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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南冥 曺植은 詩 창작이 교만심을 일으키므로 수양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詩荒戒’의 입장을 견지했다. 그리하여 남명학파는 詩 창작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인 경향을 가졌다. 하지만 남명의 제자인 覺 齋 河沆은 이와 달리 詩 창작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詩 작품이 뛰어나다 는 평가를 받았다. 그렇다면 하항이 추구한 道學과 그가 지은 詩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이 글의 문제의식은 이 점에서 출발했으며, 이 문제 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하항이 지은 道學詩에 주목했다. 그 결과, 하항의 道學詩는 문학을 통해 그가 추구한 道學을 밝히고자 했으며, 그 효용은 자신의 修己뿐만 아니라 世敎와도 관련이 깊었다. 남명을 비롯한 남명학파의 학자들이 ‘詩荒戒’를 견지하여 作詩를 부정 적으로 인식한 것에 비해, 하항은 시를 통해 도학의 효용을 이루고자 노력한 것이었다. 이러한 결론에 의거할 때, 남명학파의 학맥에서 河沆 - 河受一 - 河弘度 등으로 이어진 유파가 구축한 문학에 대해 구명하는 작업이 후속 과제로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더 나아가서 는 남명학이라는 큰 흐름 가운데 다양한 유파의 특성을 구분하고, 그것이 어떻게 전승되어 나갔는지를 확인하는 연구들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문제의식을 가지게 된다.
        2.
        2019.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復菴 曺垣淳(1850-1903)이 南冥 曺植(1501-1572)의 핵심 사상을 담지하고 있는 「神明舍圖」와 「神明舍銘」에 대해 어떤 관점에서 해석했으며, 그것이 가지는 의의가 무엇인지를 고찰한 것이다. 조원순은 남명의 10세손으로서 남명학의 계승과 선양을 평생의 사명 으로 삼은 학자이다. 그는 이 사명을 위해 「神明舍圖銘」에 대해 註解하 고 그림을 개정했으며, 1897년에는『南冥先生全集』을 간행했다. 조원순은 「神明舍圖銘解」ㆍ「論神明舍圖」ㆍ「辨神明舍圖」ㆍ「客辨」 등 네 편의 저술을 지어 「신명사도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의 해석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신명사도」의 구조를 上面의 持敬과 下面의 立誠으로 파악한 점이다. 「신명사도」에 대한 조원순의 설명을 토대로 남명의 학문에서 敬ㆍ義는 방법에 해당하며, 誠은 도달해야 할 목표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조원순은 남명의 「신명사도명」을 周敦頤의 「太極圖說」과 동일한 내 용으로 해석했으며, 이전의 「신명사도」를 고쳐 새롭게 개정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것을 통해 남명의 학문이 老莊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성리학에 근본한 순정한 학문이었다는 점을 밝히려 했다.
        3.
        201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어떤 인물이 남긴 문학작품과 그의 삶에 대한 기록을 읽을 때, 그것이 담아내지 않은 혹은 담아내지 못한 행간 사이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가 살아간 시대의 배경 속에 놓고 파악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인물이 선택한 사회적 참여나 은일적 처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시대의 상황이 과연 어떠했는지가 분명하게 설명되어야 하며, 그런 시대 속에서 그 인물이 선택한 처세는 정당한 것이었는가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박내오가 살아간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의 은일적 삶이 가지는 의미를 살펴보았으며, 그 연장선에서 지리산 유람에 나타난 그의 의식과 지향이 무엇이었는지를 짚어보고자 했다. 지리산 유람에 나타난 박내오의 의식과 지향을 살펴봄으로써 그의 내적 정체성이 남명학파에 가깝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이러한 박내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18세기 강우지역의 인물 가운데 남명학파로 거론되지 않은 인물들을 새롭게 발굴하고 연구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4.
