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弘堂 李秉灝의 學問과 그 시대적 意義 KCI 등재

A study on the scholarship of Hongdang[弘堂] LeeBuongHoo[李秉灝] and its meaning.

홍당 이병호의 학문과 그 시대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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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연구 (The Nammyonghak Study)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The Nammyong Studies Institute)
초록

弘堂 李秉灝(1892∼1964)은 宜寧 中橋里에서 태어났으며 저술로 『弘堂文集』을 남겼다. 홍당은 성품이 方正하고 流俗에 휩쓸리지 않는 耿介한 성품을 가졌다고 한다. 학문이 귀중하다는 것을 안 것은 俛宇 郭鍾錫 선생과 艾山 鄭載奎을 만나고 나서다.
한편 1910년 경술국치 이후 深齋先生(1873∼1933)이 은둔하여 정산서당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을 즈음, 23세가 된 弘堂은 1913[癸丑]년 심재선생을 알현하고 다음 해인 1914년 鼎山書堂에서 수학한다. 이곳에서 鄕約으로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 講和會議가 1919년∼1920년 사이에 진행되었을 때, 유림 측에서는 1919년 3·1운동 후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작성하여 보내려고 하였던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에 관련된 俛宇 같은 분은 심재와 긴밀한 관계였는데, 옥고를 치르고 이어 운명하게 된다. 이 일은 홍당선생이 이런 애국계몽기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다.
30세가 넘었을 때 홍당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으며 집안은 매우 화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文山亭과 中和堂에 서재가 있었고 학도를 모아 놓고 강학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文山亭은 삼성 이병철회장의 조부 文山 李洪錫翁이 건립한 것이다. 홍당은 중년이 된 이후에 馬港으로 왔다. 馬港에 우거하고 일을 때 주변에 있는 선비들과 자주 어울리면서도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단아한 모습으로 학문교류를 하며 즐거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학문을 연마하는데 있어서는 자신에게 엄격하였다. 仲兄이 운명하였을 때는 자신의 아들을 양자로 보냈고, 홍당보다 16년 전에 부인이 먼저 운명하게 되었을 때 다시 부인을 맞이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때 문장가로 알려진 山康 卞榮晩(1889~1954)과도 일정한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 서책이 불타 俛宇 같은 분들의 글이 없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홍당은 향년 73세로 馬港에 운명한다. 이때 멀고 가까운 곳에서 모인 유생 수백 명이 조문하고 아쉬워하였다. 『弘堂文集』은 선생이 스스로 교정을 보고, 필사하게 하였는데, 스스로 讀書를 잊지 않고 일생을 살았다는 것을 同好人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라고 밝히고 있다. 특히 그의 문집을 보면 만년에 학문이 더욱 정교 해졌고, 論辨도 휼룡한 것이 많았다고 한다.
홍당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선은 과거제도가 폐지되는 등 전통 사회가 변화하는 시기였다. 심재와 홍당은 宋學을 중심에 두고 학문을 한 분이다. 홍당이 고찰한 학문 세계 중에 유달리 퇴계 이황으로 이어지는 理氣論을 계승 발전시킨 내용이 자주 나타나게 되는데, 바로 이런 학문적 연원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주희는 자신이 살던 시대를 불교에 맞선 유학이 위기를 맞은 시대로 파악하였듯이 홍당은 국난이라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자기가 살던 시대를 바라보았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先祖와 연관지어 홍당의 인생행로를 짐작할 수 있기도 하다. 11대 조상 芝峯은 명리를 떠난 선비였다. 芝峯은 임진왜란 때 火旺城 전투에서 곽재우와 같이 참전하였다. 홍당이 시대를 아파할 때 남명과 곽재우처럼 다시 深齋와 俛宇을 만났고 이것은 자신의 삶에 커다란 의미로 다가온 것으로 보인다. 홍당을 통하여 영남 의령에서 거의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유학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Hongdang[弘堂] who was born in Uiryeong-gun[宜寧] and lived from 1892 to 1964. He left a collection of his works that is called Hongdangmonjip[弘堂文集]. He is an honest and upright person. This paper investigated into Hongdangmonjip[弘堂文集] and find out what he is and he is doing in his life time.
Hongdang[弘堂] succeed to the philosophy of Neo-Confucianism. And his thinking was based on the phlisopher of Leehuang李滉. And when he was 23, he went to SimZe深齋 and received lessons and he is a monitor of his student.
During 1919 peace conference in Paris, many Korean confucian scholars who is the teacher of Hongdang[弘堂] like MunWoo俛宇 and HyeBong晦峯 intnded to give message to 1919 peace conference in Paris. But Japanese official found out that happening and sent many Korean confucian scholars like MunWoo俛宇 and HyeBong晦峯.
At his life time Confucianism is on the decline. Many Confucian scholar think that things are circulating, so someday Confucianism recover its previous prosperity. And Hongdang[弘堂] also have thinking, so maintains his way of life style shuh as memoring Confucian books everyday and pay his respoct to the household shrine everyday.
And there are many independent activists around his acquaintance like MunWoo俛宇 and HyeBong晦峯. About 400 hundreds years ago from Hongdang[弘堂], there was a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In this war many NamMung南冥's pupils participated in this war around the province of in Uiryeong-gun[宜寧]. And among this pupil, JiBong芝峯 who is the ancestors of Hongdang[弘堂].
Maybe Hongdang[弘堂] is one of the last Confucianist Who lives and studies Confucian books.

목차
Ⅰ. 서론
Ⅱ. 생애
Ⅲ. 학문과 그 의의
Ⅳ. 결론
저자
  • 金東錫(성균관대 한문학과 초빙교수) | 김동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