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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4,000원
        4.
        2004.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인공피부 관련 기술은 1980년대에서는 혈액이나 생체 이식에 적합한 필터/붕대/패드/기타 피복용품의 제조기술(A6IF)에 속하는 것으로 모 또는 피부이식기술 분류(A6IF-002/10)가 주요 연구과제로 진행되어 오다가 1990년대 이후에는 보철 또는 보철물을 피복 또는 코팅을 위한 소재분류(A6IL-027/00)로 전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것은 초기 피부이식 자체의 외과적인 처리기술에 필요한 기술로 시작되어 점차 소재기술로 큰 전환점을 맞이하였고, 즘 더 나아가서 세포 및 조직 배양기술 (Cl2N-005/00, Cl2N-005/06)의 접목으로 고도화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전반적인 기술적 수준은 미국이 가장 앞서 있으며, 유럽, 일본, 한국의 상황은 북미 지역에 비해 약간 뒤지고 있으나, 세포를 배양하는 기술적인 수준의 차이는 크지 않다고 보여지며, 아직도 배양피부의 색상, 항균성, 생체적합성 등에서 개선의 과제가 남아 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부작용 가능성 해소, 보급 확대를 위한 제품생산 코스트 인하, 대량생산 시스템 구축, 제품인식도 제고 등이 필요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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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9.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爲己之學이라는 용어는 爲人之學이라는 용어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쓰인다. 위인지학은 출세가 목적인 반면 위기지학은 聖人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남명이 위기지학을 하겠다는 생각을 굳혔다면 이는 출사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굳혔다고 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는 그가 강조했던 엄정한 출처관과도 직결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남명이 이처럼 중대한 의미가 있는 위기지학으로 학문의 방향을 전변한 시기가 과연 언제였던가 하는 점을 「書圭菴所贈大學冊衣下」를 중심으로 논증해 보았다. 그 결과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남명이 위기지학으로 학문의 방향을 전환한 것은 처음으로『성리대전』을 읽으면서 허형의 언급을 접하고 크게 자극을 받은 것에 기인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둘째, 다만 이 시기가 25세냐, 26세냐, 31세냐의 문제인데, 이는 요컨대 행장과 연보의 말이 본인의 기록과 어긋날 때 어느 것을 근거로 삼을 것이냐의 문제라는 점에서, 행장을 바탕으로 제기된 25세설과 26세설은 남명이 기록한 「書圭菴所贈大學冊衣下」의 31세설에 대해 설득력을 잃는다. 셋째, 「書圭菴所贈大學冊衣下」의 ‘已三十餘矣’라는 말이 科擧에 여러 번 낙방하고 난 뒤라는 곳에만 연결되고, 그 뒤 『성리대전』을 본 것과는 연결시켜 볼 수 없다는 견해는, 「書圭菴所贈大學冊衣下」라는 글을 남명이 기록으로 남긴 이유와 관련시켜 이해하면, 당연히 그 뒤에 『성리대전』을 가져다 읽었다고 함이 순리라는 점에서 역시 설득력을 잃는다. 이 문제와 관련한 논의를 통해서 원전비평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되었고, 특히 2차 자료에 근거한 기록이 아무리 오래 되었다고 하더라도 1차 자료의 기록과 어긋날 경우에는 1차 자료에 따라 마땅히 수정되어야 함을 확인하 였다. 더구나 남명의 위기지학으로의 전변 시기에 대해서 필자의 견해를 참조 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 중국의 熊禮滙 교수도 필자와 같은 결론을 낸 것에서도 31세설의 정당함이 충분히 드러났다고 할 만하다.
        10.