        2018.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제문이 가지는 특성에 주목하여 南冥 曺植(1501-1572)의 제자들이 지은 11편의 제문을 분석한 것이다. 이 작업을 통해 남명의 제자들이 문하에 나아간 때는 언제이며, 당시에 그들이 저마다 받은 각별한 가르침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았다. 11편의 제문에 드러난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오건은 1551년에 남명의 문하에 나아갔으며, 자신이 스승에게 받은 특별한 가르침을 ‘공부하는 방법’과 ‘때를 알아보는 의리’로 함축했다. 정인홍은 남명의 교육은 책을 잡고 읽는 강학이 아니라 제자들의 정신을 깨우쳐 스스로 터득하도록 하는 방법이었다고 술회했다. 김우옹은 남들보다 백배 천배 노력하라는 말씀, 출처에 관한 경계, 성성자를 전해 받은 일, ‘雷天’ 두 글자의 훈계 등을 남명에게 받았으며, ‘서리 내린 소나무와 눈 쌓인 측백나무’처럼 어떠한 어려움에도 자신을 간직하라는 장려를 입었다. 정구는 남명이 6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 밤낮을 이어가며 강학을 진행했는데도 지치는 기색이 없었다고 회고하며 스승이 제자들에게 얼마나 지극한 정성으로 가르쳤는지를 서술했다. 최영경은 그 어떤 가르침보다 남명이 가진 ‘깔끔한 맑은 기풍’에서 큰 배움을 얻었다. 하항은 남명의 교육 방법의 특징으로 일에서 비유를 취해 깨우치게 했다는 점을 특기했다. 이 기록을 통해 남명이 문장을 지을 적에만 비유적 표현을 많이 사용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도 적절하게 활용하여 깨닫도록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로는 스승의 모습을 봄날에 눈이 녹는 듯이 감화시키는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제신은 스승의 곁에서 오랫동안 지켜보았으므로, 그분의 언행이 일치한 것은 자신만이 안다고 확신했다. 류종지는 남명의 교육 방법을 ‘병통의 뿌리를 시원하게 도려내고 뒤이어 약을 처방하는 것’이라고 기억했다. 곽율은 남명이 제자들을 가르칠 적에 두 양단을 들어 남김없이 극진하게 말씀해주셔서 정성스러운 가르침에 감화를 입어 분발하게 되었다고 서술했다. 조원은 자신의 자질이 매우 부족했지만 정성스럽게 가르쳐주셨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선비[佳士]’로 장려해주신 일에 깊이 감격했으며, 가르침의 핵심을 ‘居敬窮理’라고 요약했다. 이러한 내용에 근거하여 두 가지로 그 의미를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제문의 작자들은 남명 문하에서 중요한 비중을 가지는 제자들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데, 남명이 산청의 산천재에 은거한 만년에 입문한 학자들이 다수를 차지한다는 점이 주목된다. 둘째, 남명은 절실한 비유에 의해 새롭게 각성시키는 것, 핵심 단어와 구체적인 형상을 통해 수양의 목표를 분명하게 제시하는 것, 자신이 살아온 삶에 근거해 학자가 추구해야 할 이상을 보여주는 것 등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5.
