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Examination on Yulsan Jeon Sangmu’s Poetry
율산 전상무의 시세계에 대한 일고찰
栗山 田相武는 舊韓末 宜寧에서 살았던 인물로, 江右地域을 대표하는 儒學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激變하는 시대를 살면서 유학자로서의 自存意識과 正體性을 잃지 않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다. 이 논문은 그의 詩世界를 통하여 그가 살아온 삶의 흔적과 학문적 성향을 탐구해 보고자 하였다. 이는 특정한 지역의 인물을 발굴하여 조명함으로써 학계에 널리 알리고자 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둔 때문이다.
그 결과 日本이 懷柔策의 일환으로 집요하게 제시한 ‘恩賜金’을 栗山이 끝까지 거부하였다는 것과 그 편지를 총독부에 보내서 排日意識을 提高하여 자존의식을 고취시켰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한 不戶籍, 不墓籍을 주장하여 일본의 政策에 抗拒하는 글을 남겼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獨立宣言書’의 33인에 참여하여 국가를 위한 救國의 念願을 펼치기도 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정서적인 뒷받침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는 곧 그가 평소에 體得해 온 實踐躬行의 도리를 몸소 실천함으로써 그의 儒學者的 삶을 지켜온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정황을 역시 「赤猿日記」와 「西行日錄」을 써서 그가 당시에 보고 들은 사항과 그의 정서를 기록으로 남겼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가 일생을 단순히 明哲保身의 일환으로 삶을 영위한 것이 아니라 시대의 아픔을 여러 문학적인 요소를 활용하여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적지 않은 소득이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이 논문은 그의 正體性을 어느정도 이해하는 한편, 앞으로 지속적인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일정한 意義를 갖는다.
Yulsan Jeon Sangmu was living in Uiryeong in the late period of Joseon, and was one of the Confucian literati representing the Nakdong river’s Western area. Living through an era of drastic changes, he unceasingly tried hard to maintain his self-esteem and self-identity as one of Confucian literati. This paper tries to study the traces of his life and his academic tendency through his poetry. It is because the goal of this study is to discover and cast light upon a regional historic figure and to introduce him widely to the academia.
For the result, it is learned that Yulsan enhanced anti-Japanese ideology and stirred up the self-sesteem by refusing ‘eunsageum(royal bounty)’ stubbornly suggested by Japan as a conciliatory policy with his letter sent to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Also, it is verified that he wrote some articles asserting refusal of family-registration and refusal of grave-registration against Japanese policies. And, the research could infer the emotional background for the fact that he participated the Korea’s Declaration of Independence as one of the 33 representatives to realize his aspiration of saving his country.
It can be said that his such actions were derived from the result of the maintenance of his Confucian life by practicing the principles of living up to his faith which was attained through his daily life. Such a circumstance can be checked out by the fact that he recorded his experiences and his feelings in Jeokwonilgi(「赤猿日記」) and Seohaengilrok(「西行日錄」).
Most of all, it is a considerable attainment that this study learned he did not lead a sagacious self-preserving life but recorded his contemporary pain through applying various literary elements. Therefore, the meaning of this paper is to understand his self-identity to some degree and to arrange the opportunity for continual research in the fu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