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봉집(龜峯集)』 권3의 「태극문(太極問)」은 원작자가 누군가에 대 한 진위 문제는 있지만, 그 내용 자체로 조선중기 율곡학파의 태극관 (太極觀)과 리기관(理氣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한 다. 이 글에서는 「태극문」의 저자를 구봉(龜峯)으로 보고, 그 속에 담긴 철학사상을 객관적으로 알아보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의 개념과의 상호관계를 알아보았다. 구봉은 무극과 태극이 차제(次第)없는 하나의 실체이며, 무극지진(無極之眞)이 곧 태극이라고 하였다. 다음으로는 태극과 리기 (理氣)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구봉은 태극이 곧 리(理)며, 리(理)와 기(氣)는 ‘하나면서 둘이며, 둘이면서 하나’라는 ‘불상리 불상잡(不相 離 不相雜)의 관계이며, 리(理)는 소통성을 가지고 기(氣)는 국한(局 限)성을 가져 다양성과 통일성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기 인 음양(陰陽)의 ‘움직임과 정지(靜止)함’, 즉 동정(動靜)에 대한 구봉 의 이해를 살펴보았다. 구봉은 음양이 움직이고 정지하는 원리를 태극 으로 설명하고, 이러한 동정의 원리가 천명(天命)이라고 하였다. 이러 한 연구를 통하여 구봉의 태극관(太極觀)은 주희(朱熹)나 이이(李珥) 와 다른 독창성이 있는지를 알아보고, 태극을 현대적 의미로 활용 가능한지 그 가능성을 찾아보았다. 세계화시대의 국제경쟁에서는 국가의 이미지와 그 이미지브랜드의 상품가치는 매우 중요하다.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적 국가브랜드를 만들어야 한다면 이 태극(太極)이 가장 의미 있는 내용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이에 대한 연구개발이 필요하다.
晋陽姜氏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名門大族으로 역사상 많은 인물을 배출해 각 방면에서 크게 활약해 왔다.
진양강씨는 모두 高句麗 말기의 장군 姜以式을 시조로 삼는다.
강이식의 후손 가운데 고려 후기 姜啓庸은 벼슬이 國子博士였으므로 그 후손들을 博士公派라 일컫는다.
강계용의 손자 姜師瞻은 벼슬이 監察御史였으므로 그 후손들을 御史 公派라고도 한다. 어사공은 공목공의 증조부이다.
恭穆公 姜蓍는 1339년 晋州에서 태어났다.
1357년 成均試에 합격하여, 1362년 출사한 이후 내외의 여러 관직 을 거쳐 門下贊成事에 이르고 晉山君에 봉해졌다.
恭穆公이 가문의 위상을 크게 격상시켰고, 공목공에 이어 그의 형제 와 아들들이 모두 정승의 반열에 들어 일국의 명문이 되었다.
당시 불교가 성행하던 시대에 이미 儒敎思想을 철저히 실천했고, 실 용학문인 農學에도 관심을 가져 農書를 간행해서 보급했다.
두 아들 通亭 姜淮伯, 通溪 姜淮仲이 朝鮮 왕조에 다시 출사하여 가문의 기반을 닦았다.
이후 姜碩德, 姜孟卿, 姜希顔, 姜希孟 등 학문에 있어서나 仕宦에 있 어서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나와 朝鮮王朝 내내 名門家로서의 위상을 유지했다.
이 가문이 이렇게 장기간 동안 명문가로서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 던 것은, 好學과 興學의 정신, 孝友와 忠節을 숭상하는 정신, 겸양과 節儉을 중시하는 정신, 實學的 분위기, 禮讓崇尙의 家風, 행정능력의 출중함, 中國文物의 수용정신 등이 原動力이 되었던 것이다.