        2017.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인조반정 이후 西人 老論系 학자들이 南冥 曺植을 의도적으로 폄하하는 상황 속에서, 남명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주장하여 존숭과 선양을 촉구한 이들은 星 湖 李瀷과 그의 제자들이었다. 조선후기에 남명학파가 매우 어려운 여건 속에 서도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성호학파 학자들의 노력이 중요한 역할 을 했다고 이해된다. 이 글은 성호의 제자인 順菴 安鼎福이 󰡔南冥集󰡕에 기록한 箚記를 통해 그가 남명의 학문과 삶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졌으며, 그 근거가 구체적으로 무엇이 었는지를 살펴보았다. 箚記에 근거해 볼 때, 안정복은 󰡔남명집󰡕을 매우 면밀하 게 읽고 관련 사실이나 자료를 참조하면서 고찰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무엇 때문에 󰡔남명집󰡕을 정밀하게 연구했을까? 그 이유는 무엇보다 남명이 진 정 어떤 인물인가를 깊이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판단된다. 남명의 문학 작품에 대한 품평이나 견해를 전혀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점, 인물ㆍ시기ㆍ사 건 등에 집중적인 관심을 기울이며 사실과 진위 여부를 정밀하게 고증한 점 등 을 고려한다면, 그가 󰡔남명집󰡕을 읽을 때 무엇에 유의했는지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안정복은 남명에 대한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해 그 인물의 학문과 인품에 관한 평가를 스스로 확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알게 된 남명의 학문 과 언행을 벗과 제자들을 권면할 때 인용하여 말했으며, 남명과 관련 있는 인물 들의 글을 지을 때는 반드시 그 연관성을 드러내어 연원을 밝혔다. 그러므로 남 명에 대한 안정복의 관심과 선양은 남명학파에게 가장 암흑한 시기였던 18세기 에 빛나는 이정표 같은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6.
        2015.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6-17세기 초반은 南冥 曺植(1501-1572)이 학파를 형성하고 그의 제자 및 재전제자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시기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해 남명학파가 심각한 타격을 입고 학문적ㆍ정치적 활동에서 전면에 나서기 어 려웠던 점을 생각할 때, 이 시기는 남명학파의 전성기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16-17세기 초반에 창작된 남명학파 학자들의 箴 작 품을 대상으로 그 속에 담긴 수양론을 파악해보고자 시도했다. 箴의 효용성에 주목해 작품의 주제와 내용을 분석하여 수양의 실천 양상 을 분류한 결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첫째는 수양론의 핵심 사상을 제기하여 그것에 따른 실천 의지를 촉구한 작품군이다. 이것은 보다 근원적ㆍ본질적 측면에서 자신이나 타인을 규계하는 것이므로, 치료 방법중에서 原因治療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는 특정한 병폐나 구체적인 실천 덕목을 적시하여 그것에 따른 수양 방법을 모색한 것으로, 어떤 증상에 대해 직접적인 처방을 하는 對症治療의 명목으로 구분할 수 있다. 셋째는 어 느 시기나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되어 새롭게 전환하려는 시도를 할 때 지어진 작품으로, 이것은 주위 환경이나 생활 습관을 개선하여 병을 호전시키는 改善治療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3가지 유형 가운데 편수가 가장 많은 것은 對症治療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총 10편이 여기에 속한다. 原因治療는 5편이 있으며, 改善治療는 4편이다. 곽재우의 「調息箴」은 호흡법에 관한 내용으로 다른 箴 작품의 일반적인 성 향과 구별되어 기타로 분류했다. 16-17세기 초반 남명학파 학자들이 창작한 箴 작품은총 20편인데, 비슷 한 시기에 지리산권의 서부인 호남지역에서는 箴 작품의 수량이 6편 정도에 불과하며, 그 내용도 2편이 임금을 위해 지은 官箴이고 나머지 4편은 경전 을 해석하거나 전대의 작품에 차운한 것이다. 이처럼 호남지역의 箴 창작 양 상과 대비해 보자면, 남명학파 학자들의 箴 작품은 수양의 내용 및 방법을 서술한 것이 매우 구체적이며 실질적이다. 따라서 16-17세기 초반 남명학 파의 箴 작품은 수양 방법을 제시하고 실천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나타난다 고 그 특징을 요약할 수 있다.
        7.
