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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조선시대 여러 학자들이 지리산 덕산동을 유람하고 남긴 시문을 통해 지리산 덕산동의 문화원형을 발굴하여 정립하고, 주요 명소에 대한 의미를 명확히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는데, 본 논문에서 논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결론을 도출하면 다음과 같다. 지리산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에 의해 백두산에서 뻗어 내려 국토의 남단에 크고 넓게 웅거한 鎭山이라는 의미를 넘어, 우리나라의 중심이고 남쪽 지방의 祖 宗으로 인식됨으로써 그 위상이 한층 격상되었다. 그런데다 조선 중기 도학자 南冥 曺植이 지리산 덕산동을 은거지로 택함으로써 도학자의 은거지로 자리를 잡았고, 남명 사후에는 도학의 원류가 흐르는 聖地로 인식되어 순례자들이 끊이질 않았다. 지리산 덕산동의 문화원형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덕산동은 山天齋를 중심으로 한 南冥의 만년 은거지로 人道를 닦아 天道에 합하 기를 구한 求道者의 大畜地이었다. 둘째, 덕산동은 德川書院이 건립된 후 남명의 학덕을 기리고 본받고자 하는 朝鮮 道學의 聖地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셋째, 덕산동 중에 大源寺와 肇開谷을 경유해 天王峯에 오르는 코스는 성리학자들에게 道學의 源流가 흘러나오는 곳으로 인식되어 본성을 찾아나서는 구도여행 코스가 되었다. 이 세 가지 덕산동의 문화원형은 그 문화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 덕산동의 주요 名所로는 도학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의미로 南冥이 붙인 入德 門, 상류에서 맑고 깨끗한 물이 흘러내려 갓끈을 씻을 수 있는 濯纓臺, 은자의 고사가 전해지는 叩馬汀과 首陽山, 남명이 만년에 도학을 완성한 山天齋, 남명 사후 남명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德川書院과 洗心亭, 남명이 문인 吳健을 전송한 고사가 전해지는 送客亭과 오건이 술에 취해 이마에 상처를 입었다는 고사가 전해지는 面傷村, 도의 큰 근원이 흘러나온다는 大源寺 계곡과 肇開 谷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런 명소는 모두 남명의 도학과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어 덕산동의 문화역사적 의미를 풍부하게 해준다. 곧 이런 유적지는 남명의 도학, 조선 도학의 정신 지향이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체험학습, 현장학습을 하는 데 좋은 콘텐츠를 제공해 줄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의미를 올바로 이해 하고 널리 알리는 일이 지속되어 잊히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2.
        2018.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張顯光(1554-1637)의 『대학』 해석에 대해 기왕의 연구가 문집에 수록된 「錄疑竢質」만을 분석해 논한 것을 반성하고, 『역학도설』에 수록된 「大學圖」·「大學改正之圖」를 함께 분석하여 그의 『대학』 해석의 성취과정 및 특징을 밝힌 것이다. 장현광의 『대학』 해석은 세 단계로 성취되었다. 제1단계는 주자의 『대학장구』에 따라 해석하면서 權近·李滉 등의 설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그의 「大學圖」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대학도」는 주자의 「대학도」를 따르지 않고 권근·이황의 대학도를 수용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데 이황의 대학도보다는 권근의 대학도에 가깝다. 제2단계의 해석은 선유들의 『대학장구』개정설을 보고서 다시 「大學改正之圖」를 작성한 것이다. 이 「대학개정지도」는 권근·이황의 대학도와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만든 것이다. 특히 명명덕·신민 밑에 팔조목의 공부를 배열하고, 지어지선 밑에 팔조목의 공효를 나누어 배열한 것, 전 제4장의 청송장을 경문 맨 뒤로 옮기고, 경문 제2절·제3절을 뒤로 옮겨 순서를 바꾸어서 격물치지장으로 삼은 것, 전 제4장을 없앰으로써 전체를 經一章·傳九章으로 파악한 것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설은 이언적의 설과 유사하지만, 지어지선 밑에 팔조목의 공효를 배열한 것과 전 제1장·제2장의 논리구조를 端(本)-事-極으로 파악한 것 등은 그만의 독특한 설이다. 제3단계는 자신의 개정설을 다시 수정하여 『대학장구』개정설을 제기한 것으로, 「錄疑竢質」에 수록되어 있는 설이 그것이다. 이 설의 핵심은 격물치지장을 재구성한 데 있는데, 채청·이언적의 설을 수용하여 맨 앞에 ‘所謂致知在格物者’ 8자를 보충하고, 그 다음에 경문 제3절, 청송장, 경문 제2절을 배열하고 ‘此謂知本’을 ‘此謂物格’의 오자로 보아 수정하여 ‘此謂知之至也’와 함께 격물치지의 공효로 삼은 것이 특징이다. 장현광은 『대학』을 해석하면서 내용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탐구를 하였는데, 誠意章 ‘誠於中’을 주자 및 쌍봉요씨의 설과는 달리 선이 마음속에 가득 찬 것으로 해석한 것이 독특하다. 이러한 장현광의 설은 경학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첫째, 선유의 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문제의식을 키웠고 독자적인 시각으로 『대학장구』개정설을 제기하였다. 둘째, 「대학도」·「대학개정지도」 등을 작성하여 삼경령·팔조목의 공부와 공효에 대한 연관성을 보다 정밀하게 밝혔다. 셋째, 傳文은 經文을 해석한 것이라는 傳文釋經之法의 논리를 개발하여 전문의 논리적 흠결을 보완하였다. 넷째, 격물치지의 개념을 주자와는 다르게 정의하여 격물치지장의 논리적 정합성을 선명하게 하였다. 다섯째, 경문 제2절(知止而后有定……)의 知止·定·靜·安·慮·得을 새롭게 해석하여 팔조목과 연관시킴으로써 삼강령의 공효로 막연히 이해하던 해석을 명료하게 하였다. 여섯째, 誠意章의 ‘誠於中’을 善이 마음속에 가득한 것으로 해석하여 해석의 다양성을 제시하였다.