        2018.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茅谿 文緯는 그의 『茅谿日錄』 끝부분에서 「義兵三將事蹟」이란 글을 실어 두었는데, 여기서의 義兵三將이란 鄭仁弘‧金沔‧郭再祐를 가리키는 말이다. 임진왜란 이후 200년 이상 지나는 동안 이들이 모두 남명 문인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송암 김면이 남명 문인일 뿐만 아니라 퇴계의 문인이기도 하다는 기록이 나옴으로 인해 의병활동의 분석과 의미 부여에 석연치 않은 변화가 일어났다. 필자 또한 변개된 자료를 보고 김면이 남명 문인이면서 퇴계 문인이라고 人名錄을 정리한 적이 있다. 그러나 두 차례 간행된 『송암실기』와 『송암유고』 및 『송암연보』, 樊巖 蔡濟恭이 찬술한 金沔 神道碑의 내용과 실제 신도비를 대조해 본 결과, 이들을 면밀히 검토하여 진실을 밝혀야겠다고 생각하여 본고를 집필하게 되었다. 송암 김면에 관한 전기자료는 모두 세 차례 간행되었다. 최초의 것은 1786년에 간행된 『松庵先生實紀』이다. 그 다음의 것은 1885년에 간행된 『松菴先生遺稿』이다. 세 번째는 1903년 이후에 간행된 『松庵先生實紀』이다. 작자 미상의 김면 家狀은 1786년에 간행된 초간본 『松庵實紀』에 실려 있다. 여기에는 “師事曺南冥先生”이라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책에 실린 洪重鉉 所撰 諡狀에 “遊南冥之門”이라 되어 있다. 이는 송암 김면에 관한 최초의 전기자료라는 점에서 가장 믿을 만한 기록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1885년에 간행된 再刊本 『松菴遺稿』에 실린 崔興璧 所撰 請諡疏와 蔡濟恭 所撰 神道碑에도 각각 “先正臣文貞公曺植之高弟”, “弱冠以南冥爲師”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1903년 이후에 간행된 三刊本 『松庵實紀』에는 家狀과 洪重鉉 所撰 諡狀이 빠지고 金演 所撰 祭文과 許傳 所撰 諡狀이 들어 있는데, 여기에는 각각 “從遊溪冥”, “早遊退溪南冥兩先生之門”이라 되어 있다. 崔興璧 所撰 請諡疏 末尾의 기록으로 보면 1885년 재간본 󰡔송암유고󰡕의 간행은 性齋 許傳 所撰 諡狀을 넣어 김면이 퇴계의 문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려고 한 것이었다. 이것이 여의치 않자 1903년 무렵에 다시 三刊本 『松庵實紀』를 간행하여 金演 所撰 祭文과 許傳 所撰 諡狀을 添入하였다. 이렇게 하여 김면이 퇴계의 문인이라는 점을 근거로 1914년 간행된 『陶山及門諸賢錄』에 登載하였다. 그러나 1916년에 『陶山及門諸賢錄辨訂』이란 책이 나와 퇴계의 문인이라 볼 수 없는 인물이 문인록에 들어 있음을 변정하였다. 『송암연보』는 이에 대응하기 위한 구체적 자료의 성격으로 만들어진 듯하다. 연보의 載錄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았고, 편찬자와 편찬시기도 전혀 밝혀져 있지 않다. 본론에서 필자는 『송암연보』의 경우 27개 조항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논술하였다. 이는 27개 조항이 이처럼 문제가 심각하니 나머지도 이미 알려진 것 이외에는 인용할 만한 근거 자료가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수많은 학자들이 논문을 쓰면서 김면이 퇴계의 문인임을 말하고, 이를 근거로 김면의 처신을 논술하고 있다. 김면이 퇴계의 문인이어야 더욱 훌륭하게 드러날 수 있다는 일부 후손의 생각이 이처럼 많은 오류를 생산하기에 이르렀고, 결과적으로는 세상 사람들에게 김면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11.
