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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연구 KCI 등재 The Nammyonghak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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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권 (2014년 12월) 11

1.
2014.1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남명의 연보는 无悶堂 朴絪이 1628년 덕산에서 남명의 둘째 아들인 칠원 군수을 지낸 慕亭 曺次磨로부터 부탁을 받고 1636년 편찬을 하였 다. 그 후 謙齋 河弘度, 澗松 趙任道, 林谷 林眞., 寒沙 姜大遂 등 私淑人들의 수정 보완을 거쳐 1700년 발간된 .南冥先生別集.에 실려 처음 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그 후 1814년 무민당의 후손들이 .무민당 집.을 발간하면서 집안에 전해오던 무민당 手稿本이라고 추정되는 .남 명연보.를 저본으로 삼은 연보를 수록하여, 3종류의 연보가 전하고 있 다. 연보가 발간된 후 내암관련 문자 삭제, 구암과의 절교 문제 등으로 논란이 있었는데 내암 관련 문자는 삭제하는 것으로 정리한 반면 구암 과의 절교 문제에 있어서는 상세하게 기록해야 한다는 무민당의 견해 가 수고본에 그대로 기술되어 있으며, 반면 .남명선생별집.과 후에 발 간된 .무민당집.에는 내용은 대동소이하나 그 분량은 현저하게 줄어들 었다. 1800년대 들어 남명학파 학자들의 문집이 이 지역에서 많이 발간돼 남명 생애에 대한 자료가 많이 발견되어 보충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또 연보의 내용도 일부분 거칠고 오류가 있다고 생각해 1897년 남명 선생편년을 간행했다. 남명편년은 그동안 제기되었던 연보의 오류들 을 바로 잡았을 뿐 아니라 대체로 연보의 기술 내용을 보충하고 있다. 특히 연보에는 덕계 수우당 한강 등 소수 문인들의 受學에 관한 기사가 있는데 반해 편년에는 남명 문인들의 受學에 관한 기사가 현저하게 늘었다. 이는 남명의 遺文들이 전해지지 않은 것이 너무 많아 당시 지역 선비들의 문집에서 관련 자료들을 구해 이를 보충하는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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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金宇.이 지은 .南冥先生行狀.을 鄭仁弘이 지은 .南冥曺先生行狀.과 비교 분석하여 敍事의 특징을 논한 것으로 그 요지는 아래와 같다. 서사구조의 측면에서, 김우옹은 전체를 생애-졸기-행적 세 부분으 로 나누고, 생애와 행적을 세부적으로 나누어 서술하지 않았으며, 행적 보다 생애에 더 치중하여 기술하였고, 남명의 자질과 교육에 중점을 두어 서술하였다. 서사내용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학문전환에 대해 정 인홍은 爲學에 포함시켰는데 김우옹은 별도로 구분하여 서술하였으며, 2).을묘사직소.와 .무진봉사.에 대해 정인홍은 간단히 언급하였는데 김우옹은 주요 내용을 직접 인용하였으며, 3)도덕에 대해 정인홍은 심 성수양을 통해 天德을 이룩한 점을 중시한 반면 김우옹은 남명의 資稟 과 氣像에 중점을 두었으며, 4)공부에 대해 정인홍은 格物致知와 存養省察을 모두 언급한 반면 김우옹은 省察克治에 중점을 두었으며, 5)학 문성취에 대해 정인홍은 주자학을 바탕으로 일가의 학문을 이룬 점을 서술했는데 김우옹은 自得과 致用實踐을 급무로 여겼다는 점을 언급하 였으며, 6)국가와 백성을 걱정한 점에 대해 정인홍은 소상하게 서술했 는데 김우옹은 세상사를 잊지 못하는 측면을 간단하게 언급했으며, 7) 교육에 대해 정인홍은 짧게 서술한 반면 김우옹은 남명의 말을 인용하 여 상세히 거론했으며, 8)취향에 대해 정인홍은 언급한 것이 없는 반면 김우옹은 비교적 소상히 서술했으며, 9)전체적으로 정인홍은 남명의 道學者像을 부각시켰는데 김우옹은 남명의 자품과 기상을 바탕으로 高士像을 드러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2편 행장의 서사의 유사성을 검토한 결과, 김우옹이 먼저 행장을 지 었는데 정인홍이 그 내용을 불만족스럽게 여겨 다시 지은 것으로 드러 났다. 