        3.
        2016.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南冥 曺植(1501-1572)의 만년 은거지인 지리산 천왕봉 아래 德山洞天에 德山九曲이 설정되지 못한 점에 문제의식을 갖고, 덕 산구곡의 설정이 왜 필요한지, 덕산구곡을 설정하는 근거는 무엇이어 야 하는지, 덕산구곡의 실체는 구체적으로 어떤 장소이며 그 역사적·문 화적 사실은 무엇인지, 덕산구곡 설정의 의의와 기대효과는 무엇인지 를 논의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러나 이것만을 논의하면 덕산구곡을 설정하는 문화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앞에 孔孟과 朱子로 이어진 동아시아 山水認 識의 傳統과 九曲文化, 조선시대 선비들의 산수인식과 구곡문화 등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慶尙右道 지역의 학술이 극도로 침체 된 조선후기 이 지역의 학자들이 南冥學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한 것 중에 三山書院의 位相을 鼎立하여 晦齋·退溪와 함께 南冥을 추숭하고 자 한 노력, 三山九曲詩를 지어 보내 陶山九曲·玉山九曲과 함께 德山九 曲을 드러내기 위한 노력 등을 통해,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남명학을 보전하고 계승하는 길인지를 찾아보려 하였다. 이러한 이 지역 선현들의 정신을 계승하여 오늘날 뜻 있는 인사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德山九曲을 設定하고 경영하여 德山을 명실 상부한 道學의 聖地로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이는 남명학을 계승하고 체험할 수 있는 현장과 콘텐츠를 확보하는 중요한 일이다. 이를 통해 安德文과 河範運이 추구한 영남의 세 先賢을 함께 존모하는 새로운 학풍을 만들어나간다면 嶺南을 鄒魯之鄕으로 거듭나게 할 것이다. 그 렇게 되면 영남이 중국의 曲阜나 武夷山 못지않은 儒學의 産室로 세계 적인 주목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4.
        2015.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俛宇 郭鍾錫의 「入德門賦」가 어떤 시대상황과 배경 속에 서 창작되었으며 글의 전개방식과 주제의식은 무엇일까라는 문제의식 으로 접근한 글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우선 시대상황과 창작배경을 살피고, 이 글의 구성방식을 굴원의 「어부사」와 비교해 분석하였으며, 이 글의 내용전개에 나타난 작가의식을 몇 가지 특징으로 포착하여 드러내었다. 그리고 경상우도 지역에 면면이 전승된 남명의 도학자상 이 이 글을 지은 작가에게 어떻게 투영되어 나타나고 있는지를 함께 살폈다. 이 글의 요지를 간추려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19세기 후반의 역사적 전환기에 경상우도의 대표적인 학자 면우는 21세 때 晦窩라 자호하고서 「晦窩三圖」를 그렸는데, 요지는 주자학을 배우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면우는 10여 년 동안 타향살이를 하다가 28세 때 고향으로 돌아와 새로이 구도적 의지를 다짐하여 「沙 上賦」를 지었고, 그 이듬해 정월 초 남명의 도학세계로 들어가는 입구 에 있는 입덕문에 이르러 「입덕문부」를 지었다. 이 글은 면우가 구도적 의지를 새롭게 다짐하던 시기에 남명의 도학을 새롭게 인식하고 表章 하여 남명정신을 이어가고자 지은 것이다. 「입덕문부」의 구성방식은 외형적으로 屈原의 「漁父辭」와 닮아 있다. 그러나 내용전개의 측면에서 보면 문답의 주체가 바뀌고, 주제의식이 전혀 다르다. 「어부사」는 혼탁한 시속에 휩쓸려 사는 어부와 홀로 청렴 하고 홀로 깨어 있는 굴원의 가치관이 대립적 구조로 설정되어 있다. 반면 「입덕문부」는 어부가 작가에게 일방적으로 남명의 도학, 남명학 의 전승, 구도의 방법 등을 상세하게 일러주는 전개방식으로 되어 있다. 즉 「입덕문부」는 序에 작가의 憂道意識을 말하고, 결어에 작가의 求道 意志를 드러내고, 본문에 어부가 남명학 및 구도방법에 대해 일러주는 삼단구조로 되어 있다. 어부는 남명의 도학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은자의 모습, 난세에 학자의 임무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 인물로 그려져 있 다. 이를 보면 「입덕문부」의 주제의식이 남명의 도학을 표장하고 그 도를 이어가고자 하는 의지를 다짐한 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입덕문부」에 나타난 作家意識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序에서 憂道意識을 말하고 本文에서 남명의 도학을 말하고 結語에서 求道意志를 천명하고 있는 점이다. 이는 도가 무너진 시대에 남명을 본받아 구도의지를 새롭게 다짐한 작가의식을 투영한 것이다. 