瞻慕堂 林芸(1517-1572)은 조선 시대 安陰 葛溪에 살았던 儒學者로, 그 형 葛川 林薰(1500-1584)과 함께, 살아서 孝⼦ 旌閭를 받아 당대에 實踐儒學의 表象으로 알려져 사후에 一蠹 鄭汝昌(1450-1504)을 제향 하던 ⿓門書院에 배향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형 갈천과 친밀하게 교제하였던 南冥 曺植(1501-1572)을 從遊하였던 것으로 山海師友淵源錄에 收錄되어 있는바, 학문의 성취와 관련지어 유추해 보 거나 연령의 차이를 감안한다면, 남명의 문인이라 하더라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瞻慕堂集을 살펴보면, 退溪 李滉(1501-1570)과의 師承 관계를 표현 하고 있는 글들이 곳곳에 보일 뿐만 아니라 후인이 찬술한 瞻慕堂 墓道文字에서도 退溪의 門人임은 분명히 밝히고 있으나, 南冥과의 관련성을 짐작할 만한 첨모당 본 인의 글은 쉽게 찾아내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남명이 66세 때 첨모당을 만난 사실이 남명학파의 여러 기록에 남아 전하고 그 이 전에 만나서 담화를 나눈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1566년이라면 첨모당이 50세 때이 니, 첨모당의 학문에 대한 남명의 충고가 첨모당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첨모당의 학 문의 방향이 크게 바뀌었다고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남명연보에 전하는 남명과 첨모당의 만남 정도는 싣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하는 데 대해 서는 지금 전하는 첨모당집이 아무런 답변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는 첨모당의 손자 임곡 임진부가 남명이 절교했던 귀암 이정의 曾孫壻라는 데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林⾕이 자신과 친하게 지내던 无悶 堂 朴絪이 편찬한 山海師友淵源錄의 龜巖 李楨 부분의 기록 가운데 淫婦獄事와 관련된 기록을, 일찍이 직접 刪削해 주기를 요청한 적이 있었고, 뒤에는 林⾕의 아 들 林汝栢이 无悶堂의 아들 朴曼에게 편지로 간곡하고 단호하게 요청하고 있다. 임 여백은 귀암을 향사하고 있는 龜溪書院의 院⻑을 지냈고, 귀암을 위해 귀계서원의 賜額을 요청하여 성사시켰으며 귀암의 시호를 요청하는 상소도 작성하여 올린 적이 있었다.
남명집에 귀암 관련 기록을 남긴 인물은 내암 정인홍인데, 정인홍이 무민당의 스승일 뿐만 아니라 임곡과도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다 임곡의 두 아들 이 모두 무민당의 문인이 되었으니, 내암은 임곡의 아들들로서는 스승의 스승인 셈 이어서 비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인홍이 마침 인조반정으 로 인해 적신으로 처형당한 뒤 신원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1650년대 이후에는 나라에서뿐만 아니라 강우 유림 사회에서도 정인홍을 적신으로 인정하고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니 임곡 집안의 처지에서는 첨모당집을 간행할 때에 될 수 있는 한 남명과 관련을 짓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