강혼(姜渾)은 조선 연산군 때 문한을 담당하고 중종반정 때 정국공 신(靖國功臣)으로 녹훈되었으며, 묘도문자와 제영을 많이 남겼으나, 사림의 공론에 저촉되어 그 역사 활동의 실상과 그 문학 성과가 전면적 으로 검토된 일이 없다. 본고는 연산군과 중종 시기의 문학사를 종합적 으로 이해하는 단초를 마련하고 조선전기 진주 지역의 문화적 기반의 성립을 이해하기 위해 강혼의 문자활동에 대해 개괄했다. 강혼이 연산 군조에 관각문인으로서 아유구용의 시문을 작성한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문학세계는 권력에의 유착으로만 규정지을 수 있는, 관각문인으로서의 독특한 국면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강혼은 「정 미수신도비」에서, 신명을 보존키도 어려운 처지에 처한 정미수가 남의 죄를 덜어주고 가혹한 형벌을 받지 않도록 애쓴 모습을 그려 보였다. 묘주(망자)가 생전에 법률을 근거로 타인을 변론했던 내용을 그대로 담아 신도비의 문체로서도 매우 독특한 양상을 띠고 있다. 본고는 몇몇 기문과 구묘문의 일문(佚文)을 찾아내기는 했으나, 강혼의 ‘부학적문 (富學績文) 발언성장(發言成章)’을 이해하기 위해 일시문(佚詩文)을 더욱 수습, 정리할 필요가 있다. 또한 강혼의 매부는 우리 문학사에서 많은 일화를 남긴 어득강(魚得江, 1470~1550)이다. 연산군과 중종 연간의 문학 집단이 지녔던 지향과 성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강혼과 어득강의 관계에 대한 본격적 연구가 필요하다.
There are six Lee families who use Seongju as their Gwanhyang (the birthplace of their first ancestor), and they are called the six Seongju Lee families, which include the Nongseo Lee family, the Byeokjin Lee family, the Seongsan Lee family, the Gwangpyeong Lee family, the Gyeongsan Lee family, and the Myeonggyeong Lee family. These six Lee families who use Seongju as their Gwanhyang had different progenitors and frequently married each other. If they use the same Gwanhyang, it is considered as a marriage between people with the same surname and the same family origin.
Therefore, it was not easy to indicate Gwanhyang when there was a marriage between people from the six Lee families. Since Seongju and Seongsan were the most commonly used Gwanhyang by the six Lee families, it is highly difficult to find a certain ancestor with an assumption that the ancestor uses today's Gwanhyang, because it is hard to know which family this ancestor is from. Therefore, I want to reveal the origins of the six Lee families and how they indicated their Gwanhyang specifically. This work will be significant since it clarifies the identities of the six Seongju Lee families and provides guidelines to find ancestors related to the six Seongju Lee families.
The results of this review come down to the following.
First, there are six Lee families who use Seongju as their Gwanhyang, and it includes the Gyeongsan Lee family, the descendants of Akgeobujeong (official title) Lee Deok-bu; the Gwangpyeong Lee family, the descendants of Gwangpyeonggun (official title) Lee Neung; the Nongseo Lee family, the descendants of Nongseogungong (official title) Lee Jang-gyeong; the Myeonggyeong Lee family, the descendants of Myeonggyeongjangwon (signifying winning the first place in the Myeonggyeon exam) Lee Geuk-song; the Byeokjin Lee family, the descendants of General Byeokjin (official title) Lee Chong-eon; and the Seongsan Lee family, the descendants of Seongsangun (official title) Lee Neung-il.
Second, the Gyeongsan Lee family, the descendants of the Akgeobujeong, was also called the Bujeong Lee family. As they were also the descendants of Sobuyoon (official title) Lee Gam, they were once called the Soyoon Lee family.
Third, the Nongseo Lee family unites and uses their Gwanhyang as the "Seongju Lee family" nowadays.
Fourth, the Myeonggyeong Lee family was combined into the genealogy of the Byeokjin Lee family after 1864, and it has been maintained until today.
Fifth, the descendants of Lee Gyeon-gan among the descendants of General Byeokjin were once indicated distinctly as the Sanhwa Lee family.
Sixth, the Gwanhyang of the six Seongju Lee families was indicated as "Seongju" in the official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era.
Seventh, the six Seongju Lee families frequently used "Seongju" and "Seongsan" as their Gwanghyang in historical records.