둘째, 본문에 남명의 도학자상을 부각시켜 우리나라 도학을 연 인물로 본 점이다. 특히 퇴계와 나이도 같고 道도 같고 德도 같고 淵源도 같다고 한 점은 남명의 도학을 퇴계의 도학처럼 正脈으로 본 것이다. 셋째, 남명의 도학이 후세에 면면히 전승되어 내려온 점을 매우 구체적으로 부각시킨 점이다. 이는 남명의 도학이 남명학파가 와해된 뒤에도 경상 우도 지역에 그대로 전승되어 내려온 점을 드러낸 것이다. 특히 남명을 제향한 덕천서원을 도산서원·옥산서원과 함께 거론함으로써 영남 도학 이 晦齋·退溪·南冥 세 선생에게 발원한 점을 부각시킨 것, 남명의 도학 세계로 들어가는 입덕문 주변의 낙락장송을 남명정신을 상징하는 것으 로 핍진하게 그려낸 것 등이 돋보인다. 넷째,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0년 덕천서원이 훼철되어 남명의 도학이 의지할 데가 없게 된 시대 의 위기의식을 표출하고 있는 점이다. 이 「입덕문부」가 1874년 정월 초에 창작된 점으로 보면, 덕천서원이 훼철된 직후 참담한 정신적 공황 상태 속에 다시 구도의 의지를 곧추세우지 않을 수 없다는 작가의 절박 한 심경이 투영되어 있다. 이 「입덕문부」는 19세기 후반 경상우도 지역의 대표적인 유학자가 남명학에 대해 어떻게 재인식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글이며, 도가 무너지는 시대에 남명정신을 고취하여 새롭게 구도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지어진 글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 사상사의 흐름 속에서 남명학에 대한 인식이 이 지역에 면면히 전승되어 내려오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조선 후기 경상우도 남인계 학자들은 남명과 퇴계의 도학을 동등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5.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金宇.이 지은 .南冥先生行狀.을 鄭仁弘이 지은 .南冥曺先生行狀.과 비교 분석하여 敍事의 특징을 논한 것으로 그 요지는 아래와 같다. 서사구조의 측면에서, 김우옹은 전체를 생애-졸기-행적 세 부분으 로 나누고, 생애와 행적을 세부적으로 나누어 서술하지 않았으며, 행적 보다 생애에 더 치중하여 기술하였고, 남명의 자질과 교육에 중점을 두어 서술하였다. 서사내용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학문전환에 대해 정 인홍은 爲學에 포함시켰는데 김우옹은 별도로 구분하여 서술하였으며, 2).을묘사직소.와 .무진봉사.에 대해 정인홍은 간단히 언급하였는데 김우옹은 주요 내용을 직접 인용하였으며, 3)도덕에 대해 정인홍은 심 성수양을 통해 天德을 이룩한 점을 중시한 반면 김우옹은 남명의 資稟 과 氣像에 중점을 두었으며, 4)공부에 대해 정인홍은 格物致知와 存養省察을 모두 언급한 반면 김우옹은 省察克治에 중점을 두었으며, 5)학 문성취에 대해 정인홍은 주자학을 바탕으로 일가의 학문을 이룬 점을 서술했는데 김우옹은 自得과 致用實踐을 급무로 여겼다는 점을 언급하 였으며, 6)국가와 백성을 걱정한 점에 대해 정인홍은 소상하게 서술했 는데 김우옹은 세상사를 잊지 못하는 측면을 간단하게 언급했으며, 7) 교육에 대해 정인홍은 짧게 서술한 반면 김우옹은 남명의 말을 인용하 여 상세히 거론했으며, 8)취향에 대해 정인홍은 언급한 것이 없는 반면 김우옹은 비교적 소상히 서술했으며, 9)전체적으로 정인홍은 남명의 道學者像을 부각시켰는데 김우옹은 남명의 자품과 기상을 바탕으로 高士像을 드러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2편 행장의 서사의 유사성을 검토한 결과, 김우옹이 먼저 행장을 지 었는데 정인홍이 그 내용을 불만족스럽게 여겨 다시 지은 것으로 드러 났다. 김우옹의 「남명선생행장」을 성운의 묘갈명 및 곽종석의 묘지명과 개괄적으로 비교해 본 결과, 1)구성비율의 측면에서 성운은 행적에 비 중을 두었는데 김우옹은 생애에 더 비중을 두었으며, 2)세부항목을 보 면 묘갈명은 25개, 묘지명은 18개인데 비해 김우옹이 지은 행장은 13 개로 현저히 적으며, 3)세부항목 구성비율로 보면 성운과 곽종석은 항 목을 두루 갖추어 서술하고 있는데 김우옹은 특정 부분을 집중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를 통해 김우옹이 지은 행장의 서사는 주요 항목을 특징적으로 서술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김우옹이 지은 「남명선생행장」에 대해서는 그 동안 별문제가 없다 가, 근세에 남명의 후손 曺庸相이 「踣德山碑理由」와 「先子門下敍述考證」을 지음으로써 논쟁이 일어났다. 남명 후손들은 김우옹과 정인홍의 행장 및 허목의 신도비명에서 남명의 진면목을 드러내지 못해 남명의 순정한 도학에 대해 후세 의심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여 바로잡으려 하고, 남명 문인의 문중에서는 자기 선조의 글을 비난한 것에 대해 정면 대응함으로써 논쟁이 야기된 것이다.