김우옹의 「남명선생행장」을 성운의 묘갈명 및 곽종석의 묘지명과 개괄적으로 비교해 본 결과, 1)구성비율의 측면에서 성운은 행적에 비 중을 두었는데 김우옹은 생애에 더 비중을 두었으며, 2)세부항목을 보 면 묘갈명은 25개, 묘지명은 18개인데 비해 김우옹이 지은 행장은 13 개로 현저히 적으며, 3)세부항목 구성비율로 보면 성운과 곽종석은 항 목을 두루 갖추어 서술하고 있는데 김우옹은 특정 부분을 집중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를 통해 김우옹이 지은 행장의 서사는 주요 항목을 특징적으로 서술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김우옹이 지은 「남명선생행장」에 대해서는 그 동안 별문제가 없다 가, 근세에 남명의 후손 曺庸相이 「踣德山碑理由」와 「先子門下敍述考證」을 지음으로써 논쟁이 일어났다. 남명 후손들은 김우옹과 정인홍의 행장 및 허목의 신도비명에서 남명의 진면목을 드러내지 못해 남명의 순정한 도학에 대해 후세 의심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여 바로잡으려 하고, 남명 문인의 문중에서는 자기 선조의 글을 비난한 것에 대해 정면 대응함으로써 논쟁이 야기된 것이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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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冥 曺植은 수제자인 來庵 鄭仁弘을 자신의 분신으로 여겼다. 내암 도 남명의 이러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남명 사후 그를 추숭하는 일에 전력을 투구했다. 내암이 지은 「南冥 曺先生 行狀」도 이러한 남명추숭 의식의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남명은, 退溪 李滉의 출사 권유를 거절한 이후로 끊임없이 퇴계로부 터 여러 가지 비판을 받아왔으며, 이러한 비판은 퇴계의 문인들에게 그대로 전해져 내려왔다. 남명에 대한 퇴계의 비판은 급기야 남명의 문묘종사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고, 이에 대한 반 작용으로 내암은 죽음을 무릅쓰고 남명에 대한 퇴계의 비판을 해명하 는 데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내암의 노력은 그가 지은 스승 남명의 행장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내암은 남명의 행장에서 남명이 생전에 남긴 글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남명의 출처의식과 남명의 학문관을 설파함으로써, 남명의 입장에 대한 옹호는 물론 나아가 퇴계에 대한 비판까지도 불사하는 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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俛宇 郭鍾錫이 지은 「南冥墓誌銘」은, 南冥을 두고 지은 傳記文字 가 운데서 가장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서술이라 할 수 있다. 남명 전기문자 의 최후결정판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남명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빠짐 없이 수록해 놓았다. 묘지명으로서는 매우 긴 작품으로 일반적인 묘지명의 틀과 다른 점이 많다. 면우는 이 묘지명을 지으면서 자료를 최대한 널리 수집하여 신중에 신중을 기하였고, 다 완성된 뒤에도 당시 慶尙道 지역에서 문장으로 손꼽히는 제자 深齋 曺兢燮과 晦峯 河謙鎭에게 문제점을 지적하여 같 이 수정하고 보완하여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원래의 請文者 弦齋 曺庸相을 통하여 深齋가 사소한 문제로 지나치게 장기간 문제를 지적하고 나오자, 마침내 자기가 지은 「南冥墓誌銘」은 폐기하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 9년 뒤인 1926년에 간행된 俛宇集 속에 실린 俛宇의 시문 가운 데 南冥을 낮게 평가했다는 혐의를 받을 글이 발견되어, 남명 후손들은 출판하여 보내 온 俛宇集을 거절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俛宇 측과 관계가 멀어져 「남명묘지명」은 실제로 남명 묘소에 묻히지 못 했다. 「南冥墓誌銘」에서 俛宇는, 南冥의 偉大性을 부각시키고, 敬義가 南冥思想의 핵심임을 밝히고, 南冥의 治學方法을 체계화하고, 南冥의 憂國憐民사상을 부각시키고, 南冥의 學德의 특징을 宋朝 諸賢에 비교하 였고, 南冥의 雅號의 의미를 밝히고, 文廟從祀 疏請 등 남명 推崇事業을 소개하는 등, 내용이 가장 다양하면서 풍부하다. 단언컨대, 「南冥墓誌銘」은 남명에 관한 傳記文字 가운데서 가장 종 합적이고 체계적이고 심도 있는 자료라 할 수 있다. 