        2016.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ere are six Lee families who use Seongju as their Gwanhyang (the birthplace of their first ancestor), and they are called the six Seongju Lee families, which include the Nongseo Lee family, the Byeokjin Lee family, the Seongsan Lee family, the Gwangpyeong Lee family, the Gyeongsan Lee family, and the Myeonggyeong Lee family. These six Lee families who use Seongju as their Gwanhyang had different progenitors and frequently married each other. If they use the same Gwanhyang, it is considered as a marriage between people with the same surname and the same family origin. Therefore, it was not easy to indicate Gwanhyang when there was a marriage between people from the six Lee families. Since Seongju and Seongsan were the most commonly used Gwanhyang by the six Lee families, it is highly difficult to find a certain ancestor with an assumption that the ancestor uses today's Gwanhyang, because it is hard to know which family this ancestor is from. Therefore, I want to reveal the origins of the six Lee families and how they indicated their Gwanhyang specifically. This work will be significant since it clarifies the identities of the six Seongju Lee families and provides guidelines to find ancestors related to the six Seongju Lee families. The results of this review come down to the following. First, there are six Lee families who use Seongju as their Gwanhyang, and it includes the Gyeongsan Lee family, the descendants of Akgeobujeong (official title) Lee Deok-bu; the Gwangpyeong Lee family, the descendants of Gwangpyeonggun (official title) Lee Neung; the Nongseo Lee family, the descendants of Nongseogungong (official title) Lee Jang-gyeong; the Myeonggyeong Lee family, the descendants of Myeonggyeongjangwon (signifying winning the first place in the Myeonggyeon exam) Lee Geuk-song; the Byeokjin Lee family, the descendants of General Byeokjin (official title) Lee Chong-eon; and the Seongsan Lee family, the descendants of Seongsangun (official title) Lee Neung-il. Second, the Gyeongsan Lee family, the descendants of the Akgeobujeong, was also called the Bujeong Lee family. As they were also the descendants of Sobuyoon (official title) Lee Gam, they were once called the Soyoon Lee family. Third, the Nongseo Lee family unites and uses their Gwanhyang as the "Seongju Lee family" nowadays. Fourth, the Myeonggyeong Lee family was combined into the genealogy of the Byeokjin Lee family after 1864, and it has been maintained until today. Fifth, the descendants of Lee Gyeon-gan among the descendants of General Byeokjin were once indicated distinctly as the Sanhwa Lee family. Sixth, the Gwanhyang of the six Seongju Lee families was indicated as "Seongju" in the official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era. Seventh, the six Seongju Lee families frequently used "Seongju" and "Seongsan" as their Gwanghyang in historical records. Eighth, "Byeokjin" and "Nongseo" are the most distinctive Gwanhyang among the six Seongju Lee families as they refer to the descendants of General Byeokjin and the descendants of the Nongseogungong. Ninth, the Nongseo Lee family and the Seongsan Lee family temporarily used "Gyeongsan" as their Gwanhyang, and the Nongseo Lee family temporarily used "Gwangpyeong" as their Gwanhyang. However, in general, the Gyeongsan Lee family and the Gwangpyeong Lee family have a historical uniqueness. Finally, the need for distinguishing Gwanhyang began to be gradually recognized after 1593 when genealogies were established, and it was strengthened in around 1800, but it did not completely settle down. In the 1900s, Gwanhyang began to be indicated distinctively. Before then, Seongju and Seongsan were mixed and used so that it was not possible to distinguish the six Lee families only with Gwanhyang.
        12.
