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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산마을 綾城具氏 문중의 인물과 전개 KCI 등재

History of Family Rheung-sung Gu’s Prosperity Resided in Jinju Seungsan Village

  • 언어KOR
  • URLhttps://db.koreascholar.com/Article/Detail/338683
  • DOIhttps://doi.org/10.14381/NMH.2017.56.12.3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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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연구 (The Nammyonghak Study)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The Nammyong Studies Institute)
초록

본 연구는 진주 승산마을에 세거하였던 능성구씨 문중에 관한 것이 다. 경화사족이었던 능성구씨 가문의 具槃은 18세기 처가인 김해허씨 의 세거지인 진주 승산리에서 지내게 되었다. 구반의 후손들은 승산마 을에 세거하면서 한국 굴지의 재벌가로 성장하였다. 본고에서는 승산 마을에 입향한 능성구씨의 先系와 구반의 직계 선조, 그리고 구반이 입향한 이후 후손들의 삶을 추적하였다. 승산리에 세거한 능성구씨 집안은 도원수파에 속한다. 능성구씨는 고려시대부터 이미 관료를 배출하였으며, 조선에 들어와서는 세조대에 구치관과 구치홍 갈래가 현달한 관료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승산마을 에 정착한 구반은 구치홍의 후손이었다. 구치홍의 가계는 왕실과 혼인 이 잦았고, 또한 두 차례의 반정 때에 正功臣에 책봉된 훈척가문이었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원종비 인헌왕후의 형제인 구사맹 집안이 조선 후 기 무반 벌열 가문으로 이름이 났다. 승산리에 세거한 입향한 구반은 구사맹의 동생 具思閔의 직계손이 다. 구사민은 1578년(선조 11) 遺逸로 천거되어 관직에 나갔다. 구사민의 차남 具寭는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갔으나, 그의 아들 具仁至 와 함께 대북세력의 비판으로 광해군 때에 화를 입었다. 구혜와 구인지 는 선조 말년에 재상이었던 유영경을 옹호하고, 정인홍을 비판하여 대 북세력에게 유영경의 당으로 낙인이 찍혀서 화를 입었다. 구인지는 정쟁으로 금고를 당했다가 사망함으로 가세가 급격히 기울 었다. 그렇기에 구인지의 차남 具崟은 10대 후반에야 외숙인 택당 이식 의 문하에서 학업을 시작하였다. 영릉 참봉이라는 음직을 받고 1652년 (효종 3) 문과에 합격하여 참상직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조부와 부친의 정치적 공백이 길었고, 조부가 유영경의 당이라는 지목을 받았으며, 문관 관료 가문으로서의 기반이 아주 탄탄한 것은 아니어서 당상관으 로 오르기에는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구음의 아들 具文游는 46세가 되어서야 음직으로 관직에 나갔기 때 문에 승진에 한계가 있었다. 그는 양천허씨 부인에게서 세 아들을 두었 는데, 그중 차남인 구반이 승산리 김해허씨 가문인 허륜의 사위가 되었 다. 구반은 승산리에서 연이어 세 아들을 낳고 불행하게도 30세에 사망 하였다. 구반이 일찍 사망하므로 허씨부인은 어린 아들들을 거느리고 승산리에서 살게 되었다. 구반의 후손은 외가인 김해허씨 가문의 사회적 경제적으로 지위에 힘입어 진주 주요 사족들과 혼인을 맺으면서 진주 사족으로서의 면모 를 갖추게 되었다. 구반의 자손들은 입신하기 위해서 儒業에서 武業으 로 전환하기도 하고, 계속 학문에 힘써서 생원진사시나 문과에 합격하 기도 하였다. 구반의 후손들은 직계 선대에는 무반 관료가 없으나 외가가 무반 가문이었고 방계친족이 세력 있는 무반 가문이었기에 무과에 합격하여 서는 무반 청요직인 무겸선전관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또한 구진검 같은 이는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어 지역 사족의 여론을 형성하고 주도하기도 하였다. 구연호는 일찍부터 경학 공부에 치중하 여 식년문과에 합격하였다. 문과 합격 후 참하관 시절을 온전히 승정원 에서 보냈고, 6품으로 승진해서는 대간에 재임하다가 낙향하였다. 구 반 이후 5대가 지나서 문과에 합격하였으나, 청요직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능력과 집안의 문지를 인정받은 결과였다. 승산리의 능성구씨는 세력 있는 무반 벌열 가문의 갈래는 아니었으 며, 정쟁의 화를 당하기도 하여 가세가 위축되었다. 그런 중에 구반이 승산리의 김해허씨 집안과 혼인하고 일찍 사망함으로써 그의 자손들이 승산리에 세거하게 된 것이다. 외가의 도움을 받으면서 3세대가 지나도 록 기반을 닦아 집안을 다시 일으켰다. 그러한 노력이 지금의 승산리 능성구씨 가문을 있게 하였다.