남명이 직접 지은 詩文에는, 남명의 언행과 생활상을 이해할 자료가 거의 없는데, 제자나 친구 後學들이 지은 이런 다양한 종류의 傳記文字 가 존재함으로 해서 남명을 연구하는 자료로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높은 것이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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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村 河達弘은 19세기 강우지역에서 활동했던 학자이다. 그는 실용 을 중시하는 학문경향을 가지고 南冥 曺植과 謙齋 河弘度를 존숭하며 慕寒齋에서 강학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로써 인근의 학자들을 운집시키 고 그들에게 남명학파로서의 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때 月皐 趙性家ᆞ 溪南 崔琡民ᆞ東寮 河載文ᆞ克齋 河憲鎭ᆞ斗山 姜柄周ᆞ尼谷 河應魯 등이 그의 문하에서 종유하였다. 이후 조성가와 최숙민은 하달홍의 인도 아래 보다 체계적인 학문을 위해 노사학단에 나아가 奇正鎭에게 수학하였다. 한편 하재문과 하헌 진은 본거지로 돌아가 寒州 李震相과 교유하였고, 강병주와 하응로는 性齋 許傳에게 나아가 집지하였다. 조성가와 최숙민이 노사학단의 핵심인물로 자리매김한 것에 비해 하재문이 한주학단에서나 강병주가 성재학단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 리 크지 않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남명을 존숭하고 학문의 실천성을 중시하는 남명학파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하나는 하달홍의 모한재 강학이 남명학파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하달홍이 노사학파와 친밀성이 깊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하달홍은 19세기 하동과 인근 강우지역의 문인들에게 남 명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고 보다 큰 학문을 접할 수 있도록 발판의 역할을 해 주었으며, 이를 통해 그 문인들은 남명학파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각자의 학문을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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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건국 이래 중앙집권 정치를 표방하고 각 행정의 말단까지 수령을 파견하여 통치하고자 했다. 조선 초기 지방관은 지방 세력의 억제 정책 속에서 ‘守令七事’의 임무를 가지고 파견되었는데, 이 임무는 명목상으로는 조선말까지 유지되었다. 조선 중기 지방 사족에 의한 향 촌 지배 주도의 시기를 거쳐, 조선 후기 지방제도는 왜란과 호란의 피해 복구가 끝나고 국가의 안정을 이룬 가운데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조선후기 지방제도는 국왕의 왕권 강화책과 맞물려 지방에 대한 역 사, 지리, 호구, 양전 등의 조사와 이를 바탕으로 한 지리서 간행, 통치 강화를 위한 새로운 법전의 편찬을 토대로 이루어졌다. 또한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여 지방의 부역과 조세, 교육 등에 지접 관여하는 한편, 새로 부를 축적한 중인층이나 서얼, 몰락 양반 등은 납속책 등을 통하여 국가 재정 확충과 기득권층으로 편입시켰다. 활발한 사회변동 속에서 한편으로는 수령은 흉년이나 역질 로 인한 구휼이 중요 임무의 하나였 다. 韓範錫은 조선후기 현종13년(1672) 태어나 영조 10년(1734) 74세로 세상을 떠난 무인으로 무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목민관으로서도 여 러 관직을 지냈다. 그는 하동현령으로서 지방 수령의 첫발을 디뎠는데 관직 중 남쪽에서는 제주도의 관찰사, 북쪽 변경에서는 회령부사와 남 병사를 지내면서 특히 목민관으로서 구휼활동에 관심을 보이고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한범석의 목민관으로서의 자세한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여러 방면으 로 그를 조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18세기 국가의 큰 변란이 없던 시기를 살았던 한 무장으로서 목민관의 최우선은 다른 지방관과 다름없이 구휼 문제였으며 상황에 따라 적극적으로 대처한 인물이었다 고 생각된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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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시대 국왕 태실을 개보수하는 공역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영조조에 있었던 세종과 단종 두 태실의 수개 역사를 사례로 하여 고찰한 글이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에는 국왕 태실에 어떤 결함이 발견되면 태실 소재지의 수령이 이를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관찰사는 즉시로 태실 현장을 찾아 奉審한 뒤 이를 중앙에 보고하였다. 