 망할 무렵 태어나 기존의 유학적 질서가 통용되지 않는 일제강점기를 살았지만, 전통 학문을 고수하면서 유학이 부흥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강학 활동을 지속하였다. 그는 儒道의 扶持를 사명으로 여겼고, 유학의 핵심적 가치인 節義를 중시하였다. 특히 당시대의 郭鍾錫이 桐溪 鄭蘊(1569-1641)의 절의를 계승했다고 인식하였다. 이민족의 침입에 대항하여 목숨을 내걸었던 두 인물의 절의가 유학적 가치의 시대적 발현이라 여긴 것인데, 독립운동을 하던 族姪 林有棟의 절의를 높이 평가한 부분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 글은 조선시대 현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안계 마을에 거주했던 진양 하씨(안계 하씨)가 혼인을 맺은 집안[婚班]의 성격을 구명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이를 통해 안계 하씨 집안이 지닌 정치사회적 성격이 드러날 것이다. 안계 하씨는 15세기 중후반부터 안계 마을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는데, 이후로 1900년에 태어난 인물들까지 이 집안에서 맺은 혼인의 건수는 568건에 달한다. 혼반의 수는 50개의 성씨, 108개의 본관이며, 대체로 경상우도 지역에 세거하던 집안이다. 안계 하씨 혼반의 성격은 초기의 혼반에서 대체적으로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入鄕 초기부터 河弘度·河弘達·河澈·河泳의 주도 하에서 결정된 혼반까지의 숫자는 20개 성씨 28개 본관인데, 이들 혼반의 특징은 ‘德川書院 운영 주도 및 참여’, ‘曺植 문인 및 사숙인’, ‘鄭仁弘 관련’, ‘北人 관련’, ‘壬亂 참전’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을 지닌 초기 혼반과 혼인을 한 건수는 전체의 약 25%에 달하며, 이러한 특징을 지닌 여타 혼반과도 지속적으로 혼인을 맺었다. 또한 인조반정 이후에는 대체로 남인 계열의 집안과 혼인하였는데, 그중에서 남인의 색채가 짙은 혼반도 있었다.
이 글에서는 介庵 姜翼(1523-1567)의 학문 특징을 살펴보고 그의 학문 지향이 문학작품에서 어떻게 표출되고 있는가를 중점적으로 서술 하였다. 강익은 당대 함양 지역의 대표적인 유학자로 평생을 수양으로 일관하였고, 남계서원 건립을 주도하는 등 유학의 사회적 보급에도 힘 을 기울인 인물이다. 이러한 강익의 학문 특징은 그가 남긴 記文에 집약 되어 있다. 강익은 이른 나이에 과거를 포기하고 爲己之學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학문에 정진하였는데, 이는 스승 唐谷 鄭希輔(1486-1547)나 南冥 曺 植(1501-1572)의 영향 외에도 자신의 과단한 실천 성향이 그 기저에 자리했다. 과단한 실천 성향이 위기지학을 확고히 실천하도록 만든 요 인이며, 성현의 본지를 ‘自得’하는 학문 방법을 통해 더욱 정교한 실천 을 도모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조식은 강익에 대해 ‘끝을 잘 맺을 것이 분명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하였다. 강익에게서는 문학에 대한 뚜렷한 관점이 감지되지 않는데, 이는 문 학에 대한 고민보다 심신수양에 역점을 두었던 그의 학문 지향에서 기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그의 학문 지향이 집약된 작품이 「양 진재기」이다. 강익은 「양진재기」에서 양진재를 건립하게 된 경위와 택지의 이유 및 의도 등을 설명하였다. 이 작품에서 강익은 성정의 참됨[性情之眞] 을 기르고자 외부와 격리된 곳에 택지를 하고, 주변의 자연물과 자신의 공부방이 교감할 수 있도록 안배하였으며, 수양을 돕는 물건들도 주위 에 배치하였다. 즉 「양진재기」는 강익의 자기 수양을 위해 자연물·인공 물을 가려서 배치하고 연출한 의도와 그 속에서 성정의 참됨 기르고자 했던 학문적 지향이 담긴 글이다. ‘양진재’가 본인의 학문 정진을 위해 사적 공간을 의도대로 조직한 건물이라면, ‘남계서원’은 학문의 표본을 제시함으로써 지역사회에 유 학을 널리 장려하고자 설립한 건물인데, 이러한 강익의 학문적 지향이 표출된 글이 「남계서원기」이다. 「남계서원기」에서는 一蠹 鄭汝昌을 제 향해야 하는 도학적 당위와 서원의 교육·교화적 기능을 주로 설명하였 다. 인간만이 도를 사회에 실천할 수 있는데 이는 도를 지닌 사람만이 가능하므로 정여창과 같은 선현을 서원에 제향하여 추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선현을 서원에 모시고 제사지내는 의식이 학생들을 고무 시키는 측면이 있으며, 이를 통해 정여창의 도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유학이 부흥할 거라는 것이다. 강익은 두 편의 記文을 통해 내면으로 학문을 실천하려는 의지와 대외적으로 학문을 장려하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16세기 초반부터 조식·이황과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여 유학자로서의 표상을 정립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일관되게 유학적 가치를 실천하고 보급한 강익과 같은 인물이 등장하여 사림의 자기 정체성이 더욱 뚜렷해졌던 것이다.