        2015.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倻溪 宋希奎(1494-1558)는 佔畢齋 金宗直, 寒暄堂 金宏弼, 新堂 鄭鵬, 松堂 朴英, 杏亭 都衡 등의 인물이 영향을 끼친 星州에서 태어나 고 자라서 출사하고 만년을 보냈던 인물이다. 야계와 사마시 동년이었 던 晦齋 李彦迪 및 7년 연하인 南冥 曺植과 退溪 李滉 등이, 학문적 역량을 크게 드러내었던 시대에 이들과 같이 살면서, 어떠한 삶을 살면 서 어떠한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은, 성주의 학술사 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거니와, 영남의 유학사 및 나아가 우리나라 조선초기의 유학사 내지 정신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작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816년에 초간 목활자본이 나오고 1924년 중간 목판본이 나올 때까 지 남아 전하는 작품이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냥 묻어두기에 는 우리 유학사 내지 정신사의 한 부분을 빠뜨려 두는 일인지라, 이에 대한 연구는 꼭 이루어져야 할 것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이 논문에서의 논의를 요약하여 정리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야계의 가계는 시조로부터 9세에 이르기까지는 합천 야로 지역 에 世居하다가 야계의 6대조인 관찰사 宋構가 성주로 이거함에 따라 성주 사람이 되었다. 야계는 대대로 중앙 관직을 역임한 유력한 가문의 후예로서 어릴 적에 杏亭 都衡으로부터 학업을 익혀 20세에 진사가 되고,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중앙의 청현직을 두루 거치고 지방직으 로는 상주목사, 김해부사, 대구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상주목사에 재임 때 문과 동년인 金光準이 사욕을 부리려는 일에 동조해주지 않음으로 해서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고, 명종 즉위 초에 司憲府 執義로 있으면서 文定王后의 밀지에 따라 尹任·柳寬·柳仁 淑 등의 세 대신을 처형토록 하는데 합의하자는 大司憲 閔齊仁과 大司 諫 金光準의 견해에 목숨을 걸고 반대한 것으로 인해, 54세 때 대구부 사로 재직하던 중에 良才驛 壁書事件이 일어나자 乙巳名人들이 다시 대거 화를 당하였는데, 이 때 야계도 전라도 高山으로 유배되었다. 58 세 때 放還되어 高山亭을 지어두고 65세까지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둘째, 야계의 문학은 그의 삶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孝敬忠信을 체득 하여 실천하는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공자의 제 자 曾晳에게서 보이는 유유자적함과 물아일체를 만끽하는 浴沂風雩의 삶을 추구하였음도 확인하였다. 이 두 가지 면모는 조선 초기 유자로서 의 전형적인 삶의 양식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요컨대 야계는 관직 생활에서 사림으로서의 확고한 자세를 일관되게 유지함으로써 이른바 을사명인으로서 후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퇴처한 뒤 향리의 생활에서는 효제충신과 욕기풍우의 자세를 지니고 유유자적함으로써, 15세기 전반기 사림의 한 전형을 보여주었다고 할 만하다.
        13.
        2014.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is paper introduces a dual-arm robot painter system which is capable of sketching a camera-captured image with short line segments. To express various curved edges in the image by combining line segments, we first apply edge detection algorithm to the entire image, split the edged image into small boxed pieces, and then apply Hough Transformation to each piece so that the edges inside the piece can be approximated with short line segments. To draw the picture within a reasonable time, we designed a simple dual-arm robot system and controlled both arms concurrently according to linear interpolation algorithm. From the experiments, we could verify that simple linear motions can describe various images effectively with a unique brush style.
        14.
        201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南冥 曺植의 神道碑로서 가정 먼저 세워진 것은 1617년 무렵, 그 문인 鄭仁弘이 찬술하고 정인홍의 문인 裵大維가 글씨를 쓴 것이다. 이 비석은 1623년 仁祖反正에 의해 정인홍이 賊臣으로 몰려 처형되고 난 뒤 사람들의 눈앞에서 없어지고 말았다. 겉으로는 적신으로 처형된 정인홍이 찬술한 글이기에 넘어진 것이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퇴계를 은근히 비판한 글이기에 더욱 세워둘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글이 찬술된 것은 1615년에 남명이 영의정에 증직되어 신도비를 세울 수 있었던 조건이 충족되었고, 정인홍이 남명의 문인 가운데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정인홍은, 퇴계가 그 문인들에게 편지나 대화를 통해 여러 차례 남명을 비판하였으므로 그것이 알려져 남명이 문묘에 종사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이 글을 쓰기 이전까지 적어도 7편 정도의 글이 남아 전할 정도로 여러 차례 퇴계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였으며, 이 글은 그 결정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남명의 일생에 대해서는 대곡이 찬술한 묘갈명이 가장 극진하다고 생각하고, 이 신도비명에서는 오로지 남명의 학문 내용이 유가의 정통에 해당되며, 퇴계의 남명 비판은 잘못된 것이라는 논리로 일관하고 있다. 정인홍이 이러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점은 「跋文解」에 보이는 바, 문인으로서 스승의 학문이 誣陷당한 데 대하여 坐視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師生間의 義를 생각한 데서 나온 정당한 행동으로 스스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당대 최고의 인물이라 알려져 있던 퇴계에 대해 과감하게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하였지만, 이는 정인홍이 광해군 때 實職에서 行公해 본적이 없으면서도 遙執朝權하던 山林政丞이었다는 점과 인조반정이라는 당시의 정치적인 문제에 묘하게 맞물려 있었던 것이 첫째 원인이었고, 다음으로는 당대부터 퇴계가 가지고 있었던 막강한 영향력을 내암이 결국 당해내지 못했다는 것이 둘째 원인이라 할 것이다. 정인홍이 정치적으로 패퇴한 인조반정 이후 대부분의 남명 문인이나 정인홍의 문인 후손들이 차츰차츰 남인화하거나 서인화했지만,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 경남 일대에 현재에 이르기까지 400여 년에 걸쳐 남명 정신을 추존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남명의 학문적 영향력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그런 측면에서 보면 정인홍의 남명 신도비명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한 ‘冥道日月’이라 표현한 기대가 앞날을 내다 본 표현이 아닌가 생각된다.