이렇게해서 관찰사의 보고가 중앙 에 이르면 禮曹에서는 관찰사의 봉심 내용을 중심으로 修改 여부에 대한 의견을 붙여 국왕에게 啓聞함으로써 태실 수개 여부가 결정된다. 태실의 수개가 결정되면 공역에 적당한 일자를 택정하고, 예정된 태 실 수개 일정에 맞추어 本道와 중앙의 해당 관사에서 준비해야 할 인력 과 잡다한 물품, 제반 준비 사항을 확정하여, 이를 본도 및 해당 관사에 미리 알려 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한다. 그러나 일정과 계획이 정해진 경우라고 하더라도 국휼이나 흉년 등으로 인해 날짜를 연기하는 일이 흔히 발생하는데, 본 세종. 단종 태실의 개수 공사도 국휼로 인해 한 차례 연기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중앙으로부터 태실 수개에 필요한 준비 인력과 物目이 정해져 공문 으로 하달되면 본도에서는 관찰사가 이들 물목과 인력을 고을 별로 분정하였다. 물력과 인력의 분담 정도는 태실이 소재한 고을의 부담이 비교적 많은 편이나 인근의 대읍이 가장 많은 부담을 지는 것으로 나타 난다. 특정한 물품의 경우 멀리 떨어진 고을에 까지 부담케 하는 경우가 보이나, 대체로 태실이 소재한 고을과의 거리나 고을 사정 등을 감안해 서 필요한 물품과 인력을 여러 고을에 두루 부담시키는 것으로 나타난 다. 역사는 중앙에서 감역관이 내려온 뒤 개시된다. 감역관은 공사 개시 일을 며칠 여 남기고 현지에 도착하여 개수할 태실의 석물 등을 살핀 뒤 이를 사안에 따라 소속 관서 와 예조, 및 본도 관찰사에 보고한다. 뒤이어 예정된 개수 공사 날짜가 임박하면 중앙에서 繕工監 提調와 觀象監 提調가 내려와 태실 공사 현장을 봉심하고, 수개 공사 당일의 행사와 공사 일체를 참관한 뒤 자신이 봉심하고 참관한 바를 중앙에 보고한다. 공역은 ‘告事由祭’와 ‘告后土祭’를 행한 뒤에 개시되며, 공역 을 마친 뒤에는 ‘謝后土祭‘를 행하는 것으로 행사가 완료된다. 본 건의 경우 왕실의 아기 태실을 처음 조성하거나 즉위한 국왕의 태실에 돌 欄干을 조성한 경우가 아닌데도 두 태실의 금표 구역을 정하 고 태실을 수호할 守直을 정하는 문제가 신중하게 논의되었다. 이는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국왕 태실의 관리 및 수호와 관련된 규정이 제대 로 지켜지지 않아 태실이 소홀히 방치되고 있었던 현황을 알려주는 것이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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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호비결은 한국 도교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내단 서 적으로서, 여러 가지 異本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문헌적 검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초기 이본으로 간주되는 .단학지 남.이 발굴되어 학계에 소개된 이후에 현전하는 용호비결의 판본에 대한 관심이 일부 나타나기도 했지만, 여전히 문헌적 계보가 파악되지 않았고 그에 따라 용호비결의 특징과 그 수련법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가 진행되지 못하였다. 이 논문에서는 용호비결 관련 여러 문헌 자료를 대조하여 본문을 철저히 검토한 다음, 갑인자본 .주역참동계발휘.에 근거하여 용호비결 의 원형을 탐색하고, 이를 근거로 문헌적 계보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기초적인 작업이 먼저 이루어져야 용호비결이 지닌 사상사적인 성격을 해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현전하는 용호비결의 이본으로는 널리 알려진 연정원본과 동국대학 영인본이 대표적이다. 그 이외 규장각본과 장서각본이 있으며, 근년에 발굴된 .단학지남. 및 .중묘문.에 산견되는 용호비결의 내용 등을 고려하면 모두 6종이 된다. 이러한 용호비결의 초기 이본은 .단학지 남.으로 알려진 .양생지남.이다. 후대에 유전되는 용호비결은 .양생지 남.에 근거해서 .동의보감.을 비롯한 .도서전집.