        6.
        201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18세기 경상우도 의령에 살던 安德文이 三山書院이라는 명칭과 위상을 정립하고, 이를 통해 晦齋ᆞ退溪ᆞ南冥 세 선생을 나란히 追崇하고 表章한 것에 초점을 두고 살펴본 것이다. 안덕문은 심성수양을 중시하며 일상에서 이를 실천하는 학문성향을 견지하였는데, 이는 그가 살던 지역에 전승된 남명의 실천적 학풍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그는 어느 특정 스승에게 나아가 수학하지 않고 영남을 대표하는 세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사숙하여 융합하려 하였다. 그는 이를 실천하기 위해 畵工에게 명하여 세 선생을 제향하는 玉山書院ᆞ陶山書院ᆞ德山書院을 그려 오게 해서 三山書院圖를 병풍으로 만들어 中堂에 펼쳐놓고 늘 세 선생의 학덕을 흠모하였다. 그는 또 삼산서원을 직접 찾아가 세 선생의 학덕을 몸소 체험하려 하였는데, 그가 살던 지역의 덕산서원은 전에 찾아간 적이 있었으므로 가보지 못한 경상좌도의 옥산서원과 도산서원을 찾아가 배알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는 삼산서원도ᆞ三山圖銘 등을 준비해 가지고 옥산서원ᆞ도산서원을 찾아가 배알하였으며, 도중에 저명한 학자들을 방문하여 삼산서원도 등을 보여주며 논평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에 의해 경상좌도 퇴계학파 학자들도 삼산서원이라는 명칭과 위상에 대해 동의하였다. 그럼으로써 그가 살고 있던 경상우도의 덕산서원을 조선후기 영남학파의 본산으로 인식된 경상좌도의 도산서원ᆞ옥산서원과 동등한 지위에 올려놓는 성과를 이룩했으며, 덕산서원에 제향된 남명을 회재ᆞ퇴계와 같은 반열의 도학자로 재인식하게 했다. 안덕문의 이러한 노력을 통해 三山書院 및 세 선생의 학덕이 나란히 表章되었으며, 영남을 鄒魯之鄕으로 만든 이 세 선생을 함께 존모해야 한다는 인식을 제고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특정 문하의 師說만을 준수하는 학풍에서 벗어나 세 선생의 학문을 하나로 아울러 계승하고자 하는 새로운 융합의 학문을 제시하게 되었다. 특히 경상우도 학자들은 이런 융합의 학문을 지향해 그 다음 시대 당색과 학파에 구애되지 않고 활발히 학술교류를 하여 학문이 울흥하는 터전을 만들었다. 여기에서 안덕문이 삼산서원의 위상을 정립하고 세 선생을 나란히 추숭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7.
        2012.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글은 남명학 관련 문헌의 번역 현황을 정리하고, 번역서의 체제와 내용을 검토하고서 향후의 과제에 대해 몇 가지 제언을 한 것이다. 남명의 저술 『남명집』 번역은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 그러나 문제점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두 명의 전문가가 오역을 바로잡고 윤문을 하여 수정판을 다시 간행해야 할 것이다. 『학기류편』 번역도 성리학에 이해가 깊은 전문가가 다시 검토하여 번역문의 미비점을 바로잡고, 최근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수정판을 내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아직까지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남명집』 판본 문제에 대해서도 정리하는 작업이 요구되며, 『남명집』 정본화사업 추진도 절실히 요구된다. 남명의 전기 자료 및 연원록 번역은 남명학연구소에서 상당한 성과물을 냈지만, 아직도 번역해야 할 자료가 여전히 남아 있다. 예컨대 후인들의 문집에 산견되는 남명에 대한 기록을 모두 모아 번역하는 일, 각 종 序·跋 및 남명 유적지 건축물의 기문·상량문 등을 모아 번역하는 일 등은 서둘러 추진할 필요가 있다. 남명 문인의 저술 번역은 약 10분의 1정도만 번역되었거나 번역 중에 있고, 그 나머지 문집은 번역이 불투명하다. 이런 문집은 분량이 매우 적어 국가기관에서 번역하기 어렵기 때문에 문중이나 기념사업회에서 번역 사업이 활발히 일어나길 기대한다. 또한 남명학파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남명 사숙인들의 문집도 모두 번역해야 남명학파의 실체를 구명하는 데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이런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지방자치단체와 대학교와 문중이 모두 적극적인 의지를 가져야 한다. 특히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가 남명학의 메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학교 당국은 물론 지방자치단체 및 문중과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하여 번역 사업을 주도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연구기관에서 번역한 성과물은 교열과 윤문 등의 과정을 거쳐서 오역이나 비문이 비교적 적다. 그러나 문중에서 단독으로 번역한 경우는 심각한 문제점이 드러난다. 따라서 번역의 질을 제고하기 위해서라도 재야 학자가 혼자 번역하는 일은 가급적 삼가야 하며, 연구기관에서 번역을 한 뒤 교열과 윤문을 거쳐 출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8.