        2013.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경남 하동 지역 유학자의 세기별 분포는 15세기 1명, 16세기 2명, 17세기 7명, 18세기 2명, 19세기 16명, 20세기 초 1명이다. 가장 비율이 높은 시기가 19세기이며, 그 다음이 17세기이다. 경남 지역은 南冥 曺植의 학문을 계승한 南冥學派가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남명학파의 성쇠에 따라 하동 지역의 유학자도 비례하여 산출되고 있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구역별 분포는 총 29명의 유학자 가운데 옥종면이 21명으로 가장 많으며, 그 다음으로 북천면이 6명, 금남면과 양보면이 각각 1명이다. 이 가운데 옥종면 안계리 출신의 유학자가 11명으로, 옥종면 유학자의 절반이 넘는 비율을 차지하며, 전체 하동군 유학자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이러한 통계를 근거해 볼 때, 하동 유학의 중심지는 옥종면이며, 그 중에서도 안계리가 핵심 지역이라고 규명해 볼 수 있다.학맥 형성 양상을 살펴본다면, 남명학파 11명, 寒洲系列 4명, 蘆沙系列 5명, 星湖系列 3명, 尤庵系列 1명, 華西系列 1명, 기타 6명이 된다. 그러므로 하동 지역의 학파별 분포는 남명학파 및 南人 계열이 대다수 를 차지하며, 그 다음으로 노사계열의 문인이 많은 비중을 가진다. 하동 지역의 남명학 전승과 관련해서는 안계마을 출신의 晉陽河氏 학자들이 家學을 통해 계승한 사실을 거론할 수 있다. 그리고 河達弘, 鄭瑀贇, 趙性家, 崔琡民, 姜柄周, 鄭敦均 등의 학자들이 서로 다른 학맥과 당파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명을 존숭하고 본받아 실천하려 한 점을 지적할 수 있다.
        8.
        2013.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호남지역 유학자들의 초기 箴 작품은 蘇沿(1390-1441)이 창작한 것으로부터 李恒(1499-1576)이 지은 것에 이르기까지 총 6편이 지어졌다. 그 가운데 2편이 中宗에게 올려진 官箴이다. 그리고 경전 구절을 해석한 것이 3편, 전대의 작품에 차운하여 계승한 것이 1편으로, 의리의 발현을 수사 기법으로 삼은 작품이 상당한 비율을 차지한다. 중기는 箴을 지은 유학자가 4명밖에 되지 않아 초기에 비해 인원수가 더욱 줄었지만, 작품의 수량은 7편으로 1편이 더 많이 늘어났다. 하지만 安邦俊(1573-1654)으로부터 黃胤錫(1729-1791)에 이르기까지 150년이 넘는 시기 동안 4명의 유학자가 7편의 작품을 지었다는 것은 초기와 마찬가지로 매우 영성한 상황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中庸』 제1장의 ‘莫見乎隱’을 해석한 황위의 「莫見乎隱箴」을 제외하고는 모두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할 수양의 덕목을 해설한 내용들이다. 다만 경계하는 대상이 자신에게 한정되느냐 아니면 자식이나 주변의 타인에게 확장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개인적인 용도인 私箴의 범위를 벗어나는 작품은 없다. 후기는 초기 및 중기에 비해 거의 5~6배가 넘을 정도로 많은 분량의 箴 작품이 창작되었다. 그리고 경계의 내용과 방법이 이전과 달리 다양하게 확산되는 경향을 보인다. 奇正鎭(1798-1880)으로부터 柳永善(1893-1961)에 이르기까지 100년 동안 14명의 유학자에 의해 37편의 箴이 지어졌다. 이 시기는 이전보다 양적으로도 월등하게 많을 뿐만 아니라, 수사 기법도 다양한 양상으로 서술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타인을 경계한 작품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구한말의 절박한 시대적·역사적 상황 때문에 箴을 통해 同道의 사람들에게 권면하고자 하는 의식이 반영된 현상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자신 및 학파가 주창하는 성리설을 箴의 문체로 드러내어 밝히고자 한 것도 이전 시기에는 없는 하나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9.