        15.
        2013.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大笑軒 趙宗道(1537-1597)는 丁酉再亂 때 黃石山城에서 장렬하게 일생을 마쳤던 분이다. 당시 그 황석산성에서는 대소헌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런데도 그곳에서 죽은 사람으로 大笑軒과 存齋 郭䞭(1551-1597)만 자주 거론되는 것은 이들이 단순히 縣監이란 벼슬아치였기 때문은 아니다. 이들의 행위는 그 자체로도 기릴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며, 또한 이들이 황석산성에서 殉死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길이 추앙을 받을 수 있었던, 학문과 행실을 겸비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대소헌의 생애를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그의 학문과 삶의 태도에 대해서 고찰한 결과,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는 합의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첫째, 대소헌은 총명한 두뇌를 타고난데다, 鄭斗·盧禛·曺植 등 당대 경상우도에서 가장 이름난 스승으로부터 학문을 사사하였고, 이러한 학문 풍토에서 함께 강학했던 좋은 벗들을 많이 만나, 여기서 학문이 무르익을 수 있었다. 둘째, 「學校策」이나 「倡義文」 등을 통해서, 대소헌의 학문이 社會的 實踐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었고, 이는 바로 曺植의 학문과 깊은 영향관계에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셋째, 대소헌은 대범하고 호방한 삶의 자세를 지녔는데, 학문에 의해 ‘大節이 不踰閑’할 수 있었기에 후인의 추앙을 받을 수 있었다. 황석산성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맞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삶의 자세와 학문의 역량에 의해서 가능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16.
        2012.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무안 회산지 백련의 개화 상태를 통해 개화 이력을 알 수 있는 지표 마련 및 이를 이용하여 생태 체험관광 자원 등으로 활용하기 위한 자료 확보 측면에서 개화 기간 중의 화형 변화를 조사하였다. 꽃은 개화 1일째는 6시에, 2일째는 5시 40분, 3일째는 6시 10분, 4일째는 5시 10분에 개화가 시작되어 오전 중에 피었다가 12시 이후에는 오므려들었다. 꽃의 직경은 개화 1일째는 10시 정각에 7.6cm, 2일째는 7시 정각에 25.2cm, 3일째는 8시 정각에 23.7cm, 4일째는 10시 정각에 22.2cm로 최대치를 나타냈다. 꽃잎 수는 14개였으며, 3일째에 2개가 탈락되었으며, 4일째 12시 이전에 모두 탈락되었다. 꽃잎의 각도는 개화 1일째는 모두 직립하였으며, 1일째와 4일째는 하향된 꽃잎이 없었고, 2일째는 수평, 3일째는 직립형과 사립형이 많았다. 이와 같이 백련 꽃의 화형은 개화 후 경과 일수에 따른 각각의 특성이 뚜렷하였다. 따라서 개화 상태별로 시청각 자료나 모형을 만든 후 시청각 자료 및 모형을 보면서 개화 이력을 추적할 수 있게 하면 무안 회산지 백련은 생태체험 관광 자원으로서 활용가치가 더욱 높아질 것으로 생각된다.
        17.
