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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색결과 4

        1.
        2011.10 구독 인증기관·개인회원 무료
        한국에서 한자를 사용한 지 1000년이 넘었고 한자와 한자어는 한국 언어의 골간을 이룬다. 한국 한자어는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적지 않을 변화를 겪고 나서 독특한 한국 언어문화를 만들어낸다. 조선 시대에 莊子나 老子에서 나온 글로는 과거에 합격할 수 없었고, 중국 소설 문체도 사용이 금지 되었다. 이런 배경은 한국 한자어 특징을 이루는 데 중요한 요소이다. 이 글은 한국 한자어의 특징을 밝히기 위하여 다음 5 가지 경우로 나누어 살펴 보고자 한다. 첫째, 한국의 한자어를 일본의 當用漢字를 改正한 常用漢字, 그리고 중국어 한자어와 字形을 비도 해보았다. 한국어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있는 한자어와 차이를 살펴보았고 중국어는 바이두에서 사전에서 검색하였다. 그 결과 한국의 한자어의 자형은 상용한자, 중국 한자어를 혼용하여 사용한다. 이는 한국 한자어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둘째, 한국 한자어를 중국 한자어와 비교하였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있는 그 용법이나 설명에 있어 중국 한자어에 비하여 간단하고, 세밀하지 못하다. 셋째, 한국 한자어는 중국 한자어를 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두 글자의 중국 한자어 중에 [서술어+목적어]로 되어 있는 경우는 변용되거나 뒤에 ‘하다’라는 말을 붙이곤 한다. 넷째, 한국어AB=BA 형식이다. 본고에서는 기존 연구를 소개하는 데 그친다. 한국어 한자어의 중요한 특징으로 그 뜻이 중국 한자어와 어떤 차이를 보이고 있는지, 또 어떤 의미 차이가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연구할 여지가 있다고 본다. 다섯째, 기타 특징으로 고대어와 유교문화, 불교 문화, 나아가서는 일본 근대 한자어 같은 것도 한국 한자어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이미 어느 정도 학계의 성과가 있지만 더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 글에서는 다루지 못한다.
        2.
        2013.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弘堂 李秉灝(1892∼1964)은 宜寧 中橋里에서 태어났으며 저술로 『弘堂文集』을 남겼다. 홍당은 성품이 方正하고 流俗에 휩쓸리지 않는 耿介한 성품을 가졌다고 한다. 학문이 귀중하다는 것을 안 것은 俛宇 郭鍾錫 선생과 艾山 鄭載奎을 만나고 나서다. 한편 1910년 경술국치 이후 深齋先生(1873∼1933)이 은둔하여 정산서당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을 즈음, 23세가 된 弘堂은 1913[癸丑]년 심재선생을 알현하고 다음 해인 1914년 鼎山書堂에서 수학한다. 이곳에서 鄕約으로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 講和會議가 1919년∼1920년 사이에 진행되었을 때, 유림 측에서는 1919년 3·1운동 후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작성하여 보내려고 하였던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에 관련된 俛宇 같은 분은 심재와 긴밀한 관계였는데, 옥고를 치르고 이어 운명하게 된다. 이 일은 홍당선생이 이런 애국계몽기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다. 30세가 넘었을 때 홍당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으며 집안은 매우 화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文山亭과 中和堂에 서재가 있었고 학도를 모아 놓고 강학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文山亭은 삼성 이병철회장의 조부 文山 李洪錫翁이 건립한 것이다. 홍당은 중년이 된 이후에 馬港으로 왔다. 馬港에 우거하고 일을 때 주변에 있는 선비들과 자주 어울리면서도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단아한 모습으로 학문교류를 하며 즐거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학문을 연마하는데 있어서는 자신에게 엄격하였다. 仲兄이 운명하였을 때는 자신의 아들을 양자로 보냈고, 홍당보다 16년 전에 부인이 먼저 운명하게 되었을 때 다시 부인을 맞이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때 문장가로 알려진 山康 卞榮晩(1889~1954)과도 일정한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 서책이 불타 俛宇 같은 분들의 글이 없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홍당은 향년 73세로 馬港에 운명한다. 이때 멀고 가까운 곳에서 모인 유생 수백 명이 조문하고 아쉬워하였다. 『弘堂文集』은 선생이 스스로 교정을 보고, 필사하게 하였는데, 스스로 讀書를 잊지 않고 일생을 살았다는 것을 同好人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라고 밝히고 있다. 특히 그의 문집을 보면 만년에 학문이 더욱 정교 해졌고, 論辨도 휼룡한 것이 많았다고 한다. 홍당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선은 과거제도가 폐지되는 등 전통 사회가 변화하는 시기였다. 심재와 홍당은 宋學을 중심에 두고 학문을 한 분이다. 홍당이 고찰한 학문 세계 중에 유달리 퇴계 이황으로 이어지는 理氣論을 계승 발전시킨 내용이 자주 나타나게 되는데, 바로 이런 학문적 연원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주희는 자신이 살던 시대를 불교에 맞선 유학이 위기를 맞은 시대로 파악하였듯이 홍당은 국난이라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자기가 살던 시대를 바라보았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先祖와 연관지어 홍당의 인생행로를 짐작할 수 있기도 하다. 11대 조상 芝峯은 명리를 떠난 선비였다. 芝峯은 임진왜란 때 火旺城 전투에서 곽재우와 같이 참전하였다. 홍당이 시대를 아파할 때 남명과 곽재우처럼 다시 深齋와 俛宇을 만났고 이것은 자신의 삶에 커다란 의미로 다가온 것으로 보인다. 홍당을 통하여 영남 의령에서 거의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유학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199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4.
        1992.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