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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茅谿 文緯는 그의 『茅谿日錄』 끝부분에서 「義兵三將事蹟」이란 글을 실어 두었는데, 여기서의 義兵三將이란 鄭仁弘‧金沔‧郭再祐를 가리키는 말이다. 임진왜란 이후 200년 이상 지나는 동안 이들이 모두 남명 문인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송암 김면이 남명 문인일 뿐만 아니라 퇴계의 문인이기도 하다는 기록이 나옴으로 인해 의병활동의 분석과 의미 부여에 석연치 않은 변화가 일어났다. 필자 또한 변개된 자료를 보고 김면이 남명 문인이면서 퇴계 문인이라고 人名錄을 정리한 적이 있다. 그러나 두 차례 간행된 『송암실기』와 『송암유고』 및 『송암연보』, 樊巖 蔡濟恭이 찬술한 金沔 神道碑의 내용과 실제 신도비를 대조해 본 결과, 이들을 면밀히 검토하여 진실을 밝혀야겠다고 생각하여 본고를 집필하게 되었다. 송암 김면에 관한 전기자료는 모두 세 차례 간행되었다. 최초의 것은 1786년에 간행된 『松庵先生實紀』이다. 그 다음의 것은 1885년에 간행된 『松菴先生遺稿』이다. 세 번째는 1903년 이후에 간행된 『松庵先生實紀』이다. 작자 미상의 김면 家狀은 1786년에 간행된 초간본 『松庵實紀』에 실려 있다. 여기에는 “師事曺南冥先生”이라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책에 실린 洪重鉉 所撰 諡狀에 “遊南冥之門”이라 되어 있다. 이는 송암 김면에 관한 최초의 전기자료라는 점에서 가장 믿을 만한 기록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1885년에 간행된 再刊本 『松菴遺稿』에 실린 崔興璧 所撰 請諡疏와 蔡濟恭 所撰 神道碑에도 각각 “先正臣文貞公曺植之高弟”, “弱冠以南冥爲師”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1903년 이후에 간행된 三刊本 『松庵實紀』에는 家狀과 洪重鉉 所撰 諡狀이 빠지고 金演 所撰 祭文과 許傳 所撰 諡狀이 들어 있는데, 여기에는 각각 “從遊溪冥”, “早遊退溪南冥兩先生之門”이라 되어 있다. 崔興璧 所撰 請諡疏 末尾의 기록으로 보면 1885년 재간본 󰡔송암유고󰡕의 간행은 性齋 許傳 所撰 諡狀을 넣어 김면이 퇴계의 문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려고 한 것이었다. 이것이 여의치 않자 1903년 무렵에 다시 三刊本 『松庵實紀』를 간행하여 金演 所撰 祭文과 許傳 所撰 諡狀을 添入하였다. 이렇게 하여 김면이 퇴계의 문인이라는 점을 근거로 1914년 간행된 『陶山及門諸賢錄』에 登載하였다. 그러나 1916년에 『陶山及門諸賢錄辨訂』이란 책이 나와 퇴계의 문인이라 볼 수 없는 인물이 문인록에 들어 있음을 변정하였다. 『송암연보』는 이에 대응하기 위한 구체적 자료의 성격으로 만들어진 듯하다. 연보의 載錄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았고, 편찬자와 편찬시기도 전혀 밝혀져 있지 않다. 본론에서 필자는 『송암연보』의 경우 27개 조항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논술하였다. 이는 27개 조항이 이처럼 문제가 심각하니 나머지도 이미 알려진 것 이외에는 인용할 만한 근거 자료가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수많은 학자들이 논문을 쓰면서 김면이 퇴계의 문인임을 말하고, 이를 근거로 김면의 처신을 논술하고 있다. 김면이 퇴계의 문인이어야 더욱 훌륭하게 드러날 수 있다는 일부 후손의 생각이 이처럼 많은 오류를 생산하기에 이르렀고, 결과적으로는 세상 사람들에게 김면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2.