        201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鄭載圭(1843-1911)의 학문정신과 󰡔대학󰡕 해석에 대해 살펴본 것으 로,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정재규는 인륜이 무너져 금수의 세상이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기 때문에 守正主義를 강조했고 衛正斥邪를 부르짖었다. 그는 도 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守死善道意識을 보여주고 있으며, 도를 보전 하기 위해 讀書種子를 양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정재규의 학문방법은 독 서를 통한 지식을 실생활에서 체찰하는 隨事省察과 자신의 몸에 돌이켜 실천하 는 反身踐實로 요약된다. 이는 分殊 속에서 理를 구현하려 한 주리론적 사유를 반영한 것이다. 정재규의 󰡔대학󰡕 해석 기본관점은 ‘新民도 明德 속의 일’로 보는 명명덕에 치 중한 해석과 팔조목 가운데 反身踐實에 해당하는 修身에 치중한 해석이다. 해 석의 주요 특징으로는, 1)反身踐實의 관점에서 誠意를 󰡔대학󰡕의 골자로 본 점, 2)「大學章句序」의 分節이 선유들의 설과 다르며 性․敎에 중점을 두어 성인의 가 르침을 따라 본성을 회복하는 일을 말한 것으로 본 것, 3)明德을 ‘天之明命’과 연관시켜 理로 보고, 心合理氣를 전제로 하되 心은 氣之精爽, 明德은 心之无妄 으로 보아 理主氣資의 입장에서 心 속에서 眞實无妄한 본체를 명덕으로 본 것, 4) 正心을 全體主宰處에서 照管하는 것으로 보아 장구의 ‘敬以直之’에 천착해 體까 지 말한 것으로 보는 설을 따르지 않고, 用의 측면만으로 본 것 등을 들 수 있다. 정재규의 󰡔대학󰡕은 해석을 경학사적 시각에서 보면, 주리론적 관점에서 明德 를 理로 보아 이에 치중해 해석한 것과 反身踐實의 관점에서 성의․정심에 치중 한 해석을 하면서 齊家 이하를 수신의 實事로 본 것이 시대적 변화에 대처한 그 의 새로운 해석성향이라 하겠다.
        9.
        2009.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俛宇 郭鍾錫(1846-1919)의 󰡔大學󰡕 해석 중 특히 ‘明德’에 대한 해석 및 그와 관련해 다른 사람과 논쟁한 것을 중심으로 그 설의 특징과 의미를 논한 것이다. ‘明德’에 대해, 기호학파 洛論은 本然之氣로 보고, 湖論은 心의 光明處 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데, 이는 모두 心卽氣의 입장을 전제로 한 것이다. 반 면 嶺南學派는 朱子가 心統性情으로 해석한 것에 근거하여 心合理氣의 관점에 서 理를 위주로 해석하였다. 19세기 퇴계학파의 정맥을 이은 柳致明은 명덕을 氣淸理徹이라 하였는데, 그 의 문인 朴致馥은 ‘주자 이래 相傳한 嫡訣이라’ 하였다. 유치명의 견해는 명덕을 心合理氣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그런데 李震相의 心卽理를 위주로 하는 학자 들은 氣를 겸하여 논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이런 점에서 郭鍾錫의 설도 마찬가 지이다. 그런데 곽종석은 󰡔대학󰡕 삼강령․팔조목의 논의구조에 나아가 明德과 心을 엄 격히 다른 것으로 변별함으로써 하늘에서 얻은 心之本體를 가리킬 뿐만 아니 라, 行事를 통해 얻어지는 孝忠恭重 등까지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 점이 스승 이진상의 설 및 동문들의 설과 변별되는 가장 특징적인 점으로, 동문 들과 논쟁한 핵심 사안이었다. 그는 명덕을 선험적인 본원은 물론 후천적인 경 험을 모두 아우르는 것으로 보았는데, 이는 丁若鏞이 후천적 경험만을 중시한 것과도 일정 부분 연관성을 갖는다. 대체로 19세기 主理論者들이 主宰性을 강조하기 위해 본체․본원을 강조하고 있는데 비해, 곽종석은 행사를 얻어지는 實得을 모두 명덕에 포함시키고 있어 主宰性과 아울러 實用性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다른 학자들과 변별되는 점이 다. 이런 점에서 그의 체용론은 본체에 치중하지 않고 該體用의 논리를 갖고 있 다 하겠다.