        2010.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神明舍圖」와 「神明舍銘」은 南冥 曺植의 학문적 특징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南冥學의 핵심 사상이 담겨 있는 圖說이다. 그런데 后山 許愈가 「神明 舍圖銘或問」을 지어 이것에 관한 해석 작업을 시도하기 이전까지 300년 동안 은 어느 누구도 그 내용과 의미를 밝히려고 하지 않았다. 后山은 「神明舍圖銘或問」을 지어 南冥의 「神明舍圖銘」을 상세히 해석하고 그 것이 가지는 유학사적 의미를 밝히고자 하였다. 그는 「神明舍圖銘」에 南冥의 心學이 오롯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南冥의 「神明舍圖銘」에 대한 주해 작업을 경상우도 학자들의 공적 안건으로 발의함으로써, 南冥의 학문과 수양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南冥學의 요체를 분명하게 파악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므로 「神明舍圖銘或問」은 后山의 개인적 저술이라는 의미를 넘어, 당시 慶 尙右道의 학자들이 학문적인 측면에서 본격적으로 남명학을 조명하는 촉발점 이 되었으며, 그 작업에 그들의 학문적 역량을 집결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 였다.
        10.
        201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老柏軒 鄭載圭(1843-1911)는 1885년 后山 許愈와 함께 南冥의 講學處인 雷 龍亭을 중건하여 南冥의 유적이 복원되고 南冥學이 천양되도록 노력하였다. 1887년에는 8월 18일부터 28일까지 10박 11일의 기간 동안 智異山을 등람하 면서 남명에 대한 추념과 경모를 가졌으며, 자신의 학문과 삶이 새롭게 진작되 는 계기로 삼았다. 그리고 1889년 后山 許愈가 남명학의 핵심을 분명하게 드러 내기 위해 「神明舍圖銘或問」을 지은 것에 동감하고, 그것에 대한 자신의 견해 를 자세히 개진하였다. 노백헌이 이러한 일련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이유를 두 가지 정도로 정 리해 볼 수 있다. 하나는 同鄕의 先賢을 後學으로서 마땅히 선양해야 한다는 책 임감이다. 다른 하나는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당시의 위기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절실히 필요한 것으로 인식하였고, 유학사적 道統論 속에서 그 의미를 확 신하였기 때문이다. 전자는 노백헌 자신이 생장하고 활동한 三嘉縣이라는 지역 과 그것에 연유한 지역적 정서에 바탕한 것으로, 개인적·지역적 책임감이다. 후 자는 유학사의 맥락 속에서 남명의 위상을 파악하여 남명의 선양이 가지는 의 미를 확신한 것으로, 시대적 상황의 인식과 유학사적 도통의 계승 의지이다. 19세기 강우 지역 학자들은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중심축으로 삼아 분열된 각 학파들을 통합하고자 하였으며, 유학의 근본 정신을 회복하고 실천 의지를 고양하여 국내외적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전망을 바라보려 노력하였다. 노백 헌의 남명학 계승은 이처럼 19세기라는 시대적 상황과 강우 지역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이해한 가운데 그 의미를 가늠해 볼 수 있다.
        11.