        2017.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덕천서원은 南冥 曺植(1501-1572)을 향사하는 서원이다. 그 문인 寧無成 河應圖가 자신의 田莊을 서원 터로 제공하여서 처음 德山書院 으로 창건을 보게 되었다. 이 서원의 창설은 남명의 감화를 받은 여러 문인 들의 스승을 존모하는 마음과 이를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경상도 관찰사와 진주 목사가 적극적으로 도와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서원은 설립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강학활동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학파 내에서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는 원장과 원임이 있어서 제대로 운영하여야만, 제향된 인물이 추구했던 학문 정신을 체득할 수 있고, 나아가 사회적으로 교화의 역할 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 이 서원의 운영을 주도하였던가 하는 문제는 서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문제의 하나다. 덕천서원은 남명의 만년 강학지에 설립된 것이어서 남명 문인들이 대거 참여하여 설립이 이루어졌고, 따라서 초기에 서원 운영을 담당했 던 이들은 ‘범남명학파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남명학파가 주도하던 북인 세력이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정치적 으로 패퇴함으로써 급변할 수밖에 없었다.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파를 주도하던 가문으로 단성 지역에는 안동권 씨, 성주이씨, 합천이씨, 진주류씨, 상산김씨 등이 있었고, 진주 지역으 로는 안계‧명석 및 수곡‧단목에 거주하는 진양하씨 사직공파와 시랑공 파, 나동의 태안박씨, 소남의 함안조씨 등이 있었다. 물론 이들 가문 이외에도 여러 십여 가문이 있지만 원임에 선임된 숫자의 측면에서 보면 이들 가문이 덕천서원의 운영을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 덕천서원의 창건 및 초기 중건에 관여하였던 인물의 후손들이거나, 초기 원생록에 이름이 올라 있던 인물들의 후손 들이다. 남명학파는 인조반정 이후 30여 년이 지난 즈음 남명집 훼판 사건을 기점으로 해서 서인화와 남인화가 이루어지는데 서원의 운영은 남인이 주도하였다. 따라서 이들 가문은 모두 남인 가문에 속한다. 그러므로 사우의 연원 또한 남인 계통을 따라서, 갈암‧밀암‧대산‧정재‧한주 등과 성호‧순암‧번암‧성재 등을 종유한 인물들이 서원 운영을 주도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3.
        201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瞻慕堂 林芸(1517-1572)은 조선 시대 安陰 葛溪에 살았던 儒學者로, 그 형 葛川 林薰(1500-1584)과 함께, 살아서 孝⼦ 旌閭를 받아 당대에 實踐儒學의 表象으로 알려져 사후에 一蠹 鄭汝昌(1450-1504)을 제향 하던 ⿓門書院에 배향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형 갈천과 친밀하게 교제하였던 南冥 曺植(1501-1572)을 從遊하였던 것으로 山海師友淵源錄에 收錄되어 있는바, 학문의 성취와 관련지어 유추해 보 거나 연령의 차이를 감안한다면, 남명의 문인이라 하더라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瞻慕堂集을 살펴보면, 退溪 李滉(1501-1570)과의 師承 관계를 표현 하고 있는 글들이 곳곳에 보일 뿐만 아니라 후인이 찬술한 瞻慕堂 墓道文字에서도 退溪의 門人임은 분명히 밝히고 있으나, 南冥과의 관련성을 짐작할 만한 첨모당 본 인의 글은 쉽게 찾아내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남명이 66세 때 첨모당을 만난 사실이 남명학파의 여러 기록에 남아 전하고 그 이 전에 만나서 담화를 나눈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1566년이라면 첨모당이 50세 때이 니, 첨모당의 학문에 대한 남명의 충고가 첨모당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첨모당의 학 문의 방향이 크게 바뀌었다고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남명연보에 전하는 남명과 첨모당의 만남 정도는 싣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하는 데 대해 서는 지금 전하는 첨모당집이 아무런 답변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는 첨모당의 손자 임곡 임진부가 남명이 절교했던 귀암 이정의 曾孫壻라는 데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林⾕이 자신과 친하게 지내던 无悶 堂 朴絪이 편찬한 山海師友淵源錄의 龜巖 李楨 부분의 기록 가운데 淫婦獄事와 관련된 기록을, 일찍이 직접 刪削해 주기를 요청한 적이 있었고, 뒤에는 林⾕의 아 들 林汝栢이 无悶堂의 아들 朴曼에게 편지로 간곡하고 단호하게 요청하고 있다. 