        2010.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남명학연구󰡕 29집 소재 「󰡔南冥集󰡕 諸板本의 刊行年代」라는 오이 환의 논문에 대한 반박 논문이다. 요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남명집󰡕 기유본 문경호 발문의 ‘임인(1602) 년간’은 문집의 편집 작업 이 진행된 시점을 언급한 것이고, 초간된 것은 서문이 찬술된 갑진(1604)년이 며, 장판각에 불이 난 뒤 순찰사 유영순의 후원에 의해 병오(1606)년 무렵에 1 차 중간이 있었고, 다시 이를 부분적으로 수정하고 보유를 추가하여 간행한 것 이 기유(1609)본이다. 둘째, ‘年間’, 즉 ‘즈음’이란 용어가 간행연대를 적시한 용어로 보기에는 분명 하지 않고 너무나 느슨하다. 간행한 것은 분명한 것이고, 문집 편찬을 의논한 것은 오늘날처럼 간행위원회를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1600년의 󰡔퇴계집󰡕 간행 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 시기가 불분명하였던 것이다. 셋째, 갑진년 8월에 정인홍이 찬술한 서문이, 문경호가 발문을 실은 그 책에 같이 실려 있다는 것은 문집의 초간이 갑진년에 있었다는 것을 가장 웅변적으 로 말해주는 것이다. 넷째, 초간본의 장판각이 불타고 유영순에 의해 중간이 되었다면 이는 유영순 의 관찰사 재임 기간[1605년 9월-1607년 3월]과 관련시키면 병오(1606)년 무렵이라 해야지, 오이환처럼 갑진(1604)년으로 볼 수는 없다. 다섯째, 오이환이 󰡔고대일록󰡕의 신축(1601)년과 임인(1602)년 등에 보이는 ‘看役’이 문집 간행의 일이라고 해석할 근거가 없다. 더구나 계묘(1603)년 겨울 에 李堉이 鄭逑의 심부름으로 󰡔남명집󰡕의 편집 작업을 주도하던 鄭仁弘에게 특 정한 글을 제외하기를 요구하였는데, 정인홍이 “선생의 문자라면 片言隻字라도 가볍게 취하거나 뺄 수 없다.”며 거절하였으니, 이는 1603년 겨울 이전까지 문 집의 편집 작업이 계속되고 있었다는 근거 자료가 된다. 여섯째, 이상 네 가지 이유로 임인(1602)년에 󰡔남명집󰡕이 초간되었다고 주장 한 오이환의 설이 설득력을 잃게 된다. 일곱째, 이에 오이환은 유영순에 관한 문경호의 기록이 신빙성이 없다며, 하 징의 「덕천서원기」와 배대유의 「신산서원기」에서의 관찰사 기록 착각의 예를 들었다. 그러나 이는 논리가 닿지 않는다. 하징과 배대유가 설사 관찰사에 대하 여 착각했다 해도, 그것이 문경호의 착각에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증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필자는 그것조차 오이환이 사실이 아닌 주장을 한 것으로 논증하 였다. 여덟째, 우선 하징의 「덕천서원중건기」에서 윤근수가 관찰사로서 재임 기간 [1574년 10월-1575년 10월] 중에 덕천서원의 창건을 지원하였다는 것을 오 이환은 하징이 착각하여 잘못 기록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재임 중에 그가 지원한 뒤 1576년 봄부터 일을 시작했다고 보면 하징의 기록에 전연 무리가 없 음을 알 수 있다. 아홉째, 배대유의 「신산서원기」는 󰡔모정집󰡕 기록을 보면 ‘방백읍재’ 밑에 윤 근수와 하진보가 각각 세주로 처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세주를 후인이 추기한 것으로 보지 않으려는 것은, 오이환이 배대유가 착각했다고 보기 위함 에 다름 아니다. 배대유는 당시의 관찰사 김수와 김해부사 양사준의 인품을 문 제삼아 그들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애초에 ‘방백읍재’라고만 하고, ‘金方伯睟梁知府思俊’이라 표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8.