Eighth, "Byeokjin" and "Nongseo" are the most distinctive Gwanhyang among the six Seongju Lee families as they refer to the descendants of General Byeokjin and the descendants of the Nongseogungong.
Ninth, the Nongseo Lee family and the Seongsan Lee family temporarily used "Gyeongsan" as their Gwanhyang, and the Nongseo Lee family temporarily used "Gwangpyeong" as their Gwanhyang. However, in general, the Gyeongsan Lee family and the Gwangpyeong Lee family have a historical uniqueness.
Finally, the need for distinguishing Gwanhyang began to be gradually recognized after 1593 when genealogies were established, and it was strengthened in around 1800, but it did not completely settle down. In the 1900s, Gwanhyang began to be indicated distinctively. Before then, Seongju and Seongsan were mixed and used so that it was not possible to distinguish the six Lee families only with Gwanhyang.
이 글은 南冥 曺植(1501-1572)의 만년 은거지인 지리산 천왕봉 아래 德山洞天에 德山九曲이 설정되지 못한 점에 문제의식을 갖고, 덕 산구곡의 설정이 왜 필요한지, 덕산구곡을 설정하는 근거는 무엇이어 야 하는지, 덕산구곡의 실체는 구체적으로 어떤 장소이며 그 역사적·문 화적 사실은 무엇인지, 덕산구곡 설정의 의의와 기대효과는 무엇인지 를 논의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러나 이것만을 논의하면 덕산구곡을 설정하는 문화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앞에 孔孟과 朱子로 이어진 동아시아 山水認 識의 傳統과 九曲文化, 조선시대 선비들의 산수인식과 구곡문화 등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慶尙右道 지역의 학술이 극도로 침체 된 조선후기 이 지역의 학자들이 南冥學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한 것 중에 三山書院의 位相을 鼎立하여 晦齋·退溪와 함께 南冥을 추숭하고 자 한 노력, 三山九曲詩를 지어 보내 陶山九曲·玉山九曲과 함께 德山九 曲을 드러내기 위한 노력 등을 통해,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남명학을 보전하고 계승하는 길인지를 찾아보려 하였다.
이러한 이 지역 선현들의 정신을 계승하여 오늘날 뜻 있는 인사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德山九曲을 設定하고 경영하여 德山을 명실 상부한 道學의 聖地로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이는 남명학을 계승하고 체험할 수 있는 현장과 콘텐츠를 확보하는 중요한 일이다. 이를 통해 安德文과 河範運이 추구한 영남의 세 先賢을 함께 존모하는 새로운 학풍을 만들어나간다면 嶺南을 鄒魯之鄕으로 거듭나게 할 것이다. 그 렇게 되면 영남이 중국의 曲阜나 武夷山 못지않은 儒學의 産室로 세계 적인 주목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본고는 16-17세기에 찬술된 유학자의 금강산 유람록 27편을 통해 금강산 불교를 고찰한 글이다. 그 유람록을 통해 금강산 소재의 118개 사찰과 암자가 흥망성쇠를 거듭했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高僧이 있는 寺庵에는 많은 제자들이 함께 수행하고 있었지만, 임진왜란 이후 남한산성 축조에 동원되면서 금강산 사찰이 텅 비다시피 했던 때도 있었다.
금강산 유람객들은 대부분 사찰을 숙식처로 사용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유학자와 승려 사이에 교류가 있었고, 유학자들이 승려 비 문을 써주거나 글씨를 써주기도 했다. 대화가 통하는 경우에는 밤늦도 록 定慧나 理氣 등의 철학적 문제에 대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유학자들이 불교에 관심을 가지거나 불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줄일 수 있었던 것 같다.
한편 유람객들은 승려들이 메는 가마를 타고 오르는 경우가 많았다. 가마를 메는 藍輿僧은 1565년부터 1572년 사이 금강산을 유람했던 楊士彦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鄭曄과 李世龜의 유람록에서 기록하고 있다. 실제 1572년 이전 금강산이나 지리산의 유람록에서는 남여승에 대한 언급을 발견할 수 없으므로 남여승의 관습이 확산된 시기는 16세 기 후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明宗代 文定王后 승하 후 불교 계의 위상이 하락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