        10.
        200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士農窩 河益範(1767-1813)은 滄洲 河憕 및 그의 손자 河洺으로 이어진 가학 을 계승한 바탕 위에 尤庵學派의 性潭 宋煥箕에게 경학과 성리학을 배우고, 鏡 湖 李宜朝에게 예학을 배워 韓元震-宋能相-宋煥箕․李宜朝로 내려오는 학맥에 속하게 되었다. 그는 성담에게 집지함으로써 학문적 외연을 넓히는 동시에 尤 庵家와 世交를 돈독히 하는 두 가지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사농와의 삶의 지취는 자연에 동화되는 삶을 산 曾點의 방식을 추종하면서 仁 智之樂을 추구한 데 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實心․實學으로 爲己之學을 하는 用實心務實學의 務實精神으로 나타난다. 그의 문집에는 紀行詩와 紀行文이 대 부분을 차지하여 문학적 특징으로 부각된다. 그의 기행시는 크게 山水遊覽과 求道觀光으로 대별할 수 있는데, 전자는 지리산 등의 산수를 유람하면서 지은 것이고, 후자는 스승의 문하에 나아가고 한양을 관광하면서 지은 것들이다. 그의 기행문학작품에 나타난 작가의식으로는 크게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첫 째, 산수유람을 좋아하는 성품으로 자연에 몰입하는데, 그것은 현실에서의 불 화를 달래기 위한 측면보다는 曾點의 경우처럼 天人合一의 경지를 추구하는 仁 智之樂에 心醉하는 정신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둘째, 산수유람이건 구도관광 이건 그의 기행문에는 源頭處를 향하는 求道意識이 깊게 스며 있다. 셋째, 그의 기행시문에는 선인의 유적을 만나 역사를 회고하는 작가의식이 잘 드러나 있는 데, 선현의 道德과 志節을 흠모하기도 하고 선현의 불행을 탄식하기도 하며 불 교의 황당한 설을 비판하기도 한다. 넷째, 그의 기행시문에는 南冥精神을 환기 시키며 그것을 본받고자 하는 작가의식이 강렬하게 드러나 있다.
        11.
        200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19세기 江右地域의 대학자 晩醒 朴致馥의 남명학 계승양상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본 것이다. 본고는 만성의 학문이 定齋 柳致明을 통한 퇴계학파의 학설을 수용한 점과 性齋 許傳를 통해 근기 남인계 星湖學의 實用主義를 수용 한 점에 주목하여, 만성이 이 두 학문을 겸함으로써 전통의 학설을 바탕으로 하 면서 시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致用의 학문을 한 것으로 평가하였 다. 이런 점에서 그의 학문성향은 寒洲 李震相의 心卽理說이나 蘆沙 奇正鎭의 主理論이 전통의 성리설을 바탕으로 새로운 설을 전개한 것과 다르다. 또한 양 자를 兼取하였다는 점에서 퇴계학파나 성호학파의 학문성향과도 변별된다. 그 리고 학문이 침체되었던 강우지역에서 새로운 학문을 선도하였다는 점에서 학 술사적 의의가 크다. 본고에서 논한 만성의 남명학 계승양상은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만성의 南冥遺蹟 探訪과 追崇事業으로는, 山天齋・白雲洞 등 남명유적을 찾아 추모한 것과 산해정 중건 기문을 지은 것을 들 수 있다. 둘째, 南冥의 文廟從祀 를 위한 노력으로는, 만성이 1888년 疏頭가 되어 상소문을 올린 것을 들 수 있 다. 셋째, 만성은 許眉叟의 문집 󰡔記言󰡕에 남명을 사실과 다르게 폄하한 「答學 者書」를 삭제해 줄 것과 「德山碑」의 개정을 요청하였고, 󰡔南冥集󰡕 重刊을 위해 교감을 보는 등의 노력을 하였다. 넷째, 만성의 現實認識의 측면에서 본 南冥精 神 繼承으로는, 「上時弊疏」에 나타난 현실인식과 민생구제정신이 남명의 상소 와 유사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다섯째, 만성의 南冥에 대한 認識 및 論評으로 는, 남명을 소미성으로 상징되는 처사로만 보지 않고 傅說・富弼처럼 賢相名丞 의 자질을 가진 인물로 평가했고, 남명의 학문을 程子・朱子를 계승한 正學으로 보았으며, ‘秋霜烈日 千仞壁立’으로 일컬어지는 남명의 기상에 대해 敬義學을 전제함으로써 伯夷와 다른 성향으로 재평가하였고, 山海亭의 山海에 대한 해석 을 통해 남명의 정신지향을 泰山보다 높고 瀛海보다 크다고 평했다.
        12.
