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진주 승산마을에 세거하였던 능성구씨 문중에 관한 것이 다. 경화사족이었던 능성구씨 가문의 具槃은 18세기 처가인 김해허씨 의 세거지인 진주 승산리에서 지내게 되었다. 구반의 후손들은 승산마 을에 세거하면서 한국 굴지의 재벌가로 성장하였다. 본고에서는 승산 마을에 입향한 능성구씨의 先系와 구반의 직계 선조, 그리고 구반이 입향한 이후 후손들의 삶을 추적하였다. 승산리에 세거한 능성구씨 집안은 도원수파에 속한다. 능성구씨는 고려시대부터 이미 관료를 배출하였으며, 조선에 들어와서는 세조대에 구치관과 구치홍 갈래가 현달한 관료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승산마을 에 정착한 구반은 구치홍의 후손이었다. 구치홍의 가계는 왕실과 혼인 이 잦았고, 또한 두 차례의 반정 때에 正功臣에 책봉된 훈척가문이었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원종비 인헌왕후의 형제인 구사맹 집안이 조선 후 기 무반 벌열 가문으로 이름이 났다. 승산리에 세거한 입향한 구반은 구사맹의 동생 具思閔의 직계손이 다. 구사민은 1578년(선조 11) 遺逸로 천거되어 관직에 나갔다. 구사민의 차남 具寭는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갔으나, 그의 아들 具仁至 와 함께 대북세력의 비판으로 광해군 때에 화를 입었다. 구혜와 구인지 는 선조 말년에 재상이었던 유영경을 옹호하고, 정인홍을 비판하여 대 북세력에게 유영경의 당으로 낙인이 찍혀서 화를 입었다. 구인지는 정쟁으로 금고를 당했다가 사망함으로 가세가 급격히 기울 었다. 그렇기에 구인지의 차남 具崟은 10대 후반에야 외숙인 택당 이식 의 문하에서 학업을 시작하였다. 영릉 참봉이라는 음직을 받고 1652년 (효종 3) 문과에 합격하여 참상직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조부와 부친의 정치적 공백이 길었고, 조부가 유영경의 당이라는 지목을 받았으며, 문관 관료 가문으로서의 기반이 아주 탄탄한 것은 아니어서 당상관으 로 오르기에는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구음의 아들 具文游는 46세가 되어서야 음직으로 관직에 나갔기 때 문에 승진에 한계가 있었다. 그는 양천허씨 부인에게서 세 아들을 두었 는데, 그중 차남인 구반이 승산리 김해허씨 가문인 허륜의 사위가 되었 다. 구반은 승산리에서 연이어 세 아들을 낳고 불행하게도 30세에 사망 하였다. 구반이 일찍 사망하므로 허씨부인은 어린 아들들을 거느리고 승산리에서 살게 되었다. 구반의 후손은 외가인 김해허씨 가문의 사회적 경제적으로 지위에 힘입어 진주 주요 사족들과 혼인을 맺으면서 진주 사족으로서의 면모 를 갖추게 되었다. 구반의 자손들은 입신하기 위해서 儒業에서 武業으 로 전환하기도 하고, 계속 학문에 힘써서 생원진사시나 문과에 합격하 기도 하였다. 구반의 후손들은 직계 선대에는 무반 관료가 없으나 외가가 무반 가문이었고 방계친족이 세력 있는 무반 가문이었기에 무과에 합격하여 서는 무반 청요직인 무겸선전관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또한 구진검 같은 이는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어 지역 사족의 여론을 형성하고 주도하기도 하였다. 구연호는 일찍부터 경학 공부에 치중하 여 식년문과에 합격하였다. 문과 합격 후 참하관 시절을 온전히 승정원 에서 보냈고, 6품으로 승진해서는 대간에 재임하다가 낙향하였다. 구 반 이후 5대가 지나서 문과에 합격하였으나, 청요직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능력과 집안의 문지를 인정받은 결과였다. 승산리의 능성구씨는 세력 있는 무반 벌열 가문의 갈래는 아니었으 며, 정쟁의 화를 당하기도 하여 가세가 위축되었다. 그런 중에 구반이 승산리의 김해허씨 집안과 혼인하고 일찍 사망함으로써 그의 자손들이 승산리에 세거하게 된 것이다. 외가의 도움을 받으면서 3세대가 지나도 록 기반을 닦아 집안을 다시 일으켰다. 그러한 노력이 지금의 승산리 능성구씨 가문을 있게 하였다.
경남 산청군 신등면 법물은 상산 김씨 가문의 세거지이다. 상산 김씨 가문은 이곳에 세거하면서 향촌 사족으로 성장하였으며, 관료들과 학자들을 다수 배출 하였다. 19세기 박치복, 허전, 이진상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섭렵한 학자 인 김진호도 그 중 한사람이다. 그는 법물의 이택당을 중심으로 강우지역 학자 들과 폭넓은 교유관계를 맺었으며, 물천서당 등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후학 양 성에도 힘썼다. 19세기 김진호가 학문 활동을 하던 시기의 고문서 1,709건이 김진호의 후손 댁에 소장되어 있다. 1,709건의 고문서는 간찰․만사․시문․제문․혼서․잡저․기문․서 문․발문․단자․상량문․행적기․고유문 등이다. 이들 1,709건의 고문서 가운데 약 64.2%에 달하는 1,097건이 간찰이다. 1,097건 간찰은 상당 부분 김진호에게 발신된 것이며, 또 성재집의 간행처로 사용되던 은낙재나 강학의 장소인 이 택당에 기거하던 학자들에게 발신된 간찰들도 있다. 그러므로 서로의 안부나 개인적인 용무를 위한 간찰도 있으나, 강우지역 학자들의 학문 활동과 관련된 간찰이 많다. 간찰은 문집에 실리기는 하지만 문집 편집자의 편찬 방향에 따라서 선별되고, 선별된 친필 간찰의 전문을 싣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강우 지역 학자들의 학문 활동을 볼 수 있는 친필 간찰은 사료적 가치가 크다. 그러 므로 간찰을 바탕으로 김진호를 중심한 강우 학자들의 교유관계, 학문 활동의 양상, 사회 현실의 인식과 대처에 대하여 정리하였다. 김진호는 혼맥에 의한 교유와 학문 활동에 의한 교유 관계를 유지하였다. 특 히 박치복, 허전, 이진상의 문인이었던 그는 강우 지역 학자들과 폭 넓은 교제 를 가졌는데, 허유․곽종석 등과 친분이 두터웠다. 상산 김씨 가문은 남인적 성향 을 가졌으나, 혼맥이나 학문 교유 관계에서는 노론과의 교유도 보인다. 학문 활 동은 각종 문집 간행과 강회를 통한 토론 등으로 대별된다. 김진호는 특히 허전 의 저서를 간행․중간하는데 관심을 많이 기울였는데, 그것은 특히 예론에 관심 을 갖고 실천하고자 한 김진호의 성향을 드러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강우 지역 학자들은 19세기 조선의 현실을 직시하였으나, 강우지역의 공론이 형성되지 않 아 현실 참여에는 적극적이지 못한 측면이 있다. 서구 사상에 대해서는 성리학 을 통해서 전통을 고수하고자 하는 경향과 적극적으로 서학을 탐구하고자 하는 경향 등 학자들의 다양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