        200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남명학파는 그 성립 초기, 즉 남명이 생존하던 시기와 그 문인집단이 왕성하 게 활동하던 시기인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반에는 우리나라 학계와 정계를 주도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때 남명의 문인 내암 정인홍이 ‘賊臣’으로 몰려 처 형을 당하고부터 상황은 急轉直下하였다. 반정 이후 남명학파적 성격을 유지한 채 정권에 참여할 수 없었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남명학파는 명목과 실상을 동시에 유지하기 어려웠고, 이러한 연유로 해서 17세기 중후반부터 차츰 退溪 學派化 내지는 栗谷學派化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도 내심 북인 세력으로 존재하던 남명학파의 일부가 1728년에 ‘戊申亂’을 일으키다 궤멸됨으로써 설상가상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 다. 이즈음에 이르게 되면 남명학파의 목숨은 거의 끊어진 듯이 보인다. 그러나 비록 미미하다 할지라도 진주 인근에서는 河世應·河必淸·李甲龍·李志容·李佑贇 등의 인물이 꾸준히 학맥을 이어왔던 것이 분명히 포착된다. 그리하여 18세기 말엽에 이르러 정조가 남명에 대한 제문을 직접 지어 사제케 한 뒤로 경상우도 지역의 사기가 올랐음인지 19세기에 들어서면 李源祚·張福樞·李震相·朴致馥 등 을 이어 金麟燮·許愈·崔琡民·鄭載圭·金鎭祜·郭鍾錫 등의 저명한 학자가 대거 굴 기하게 되었다. 특히 俛宇 郭鍾錫(1846-1919)은 한주 이진상의 문인으로서 우도 지역은 물 론 좌도 지역을 포함하여 전국적 명망을 한 몸에 받는 대유가 되어, 고종의 지 우를 입었으나 망국의 현실을 되돌릴 수는 없었고, 경술국치 이후 1919년 파리 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조선 유림의 대표로서 독립을 청원하는 장서를 보내 는 일을 주도한 뒤 일생을 마친 인물로, 그의 저술이 너무 호한하여 근래에 이 르도록 깊은 연구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면우 곽종석의 여러 면모 가운데 남명학을 계승하고 있는 측면을 부각하여 그 양상과 의미를 더듬어 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면우는 태어나고 자란 곳이 남명학파적 요소가 뿌리 깊은 곳이고, 혈연 을 중심으로 살펴본 그의 가계에서도 남명학파적 요소가 두드러진다. 그러나 학연의 측면에서 보면 한주 이진상의 학문을 계승하였으므로 퇴계학파적 요소 가 두드러진다. 둘째, 면우는 남명 정신의 핵심을 그의 ‘敬義’ 사상에서 찾고, 이 사상이 우도 지역 곳곳에서 면면히 전승되어 왔던 것이므로, 앞으로도 계속 전승해가야 한 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셋째, 면우는 「신명사부」를 크게 네 단락으로 구성하여 신명사의 유래, 靜的 居敬의 상태, 處事接物時에 私欲과 邪念이 일어나는 과정, 이를 廝殺하여 이른 바 ‘復其初’하는 과정 등을 신명사가 겪는 治亂의 역사로 상정하여 매우 역동적 으로 묘사하였는데, 이를 남명이 내세웠던 경의와 관련하여 생각해 보면, 앞의 두 단락은 敬을 드러낸 것이고, 뒤의 두 단락은 義를 드러낸 것이다. 敬義를 직 접적으로 내세우지 않으면서 敬義의 의미를 매우 심도 있게 드러내었다. 넷째, 면우는 南冥을 매우 尊慕하였지만 退溪와 함께 崇尙하는 면모를 보이고 있다. 이는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파의 학문적 전통이 희미해지면서 남인의 경 우 퇴계학파의 학문이 서서히 그 자리를 대체해 온 결과라 할 것이다. 남명의 사상 가운데 그 핵심이라 이를 ‘敬義’에 대한 계승 의지는 면우 또한 매우 투철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맞물려 있는 엄정한 출처와 실 천 지향의 측면은 다소 약화되고 성리학적 이론에 대한 면밀한 탐구가 있었으 니, 이는 대체로 퇴계학파적 면모의 확대로 인한 자연스런 현상으로 보인다. 학 자로서 사우의 연원은 결정적이므로 면우의 문집에 퇴계학파적 면모가 두드러 지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남명학파로서의 자부심과 그에 대한 지향성이 뚜렷하다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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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滄洲 河憕(1563-1624)은 晉州 丹牧 사람으로 南冥 曺植의 문인 河魏寶의 다 섯째 아들로 태어나 삼촌인 河國寶의 아들로 입계한 인물이다. 하위보의 아우 河晉寶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사간을 역임했으며 역시 南冥 曺植의 문인이 다. 하위보의 아들 河恒도 曺植의 문인이었고, 그 아들 河仁尙은 광해군 때 南 冥 曺植을 문묘에 종사해 달라는 상소를 주도한 인물이다. 게다가 河晉寶의 딸 이 鄭仁弘의 아들과 혼인하였으니 집안 전체가 남명학파라 이를 만하다. 河憕이 태어나 활동한 시기는 曺植의 영향을 직접 받은 그의 문인들이 왕성하 게 활동하던 시기와 겹친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럽게 曺植 문인들의 뜻을 받들 어 曺植의 정신을 확산시키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가정에서 받은 영향 을 제외하면 그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이는 來庵 鄭仁弘과 寒岡 鄭逑 및 崔 永慶·河沆·成汝信 등이며, 가깝게 지냈던 벗 李屹·吳長·鄭蘊·趙㻩 등과의 교제 를 통해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입었을 것이다. 