        200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남명사상을 조선성리학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그 성격을 道學으로 규정한 뒤, 남명이 남긴 시 속에 나타난 도학적 성향을 밝힌 것이다. 이를 요약 하면 다음과 같다. 남명은 조선성리학이 발흥하는 시기에 몸으로 공부를 한 道學者다. 그는 反求 自得의 깨달음을 중시했고, 그 깨달음을 자신의 몸에 실천해 나가는 反躬實踐 을 강조했다. 또 存養-省察-克治의 修養論으로 本源을 끝없이 涵養하였다. 그 는 이러한 실천을 통해 天德을 성취하려 하였고, 그것을 통해 王道를 구현하고 자 하는 이상을 가졌다. 비록 그가 왕도를 이룩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인간이 하늘과 합하는 길을 평생 추구한 위대한 求道者였다. 그래서 나는 顔淵의 ‘克己 復禮’․‘三月不違仁’의 경지에 오른 인물로는 후세에 南冥만한 학자가 없다고 생 각한다. 그는 25세 때 顔淵이 되기를 목표로 한 뒤, 끝임 없는 노력을 통해 안연 의 경지에 오른 인물이다. 남명의 시에는 天德의 成就를 위한 求道的 修行, 王道를 현실세계에 이룩하고 싶은 理想과 그럴 수 없는 현실의 間隙이 잘 나타나 있다. 天德의 성취를 위한 구도적 수행에는 「易書學庸語孟一道」․「神明舍圖」․「神明舍銘」 등에서 살펴본 存 養-省察-克治의 수양론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데, 특히 淵黙의 涵養이 본원을 이룬다. 그는 王道의 이상을 현실에 구현할 수 없었지만, 伯夷나 嚴廣처럼 현실 을 떠나 隱逸自適하지 않고, 연꽃처럼 오염된 현실세계에서 涵養을 통해 이룩 한 천덕의 향기를 퍼뜨리려 하였다. 남명의 시에는 淵黙의 涵養을 통해 고도로 정제된 솔․명월․연꽃 등의 맑고 밝은 常惺惺한 정신세계가 들어 있고, 또 고사리 로 상징되는 伯夷보다는 연꽃으로 상징되는 柳下惠에 자신의 정체성을 둔 現實 主義精神이 빛나고 있다.
        13.
        2006.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南塘 韓元震(1682-1751)의 󰡔대학󰡕해석 가운데 내용상의 요지를 적출하여 그 특징과 의미를 살펴본 것이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栗谷 李珥로부 터 싹트기 시작한 大全本 小註에 대한 비판과 주자의 여러 설을 辨正하여 定論 을 정하려 했던 점을 남당의 󰡔대학󰡕해석의 기본관점으로 보았다. 남당의 󰡔대학󰡕 해석의 요지로는 經一章의 ‘明德’ ․ ‘六事’ ․ ‘本末始終’에 대한 해석, 止於至善章 을 知止 ․ 能得과 연관시켜 해석하고 제4,5절을 明明德의 止於至善과 新民의 至 於至善으로 해석한 것, 聽訟章의 本末에 대한 심도 있는 해석, 誠意章의 ‘自欺’에 대한 해석, 正心章을 主靜工夫로 보는 해석, 修身章을 성의장 ․ 정심장과의 연속 적 맥락에서 파악한 것, 齊家治國章을 推 ․ 化의 구조로 본 것, 治國平天下章의 ‘絜矩’를 辨正한 것 및 새롭게 分節을 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남당의 설은 상당 부분 주자의 설을 더 심화 발전시킨 것이며, 주자의 여러 설을 변정하여 정설을 확정한 것도 있고, 전 제10장의 分節처럼 주자의 설 과 다른 설을 개진한 것도 있다. 남당의 󰡔대학󰡕해석은 주자학적 󰡔대학󰡕해석 가 운데 가장 정밀한 해석이라 할 수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남당의 설이 발표됨으로써 다시 이 설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어 한층 더 발전하는 계기가 되 었다. 이런 점에서 남당의 󰡔대학󰡕해석은 우리나라 󰡔대학󰡕 해석사에서 끼친 공 헌이 지대하며, 그 위상 역시 중요한 자리를 점한다고 하겠다.
        14.
        200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뇌계는 忠孝淸儉하고 沈重簡嚴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시를 지나치게 좋아하였 고, 眞醇한 儒者로서 忠義를 분발하였으며, 현실세계에 살면서도 늘 物外의 仙 界를 동경하였고, 圭角이 없는 성품에 達觀의 세계관을 지녔던 인물이다. 그는 詩癖이 있을 정도로 시를 탐닉하였고, 당대를 요ㆍ순 시대로 만들고 싶은 포부 를 갖고 있었으며, 身病과 客苦로 고향을 끝없이 그리워하였고, 현실세계와의 불화를 달래기 위해 物外의 仙界를 정신적 귀의처로 삼았다. 이런 점이 그의 志 趣다. 뇌계는 金宗直의 문인이며 성종조 신신자류로서, 당대의 모순을 개혁하여 새 로운 시대를 만들고 싶은 士意識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백성들에 대한 애정 과 재난에 대해 우려하였으며, 불교의 폐단을 인식하고 배척하였으며, 현실제 도의 모순을 개혁하는 데 동참하였다. 뇌계의 處世觀은 그의 개인적 사유와 정 치적 사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귀향의식으로 집결된 다. 그리고 이런 귀향의식의 저변에는 物外의 세계를 꿈꾸는 정신적 지향이 자 리하고 있다. 뇌계의 詩風은 黃庭堅ㆍ陳師道ㆍ陳與義 등 江西詩派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方回의 一祖三宗說을 수용하여, 황정견ㆍ진사도ㆍ진여 의를 통해 杜甫에 도달하는 시문학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氣豪意豁한 蘇軾의 시풍에서 벗어나 唐詩風에 접근할 수 있었다. 뇌계의 시에는 사찰ㆍ유 적지ㆍ객지 등에서의 所懷를 노래하거나 벗ㆍ승려 등에게 內面의 情緖를 보여 준 시편들이 많다. 이 글에서는 歷史에 대한 回顧, 民生에 대한 愛情과 憂慮, 故 鄕에 대한 그리움, 物外의 仙界 志向 등을 시세계의 주요 성향으로 보았다.