이 글에서는 陜川 三嘉에 있었던 龍巖書院 운영주체들의 성격과 활동을 고찰하였는데, 특히 인조반정 이후 그들이 보여주었던 학문적 지향에 관해 주로 논의하였다. 또한 1609년에 공히 사액되었던 德川書院ᆞ新山書院 등 타 남명 제향 서원의 경우와 비교해 봄으로써, 용암서원 운영주체들의 특징을 좀더 부각시키고자 하였다.용암서원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1601년경 재건되었는데, 이때 관여한 인물 다수가 鄭仁弘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용암서원의 원장ᆞ원임을 맡은 인물로는 정인홍, 文景虎, 李屹, 鄭蘊, 林眞怤, 朴絪 등이 있는데, 정온ᆞ임진부ᆞ박인은 인조반정 이후에도 용암서원 내에서 남명 선양 사업을 활발히 진행하였고, 덕천ᆞ신산서원의 추가 배양 논의에서도 남명 위상의 제고를 위한 방법을 제시하였다.임진부는 용암서원에서의 강학을 통해 남명 정신을 강조했고, 박인은 남명 관련 기록물의 정리ㆍ편집을 맡았는데, 이 일들을 정온의 자문을 받아 진행하였다. 정온은 趙任道에게 신산서원 원장을 맡길 만큼 용암서원ㆍ신산서원 내에서 영향력이 있었고, 조임도는 용암서원 측의 입장을 참고하며 신산서원 내의 일을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한편 덕천서원에서는 1635년 무렵 覺齋 河沆을 배향하려는 논의가 있었다. 여기서 사액서원의 지위를 포기하면서까지 배향을 강행하려는 의견도 있었지만, 정온 등 용암서원 운영주체 측에서는 사액의 지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함과 동시에 하항 외에 鄭逑 등 남명 高弟를 함께 배향해야 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인조반정 이후 추락해가는 남명의 위상을 제고할 방법을 모색한 것인데, 정구에게서 남명의 영향을 지우려는 집단의 반대로 결국 실현되지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정인홍이 생전에 추구했던 남명 선양 정신의 잔존이라 할만하다. 신산서원에서 金宇顒만을 제향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도 이들 용암서원 운영주체들은 정구도 함께 배향할 것을 주장하였다.인조반정 이후 덕천서원ᆞ신산서원에서는 서원 내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집단끼리 논의하고 충돌함으로써, 반정 이후 바뀐 환경에서 적응할 방법을 모색해 나갔다면, 용암서원은 변신이 불가능할 정도로 정인홍 계열의 영향력이 컸던 곳으로 판단되지만, 이러한 점 때문에 인조반정 이후에도 한동안은 정인홍의 정신을 계승하여 남명학의 학습과 교육, 정리와 출판 사업 등이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글은 인조반정 직후 내암 정인홍 문인들의 불안 요인과 그에 대한 대응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정인홍의 문인들은 광해군 정권 시절 조야에서 폭넓게 활동하다가,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대거 숙청되어 이후로 막연한 불안감이 정인홍 문인들 사이에서 형성되었다고 판단된다. 또한 이들은 반정에 불복하는 세력을 형성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발각되어 대규모의 옥사가 일어난다. 이로써 정인홍 문인들의 불안은 더욱 가중 되었고, 불안 요인 또한 증폭된 것으로 보인다.
정인홍 문인들의 일차적인 불안 요인은 자신과 스승 정인홍과의 관련성이었다. 박건갑은 정인홍의 회퇴변척을 옹호하는 소를 올린 적이 있는데, 1624년 10월 옥사에 연루된 박건갑 3부자(박규·박구)의 추국 기록에는 첫머리부터 ‘정인홍의 여얼’이라는 내용을 명시하고 있으며, 박건갑은 이에 대한 해명으로 자신들과 정인홍은 친인척 관계가 없음을 실례를 통해 증명하였다. 특별한 죄상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들에게 중형이 내려졌고, 이후 몇 차례의 옥사를 통해 정인홍 문인들의 불안 요인은 더욱 확대되고 구체화되었다.
1631년 2월 옥사의 주모자로 지목된 정한은 추국청에서 자신은 광해군 시절 정온·이대기 등과 의견을 함께 했음을 강조하며, 자신은 애초에 대북과 거리를 두었음을 역설하였다. 또한 이 옥사 발생 직후인 1631년 3월, 박인·허돈 등 인근 유림들이 덕천서원에서 회합한 일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정인홍이 지은 남명신도비문에 대한 처리 문제를 상의하였고 결국 폐기하는 쪽으로 결론이 난 것으로 판단된다. 강우지역의 인물이 대거 연루되어 처형 등의 처벌을 당한 상황에 직면한 정인홍 문인들이 나름의 자구책을 강구한 것이다.
1633년 3월에 발생한 옥사에서는 임석간에 의해 대구·고령·성주 지역 인물들이 고발되었는데, 이들은 앞선 1631년 옥사의 주동자 박희집과의 관련성을 추궁받았다. 박희집과 그의 집안은 정인홍과의 관련이 밀접한 바, 불안의 요인은 정인홍 주변 인물과의 관련성으로 확대되는 경향을 띄게 되는 것이다. 정훤은 우연하게 이 사건에 연루되었는데, 정인홍 문인이었던 자신에 대한 변명으로 대북 시절 폐모에 반대했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