임 여백은 귀암을 향사하고 있는 龜溪書院의 院⻑을 지냈고, 귀암을 위해 귀계서원의 賜額을 요청하여 성사시켰으며 귀암의 시호를 요청하는 상소도 작성하여 올린 적이 있었다. 남명집에 귀암 관련 기록을 남긴 인물은 내암 정인홍인데, 정인홍이 무민당의 스승일 뿐만 아니라 임곡과도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다 임곡의 두 아들 이 모두 무민당의 문인이 되었으니, 내암은 임곡의 아들들로서는 스승의 스승인 셈 이어서 비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인홍이 마침 인조반정으 로 인해 적신으로 처형당한 뒤 신원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1650년대 이후에는 나라에서뿐만 아니라 강우 유림 사회에서도 정인홍을 적신으로 인정하고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니 임곡 집안의 처지에서는 첨모당집을 간행할 때에 될 수 있는 한 남명과 관련을 짓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4.
        201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南冥 曺植의 神道碑로서 가정 먼저 세워진 것은 1617년 무렵, 그 문인 鄭仁弘이 찬술하고 정인홍의 문인 裵大維가 글씨를 쓴 것이다. 이 비석은 1623년 仁祖反正에 의해 정인홍이 賊臣으로 몰려 처형되고 난 뒤 사람들의 눈앞에서 없어지고 말았다. 겉으로는 적신으로 처형된 정인홍이 찬술한 글이기에 넘어진 것이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퇴계를 은근히 비판한 글이기에 더욱 세워둘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글이 찬술된 것은 1615년에 남명이 영의정에 증직되어 신도비를 세울 수 있었던 조건이 충족되었고, 정인홍이 남명의 문인 가운데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정인홍은, 퇴계가 그 문인들에게 편지나 대화를 통해 여러 차례 남명을 비판하였으므로 그것이 알려져 남명이 문묘에 종사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이 글을 쓰기 이전까지 적어도 7편 정도의 글이 남아 전할 정도로 여러 차례 퇴계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였으며, 이 글은 그 결정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남명의 일생에 대해서는 대곡이 찬술한 묘갈명이 가장 극진하다고 생각하고, 이 신도비명에서는 오로지 남명의 학문 내용이 유가의 정통에 해당되며, 퇴계의 남명 비판은 잘못된 것이라는 논리로 일관하고 있다. 정인홍이 이러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점은 「跋文解」에 보이는 바, 문인으로서 스승의 학문이 誣陷당한 데 대하여 坐視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師生間의 義를 생각한 데서 나온 정당한 행동으로 스스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당대 최고의 인물이라 알려져 있던 퇴계에 대해 과감하게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하였지만, 이는 정인홍이 광해군 때 實職에서 行公해 본적이 없으면서도 遙執朝權하던 山林政丞이었다는 점과 인조반정이라는 당시의 정치적인 문제에 묘하게 맞물려 있었던 것이 첫째 원인이었고, 다음으로는 당대부터 퇴계가 가지고 있었던 막강한 영향력을 내암이 결국 당해내지 못했다는 것이 둘째 원인이라 할 것이다. 정인홍이 정치적으로 패퇴한 인조반정 이후 대부분의 남명 문인이나 정인홍의 문인 후손들이 차츰차츰 남인화하거나 서인화했지만,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 경남 일대에 현재에 이르기까지 400여 년에 걸쳐 남명 정신을 추존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남명의 학문적 영향력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그런 측면에서 보면 정인홍의 남명 신도비명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한 ‘冥道日月’이라 표현한 기대가 앞날을 내다 본 표현이 아닌가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