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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溪 姜渾의 생애와 경륜 KCI 등재

The life and statesmanship of Mok-gye, Kang Hon

목계 강혼의 생애와 경륜

  • 언어KOR
  • URLhttps://db.koreascholar.com/Article/Detail/31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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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연구 (The Nammyonghak Study)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The Nammyong Studies Institute)
초록

木溪 姜渾(1464-1519)은 중종반정에 참여한 靖國功臣으로, 홍문관 대제학 과 이조ㆍ공조ㆍ형조 판사를 두루 거쳐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특히 그의 시 는 晩唐의 체를 얻어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일컬어졌으며, 그는 뛰어난 문장과 인품으로 뭇 선비들은 물론 성종에게도 촉망받던 인재였다. 그러나 연산조 말 승지로 있으면서 응제시로 아부하여 부귀를 탐한 간사한 인물이라는 오명을 얻 었고, 이로 인해 사림에게 배척 받은 것은 물론 그의 문집도 제대로 간행되지 못하였으니, 그의 저술은 백에 하나도 남아 있지 못한 실정이다. 그러나 여러 증언과 정황을 고려해 볼 때, 강혼이 연산군 밑에서 벼슬하고 글 을 지은 것은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으며, 그에 대한 비난도 매우 편향적이고 부당한 면이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강혼의 생애와 사상 및 그의 문학은 재평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강혼은 훈구에 속하는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김종직을 스승으로 섬기고 그 제자들과 두루 사귀었다. 이러한 점을 반영하듯 그 당시 훈구와 사림이 첨예하 게 대립한 昭陵復位論과 薦擧別試制(賢良科)를 통해 볼 때, 강혼의 정치적 입지 木溪 姜渾(1464-1519)은 중종반정에 참여한 靖國功臣으로, 홍문관 대제학 과 이조ㆍ공조ㆍ형조 판사를 두루 거쳐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특히 그의 시 는 晩唐의 체를 얻어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일컬어졌으며, 그는 뛰어난 문장과 인품으로 뭇 선비들은 물론 성종에게도 촉망받던 인재였다. 그러나 연산조 말 승지로 있으면서 응제시로 아부하여 부귀를 탐한 간사한 인물이라는 오명을 얻 었고, 이로 인해 사림에게 배척 받은 것은 물론 그의 문집도 제대로 간행되지 못하였으니, 그의 저술은 백에 하나도 남아 있지 못한 실정이다. 그러나 여러 증언과 정황을 고려해 볼 때, 강혼이 연산군 밑에서 벼슬하고 글 을 지은 것은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으며, 그에 대한 비난도 매우 편향적이고 부당한 면이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강혼의 생애와 사상 및 그의 문학은 재평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강혼은 훈구에 속하는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김종직을 스승으로 섬기고 그 제자들과 두루 사귀었다. 이러한 점을 반영하듯 그 당시 훈구와 사림이 첨예하 게 대립한 昭陵復位論과 薦擧別試制(賢良科)를 통해 볼 때, 강혼의 정치적 입지

Mok-gye(木溪), Kang Hon(姜渾:1464-1519) took part in Jungjongbanjeong( 中宗反正) and became Jeongkuk-gongshin(靖國功臣). He went through Daejehak of Hongmunkwan and the chief of some of Six Boards of the Government all around, and arrived at the head of Jungchubu. Especially he wrote poems well in imitation of Chinese poems(the style of the late Tang), so he was called one of the most excellent poets. As a good writer and a good-natured person, he won the respect of all learned men. The king Seongjong also expected much of him. By the way, he wrote a poem by the king's order when he was a secretary of the king Yeon-san, a tyrant. So people thought that he curried favor with a tyrant by writing poems and he was branded as a foxy fellow by the class of Confucian scholars. He was scorned by Confucian scholars, so his collection of works couldn't be published well. Considering many evidences and situations, however, we can know that he was obliged to obtain a post in the government and write poems under the rule of the king Yeon-san. I think the blame on him prejudiced and unfair, so his life, thought and literature must be revalued. Kang Hon was born into a noble family belonging to the group of Hungu, but looked up to Kim Jong-jik(金宗直) as his mentor and made friends with followers of Kim Jong-jik. For that reason his political position and thought cannot be belonged to some one group, Hungu or Sarim. At that time Hungu and Sarim had a sharp conflict in restoration of Soreung(昭陵復位) and Hyeolyang-gwa(賢良科). Kang Hon, being placed in Sarim, advocated restoration of Soreung, but being placed in Hungu, he objected to Hyeolyang-gwa. Though he was born into a family of Hungu, he came to have a political inclination of Sarim because of scholarly relationships. I think his life is an example showing the process that a member of Hungu changed to a member of Sarim. I can't make an immediate judgment for lack of data, but he seems to have succeeded to scholarly attainments of Kim Jong-jik faithfully. I think his learning and thought had considerable influence on the formation of Kangwu-hakpa as well as Sarim's scholarship in Jinju, his hometown.

목차
Ⅰ. 문제의 제기
Ⅱ. 사림파의 진출과 강혼의 생애
1. 수학기와 성종조의 사가독서
2. 무오사화와 연산군의 총애
3. 중종반정과 사림파의 배척
Ⅲ. 전환기 시사에 대한 경륜의지
1. 昭陵復位 주장
2. 薦擧別試制 반대
3. 度牒制 폐지와 女樂의 혁파
Ⅳ. 결론
저자
  • 申太永(청주대 연구교수) | 신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