Mr. Gu Bahn(具槃) moved from Seoul to Seungsan Village, Jinju, around 18th century, at which his wife’s family Gimhae Heo had lived on,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His offsprings are still living there and some of them are conglomerate business leaders these days, in Korea. This paper traces back his family lineages up to his ancestors and down to his offsprings in modern times. His family originally belonged to the ‘General’ tree. The mid-ancestor of a new branch, Mr. Gu Sah-min, was the 5th son of Gu Soo-yong. Family Rheung-sung Gu was already outstanding to achieve high official positions in the period of Koryo (from 10th to 14th centuries). It was among others the two boughs of the family tree, Mr. Gu Chi-Kwan and Mr. Gu Chi-Hong, who had continuously succeeded in solidating their positions in the reign of King Se-jo (A.D. 1455~1468). When princess were to marry, it was often selected from Gu Chi-Hong family and they also were conferred entitled peerages in the two times of Restorations. The mid-ancestor’s elder brother, Mr. Gu Sah-mayng, was renowned as Higher Soldiers’ Family, in later days of Choseon dynasty. Mr. Gu Sah-min (具思閔) was appointed an official according to recommendation system for past-minister offsprings. His second son, Mr. Gu Hye (具寭), had an official position after passing a civil service examination. His grandson, Mr. Gu In-ji (具仁至), however, met a disaster with his father by factional stripes, because they fully supported Prime Minister You young-kyong who lost everything right after the death of King Soen-jo in A.D. 1608. After the death of Gu In-ji, the family became quickly dimmed. Although his second son, Mr. Gu Ehm (具崟), began to study under supervision of his uncle, Mr. Yi Shik who was an outstanding scholar at that time and passed a civil service examination in A.D. 1652, it took quite a long time for him to be appointed in a palace-ascendable official position. His grand son, Mr. Gu Moon-yu (具文游), was barely appointed an official position only at the age of 46 who married to Yang-cheon Heo family and had three sons. It was the 2nd son, Mr. Gu Bahn, among them who moved to his wife’s village, Seungsan-li, as a son-in-law of Mr. Heo Ryun. He died at the age of 30 and his sons seemed to decide to live there with their mother since then. In order to recover honour and wealthy, the offsprings of Mr. Gu Bahn intentionally tried to change their status from civil official branch into military one, whose maternal line had impact with sure on them, since it was relatively loose to pass Military examinations than Licentiate ones. In the meantime, such descendants as Mr. Gu Jin-keom and Mr. Gu Yon-ho succeeded each in passing a Licentiate Examination and a Highest Civil Service Examination as mere exceptions of their status changed. They were successfully again to build up solid position with aid from maternal side, only after the three generations past and they became local gentry again ever since then.

목차
Ⅰ. 머리말
 II. 승산마을 입향 이전의 능성구씨 世系
 III. 구사민 갈래 具槃의 승산마을 입향
 IV. 승산마을의 具槃 후손
 V. 맺음말
 <참고문헌>
저자
  • 元昌愛(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 Won, Chang-a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