의 여러 내용을 추가 해서 형성된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시중에 유통되는 용호비결의 판본들은 후대에 보완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러 이본들과 대조해 보면 정렴의 저작이라고 보기 어려 운 여러 가지 문제점이 드러난다. 정렴의 후대 인물인 원료범의 .기사 진전.이 용호비결의 본문에 나타나는 점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용호 비결의 형성 과정에 .수진십서.와 .도서전집.의 영향은 부정할 수 없 는 사실로 드러난다. 초기에는 .수진십서.의 내용이 반영되다가 임란 이후에 이르러 .도서전집.의 내용이 용호비결에 무분별하게 인용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용호비결은 유염의 .주역참동계발휘.를 근거로 .참동계.의 하수처 를 밝혔는데, 참동계의 본래 지향점인 .용호경.의 구결을 제시한 점에 서 이를 ‘용호결’이라 일컬었다고 본다. 그 점에 있어서 ‘용호결’은 참동 계의 핵심이며 조선시대 단학파의 최대 성과라고 평가해도 결코 지나 치지 않는다. 이 논문에서는 용호비결의 여러 판본들을 비교 검토하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후대에 이루어진 본문의 첨삭이 내용의 변개로 나 아가 용호비결이 지닌 폐기 수련의 중요성이 점차 간과되어 후속 연구 를 가로막고 있는 사정을 새롭게 해명하였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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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허균의 한시 선집인 國朝詩刪에 대한 문헌적 검토로, 현전 이본을 조사하고 계열화 하여 國朝詩刪의 선본을 확인하고 앞 으로의 연구 방향에 대해 제안한 것이다. 그동안 國朝詩刪에 대한 연구는 주로 목판본을 대상으로 하였는데, 이 목판본은 허균의 ‘원본’을 목판 간행자인 박태순이 재편집한 결과물이다. 따라서 허균의 國朝詩刪을 바르게 읽어내기 위해서는 원본의 모습을 재구할 필요가 있다. 이에 이 논문에서는 실본 조사에 앞서 우선 허균이 남긴 國朝詩刪과 관련된 기록들을 살펴서 ‘원본’의 모습을 알아보았다. 허균의 기 록을 근거로 하여 국내외 기관과 대학도서관 등에 흩어져있는 國朝詩刪을 발굴, 검토하여 원본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본들과 그렇지 않은 이본들을 ‘원본 계열’과 ‘목판본 계열’로 나누어 검토하였다. 그 결과 ‘허균의 國朝詩刪’ 연구는 원본 계열을 중심으로 재논의 되어야 하며, 특히 현재 완질로 전해지는 원본 계열 동국대본에 주목할 것을 제안하 였다. 한편, 지금까지 國朝詩刪과 관련된 연구 성과들이 목판본으로 진행된 것임을 감안하여 목판본과 원본이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에 대해서도 정리해보았다. 이제 목판본 계열은 허균과 관련된 연구보다는 國朝詩刪의 유전과 목판 간행의 의의, 후인의 전대 문헌 가공에 대한 주제로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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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崔溥의 .漂海錄.과 崔斗燦의 .乘.錄.에 나타나는 두 저자의 산동 인식을 각각의 시대 별로 살펴보았다. 중국 당나라와 원나라는 국제화 정책을 시행하여 많은 유학생을 수 용했다, 그러나 명나라 건국 이후에는 쇄국정책을 실시하여 유학생 수 용을 금지했다. 이로 인해 조선의 선비들은 중국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 가 줄었고, 대체로 책을 통해서 중국을 체험하게 되었다. 명.청 시기, 조선에서 공식적으로 파견한 사신들은 중국에 관한 기록을 남겼으나, 사신의 신분으로는 북경 이남 지역의 경험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북경 이외의 지역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편, 비공식적인 漂流人 의 경우 북경 이남 지역을 경험하고 기록을 남기기도 했는데, 그 가운데 崔溥와 崔斗燦의 저작이 가장 대표적이다. 崔溥와 崔斗燦은 표류인의 자격으로 북경 이외의 지역을 경험했으며 이러한 경험이 담겨 있는 .漂海錄.과 .乘.錄.은 연구 자료로서 중요성을 띤다. 성종 연간에 관인 崔溥 일행은 제주도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표류 하게 되었다. 그리고 순조 연간, 장인인 제주 대정현감 金仁澤의 요청으로 제주도로 떠난 崔斗燦은 1년 후 귀향길에서 큰 풍랑을 만나 표류하 게 되었다. 