河憕은 1602년 이후 1611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덕천서원의 여 러 건물을 중건하는 일을 주도하였고, 또한 1614년부터 1623년까지 덕천서원 원장을 하는 동안 1617년에 曺植의 󰡔학기유편󰡕을 덕천서원에서 간행하였고, 1622년에는 󰡔남명집󰡕 임술본을 간행하였으며, 1615년에는 고령에서 曺植을 문묘에 종사해 주기를 요청하는 소회를 주도하는 등의 일들을 하였다. 이는 그 가 1600년대 초기부터 1624년까지 진주 지역 남명학파를 사실상 주도하였음 을 알게 하는 일들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여러 가지 일들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정인 홍을 만났다거나 의논했다거나 그의 의견을 들었다는 등의 일은 그의 문집에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정인홍이 인조반정 때 적신으로 처형당한 뒤 약 300년 동안 신원되지 못하였던 데 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쌍계창수의 출현도 정인홍 문인의 후예들이 정인홍의 흔적을 부정하려는 의 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고, 그래서 결국 비슷한 처지에 있는 집안의 후예들이 모여서 세강계를 조직하기에까지 이른 것이다. 「쌍계창수」와 「신안어록」 등은 曺植에 대한 추숭 사업을 가장 충실히 해낸 河憕의 일생을 잘 드러내려 한 것임 에도, 河憕의 스승으로서 끝까지 같은 시대를 살면서 曺植을 추숭하려다 죽음 에까지 이른 정인홍을 철저히 숨기려 했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라 할 것이 다. 이것이 남명학파의 비극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떳떳이 이를 드러내어 사실 을 바로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결국 河憕은 내암 정인홍의 문인으로서 그를 대신하여 진주 지역에서 曺植을 추숭하는 일을 주도했으며, 이 가계의 노론화 도 기실 여기서 비롯하였던 것이다.
        20.
        200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구암 이정(1512-1571)은 1544년 그의 나이 33세 이후 퇴계를 사사하여 그 학문을 표적으로 삼아 자신의 학문을 이루려 하였음은 물론, 인근 고을에 거처 하던 남명과도 끊임없이 친분 관계를 유지하며 그 고상한 정신 경계를 추앙하 여 자기화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구암의 「신명사부」는 남명의 「신 명사도명」과 명칭만 유사한 것이 아니라, 남명 사상의 핵심이라 할 경의 사상을 자기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구암은 퇴계와 함께 남 명을 자신의 학문 표적으로 삼아, 평생을 성의와 집념으로 위기지학에 종사했 던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퇴계는 주자학적 방법만으로도 성현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 래서 주자학만을 고집하는 崇正學의 기치를 내걸어 이에 어긋나는 방향으로 가 는 사람을 指斥하기에 이르렀다. 남명은 성현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 중요하다 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주자학적인 요소가 아닌 것이 학문 방법으로 원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퇴계는 목적을 위해서는 방법이 바르지 않으면 안 된다 는 것이고, 남명은 자신에게 맞는 여러 방법을 사용하여 목표를 이루는 것이 중 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구암이 학문의 표적을 퇴계에게도 두고 남명에게도 두었으나, 세상에서는 대 체로 구암의 학문이 퇴계를 이은 것으로만 언급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는 앞으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구암의 학문 표적을 퇴계에 게만 두고 남명과는 친분 관계 이상의 학문적 영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는 구암의 학문에 대한 진실한 접근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이로 인해 남명학파 내에서도 구암의 위치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위치를 찾을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제 우리는 구암을 한강이나 동강처럼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를 아우르는 노 력을 한 초기 인물로서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덕계가 퇴계・남명 양현 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한강과 동강을 이끌어 양현의 학문을 겸하도록 하는 데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고 볼 수 있듯이, 구암은 덕계나 한강・동강보다 먼저 양현 의 학문을 표적으로 하여 하나의 통합된 학문을 추구하였다고 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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