        200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南冥 曺植(1501-1572)의 「神明舍圖銘」은 한 인물이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수양하여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이겨내는 과정을 다룬 것 으로, 그의 엄격한 수양론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본고에서는 남명의 「신명 사도명」을 계승한 남명학파 학자들의 문학 작품 5편을 통시적으로 살펴봄으로 써, 지리산권 가운데 하나인 진주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남명학파의 마음 공 부를 이해하는 일단의 실마리로 삼았다. 대상으로는 삼은 작품은 龜巖 李楨의 「神明舍賦」, 東岡 金宇顒의 「天君傳」, 寒沙 姜大遂의 「神明舍記」, 台溪 河溍의 「神明舍記」, 俛宇 郭鍾錫의 「神明舍賦」 등이다. 이 5편의 문학 작품이 가지는 재해석의 면모와 시대적 의미를 고찰해 볼 때, 크게 두 가지 정도로 그 결론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남명의 「신명도사명」을 각기 계승하되 그것이 함유하고 있는 의미와 중 요성을 저마다의 입지와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5편의 작품 들은 자신의 관점과 시대적 필요에 의거해 「신명사도명」의 핵심을 파악하는 해 석의 각도가 차이를 빚게 되었다. 따라서 부각시키려 한 중심 내용이 달라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둘째, 남명학파의 계보상에서 저자들을 구분해 볼 때, 그들의 작품이 가지는 의의를 남명학파의 시대적 상황과 연관시켜 가늠해 보게 된다. 구암과 동강의 작품은 ‘남명학의 계승과 전파’라는 측면에서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한사와 태계의 작품은 인조 반정 직후 남명학파의 명맥이 끊어질 위기에 봉착하여 ‘학 맥의 수호’라는 관점에서 해석해 볼 수 있다. 면우의 작품은 외세의 침략과 국 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시기에 유학적 마음 수양의 指南으로서 ‘남명의 심학을 천양’한 것이라고 규정해 볼 수 있다.
        12.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조선중기의 유학자 퇴계 이황과 청량산의 관계를 검토한 것이다. 산과 인간의 관련성을 사상적 측면에서 고찰하려는 목표 하에, 한국 유학을 대표할 수 있는 퇴계와 그가 평생토록 그리워하고 동경한 청량산에 주목하여 탐색하였 다. 본론에서 논의한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養氣는 ‘養生的 養氣’, ‘道德的 養氣’, ‘審美的 養氣’ 등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儒家가 산수자연에 대해 가지는 입장은 道德的 養氣와 밀접한 관 계가 있다. 유가의 도덕적 양기론은 자연의 질서를 통찰함으로써 자신의 내면 에 존재하는 도덕성을 자각하며, 이 자각적 깨달음을 지속적으로 올바르게 유 지하여 내면의 기운을 자연과 같이 생명력이 넘치면서도 질서로운 상태로 만들 어 가는 것이다. 공자의 ‘樂山樂水’와 맹자의 ‘浩然之氣’에 보이는 이와 같은 도 덕적 양기론의 면모는 송대 성리학자들에 의해 더욱 심화되고 체계화되는 단계 로 나아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楊恒叔의 󰡔무이지󰡕는 퇴계를 비롯한 조선 중기의 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 쳤는데, 현재 중국에서는 일실되었으며, 寒岡 鄭逑가 이를 대본으로 삼아 개편 한 󰡔무이지󰡕(1~2권, 1책)가 우리나라에 남아 전한다. 󰡔무이지󰡕는 우리나라 山 志의 전범이 되었으며, 특히 󰡔淸凉志󰡕는 이 책을 전범으로 삼아 저술되었다. 󰡔청량지󰡕는 무이산이 주자로 인해 주자학파의 학자들에 의해 聖山으로 존숭 되는 것처럼, 퇴계학파의 학자들이 청량산을 退溪와 관련된 聖山으로 확립하여 聖域化하려고 노력한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자연과 인간이 어울려 그 자연환 경에 조응하는 새로운 인문경관을 창조하게 되는데, 󰡔청량지󰡕는 청량산과 퇴계 학파가 빚어낸 인문경관을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는 저술이다. 퇴계의 시문에 형상화된 청량산의 이미지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정신적 고향으로서 늘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산이다. 둘째, 세상의 번잡함과 구별된 곳으로서 심신을 맑게 정화해 주는 산이다. 셋째, 조용히 학문 에 힘을 쏟을 수 있는 강학처로서 성현을 배우려는 마음을 분발시켜 주는 산이 다. 그리고 이와 같은 청량산의 이미지는 퇴계가 표현한 단어 또는 내용적 의미 로써 요약하여 吾家山・仙山・聖山이라는 말로 구분지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