성종 17년(1486) 중국에 표류한 崔溥를 이어, 崔斗燦은 300여년 후인 순조 18년(1818) 중국에 표류했다. 두 시기 모두 조선 왕조는 이어지고 있었지만, 중국은 왕조가 바뀐 완전히 다른 시대였다. 같은 지역이라 하더라도 다른 시대 배경 아래서 겪는 체험과 감상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두 시대의 국가 경제와 국민 생활의 차이 등 다양 한 면에서 동이점을 찾아볼 수 있다. 한편으로 崔溥는 조선 시대의 관인 으로서 어명을 받아 .漂海錄.을 작성한 것에 반해, 崔斗燦은 자신의 취미대로 .乘.錄.을 기록했다. 이러한 점 역시 두 텍스트의 차이를 야기했다. 崔溥는 매우 상세하고도 다양한 범위의 내용을 기록했으나, 집필의 의무가 없었던 崔斗燦의 텍스트에는 감정의 표출의 기록과 詩歌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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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한문 교육용 기초한자 1,800자’가 교육현장에서 실질적으 로 유용하게 활용되기 위해서는 보완책이 필요하고, 그 가운데 가장 시급한 것이 자소목록의 정리를 통한 ‘자소표’의 제정이라는 것을 논의 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또한, ‘자소표’의 제정을 위해서는 먼저 해결해 야만 하는 몇 가지 문제점들을 제기하고, 그에 대한 해결방안을 모색해 보았다. 한자의 파생관계는 의부 혹은 음부에 의해 매우 유기적으로 이루어 진다. 의부와 음부는 일정한 수의 자소에 의해 구성되고, 그들은 다시 다양한 층차로 결합하여 수많은 새로운 글자들을 구성한다. 이를 거꾸 로 이야기하면, 아무리 많은 수의 한자를 대상으로 하더라도 단계별로 분석하게 되면 일정한 수의 字素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효율적으 로 한자를 가르치거나 학습하는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이지만, 우 리나라 교육현장에서는 여러 가지 제약조건들로 인해 간과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재 기초한자의 수가 1800자로 제한되어 있고, 학습과정은 중학교 용 900자와 고등학교용 900자로 나누어 학습하는 체계로 되어있다. 선정된 字數의 적합성도 문제가 되지만, 각 과정별로 나열된 글자들을 살펴보면, 字形 간의 유기적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배열된 경우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교육과정 중에서의 여러 제약들로 인해 기초한자의 자수를 제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자소표’의 제정이 다양한 교육 환경에서 탄력적으로 한자교육을 할 수 있게 하는 보완책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며, 字形 간의 유기적 관계를 고려한 한자교육을 위한 보충 자료로서의 역할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한자의 자소분석을 통한 자소표 작성의 목적은 크게 나누어 두 가지 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하나는 기계적 분석을 통한 한자정보 처리시스템 구축을 위한 것이고, 또 하나는 한자교육을 위한 것이다. 자소분석 과정에 나타나는 양자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전자의 경우, 분석 층차가 가능한 한 최소단위까지 내려가는 기계적 분석방법을 택 할 수 있는 반면, 후자는 글자를 구성하는 자소들이 운용되는 과정에서 의 상호 유기적 관계를 고려하여 분석 층차를 결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교육용 기초한자 1800자’를 대상으로 한 자소표 작 성에 있어서도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자소분석의 원칙과 그 세부규칙’을 통한 분석 층차의 결정‧ 다양하게 나타나는 변이자소의 처 리‧ 字素組의 설정 등이다. 또한, 개별자소의 명칭 부여‧ 색인 작업을 위 한 획수의 규범화 등도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본고에서는, 자소표 작성 이전에 선결되어야 할 몇 가지 문제점들을 논하는 과정에서 실제 발생할 수 있는 구체적 예들을 확인하기 위해, 우리보다 먼저 ‘자소표’를 제정하여 시행하고 있는 중국의 예를 참고하 여, 먼저 몇 개의 자소 및 字素組를 대상으로 하여 자소표를 試案으로 제시해 보았으며, 이를 통하여 그 해결방책을 찾아보는 방법으로 논지 를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