        15.
        200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嘿守堂 崔有海(1 588-1641)의 경학관과 대학 해석에 관해 살핀 것이 다. 묵수당의 경학관은 懷疑를 통한 義理의 發明, 곧 道를 추구하는 것이였다. 그는 이와 같은 관점으후 先需의 설만 固執하는 사람들을 拘需로 보고 墨守主義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런 경학관으로 경전을 해석하였는데, 특히 대학에 관심을 집중하여 아래와 같은 설을 발영하였다. 첫째, 주자의 『대학장구』를 텍스트로 하지 않고 고본대학을 취하여 독자적으로 체제를 개편하였는데, 삼강령을 기본골격으로 하여 明明德傳• 新民傳• 止於 至善傳으로 배열한 뒤, 팔조목을 명명덕의 일로 보아 명명덕전에 포함시켰다. 둘째,명명덕전은 釋明明德• 釋格物致知 · 釋誠意• 釋正心修身 • 釋修身齊家• 釋 齊家治國• 釋治國平天下순으후 배열하여 대체로 『대학장구」의 체제를 따르고 있다. 셋째, 대학의 작자에 대해,經文 제1 절만 孔子의 말씀이고, 경문의 팔조목 공부와 공효를 말한 두 절은 曾子의 말씀이며,나머지는 모두 傳文으로 후인이 지 은 것으로 보았다. 넷째, 明德의 明이 致知로부터 발하기 때문에 명덕이 격물치지 로 연결되어야 하고, 평천하도 自明에 해당하는 명명덕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新民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고 하였다. 다섯째, 『대학장구』 경일장의 제2절 • 제 3 절 • 제 6철 • 제 7철 및 청송장을 합해 격물치지전을 새롭게 구성하였다. 여섯째, 正心章의 四有를 주자차럼 心之用으로 보지 않고 情이 치성해 방탕해진 것으로 보았다. 일곱째, 평천하장의 緊短에 대해 累之以短• 契而巨之를 모두 취하지 않고,以쭉則如方이라는 독특한 해석을 제시하였다. 여덟째, 평천하장의 제 6절부터 제 10절까지의 다섯 절을 제 18 절 뒤로 옮겨놓았다. 아흡째,지어지선전을 功效로 보고 『중용』에서처럼 五引詩로 끝맺었다고 주장하였다.
        16.
        200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陽村權近(1352-1409)의 『중용』해석에 대해 고찰한 글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첫째,양촌은 중용의 성격에 대해 주자처럼 道統論의 관점에서 ‘聖學의 心法’우로 파악하지 않고, 鄭玄의 경우처럼 ‘孔子의 聖德’에 초점을 맞추어 파악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중용』을 子思가 天 과 孔子로써 모범을 삼은 것으로 보았다. 둘째,양촌은 중용을 주자의 설처럼 도를 전한 책으로 보면서도 그 도를 어떻게 가르치고 배울 것인가 하는 敎· 學에 비중을 두어 해석하였다. 셋째, 양촌은 『중용』의 分節(단락나누기)에 있어 大탑는 三節로 나누어 보고 細分해서는 五節로 나누어 요지를 파악하는 새로운 설을 제 시하였는데, 이는 朱子의 四分節說이나 雙峯饒氏의 六分節說과 다른 독창 적인설이다. 넷째,양촌은 단락나누기를 통한 요지파악에 있어서 주자의 설을 근간으로 하되,쌍봉요씨와 番陽李氏(李靖翁)의 설 중에서 장점을 모두 취하여 자신의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였다. 다섯째,양촌은 단락나누기를 정밀히 고찰하는 과정에서 단락을 바꾸는 서술체계에 주목하여, 새 단락의 첫머리에는 반드시 子思의 말로 시작한다는 새로운 주장을 하였다. 여섯째,양촌은 중용의 요지를 道와 德 으로 파악하여,제 1장부터 제 20장까지의 제 1 대절은 君子之德을 말한 것으로, 제 21 장부터 제 32장까지의 제2대절은 聖人之德을 말한 것으로, 제 33장 제3 대절은 결어로 파악하였다. 이는 주자가 제 1절은 中庸을 말한 것으로, 제2절은 費隱小大를 말한 것으로, 제3철은 天道人道를 말한 것으로 제4절은 결어로 파악한 것과 상당히 다른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