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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강혼(姜渾)은 조선 연산군 때 문한을 담당하고 중종반정 때 정국공 신(靖國功臣)으로 녹훈되었으며, 묘도문자와 제영을 많이 남겼으나, 사림의 공론에 저촉되어 그 역사 활동의 실상과 그 문학 성과가 전면적 으로 검토된 일이 없다. 본고는 연산군과 중종 시기의 문학사를 종합적 으로 이해하는 단초를 마련하고 조선전기 진주 지역의 문화적 기반의 성립을 이해하기 위해 강혼의 문자활동에 대해 개괄했다. 강혼이 연산 군조에 관각문인으로서 아유구용의 시문을 작성한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문학세계는 권력에의 유착으로만 규정지을 수 있는, 관각문인으로서의 독특한 국면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강혼은 「정 미수신도비」에서, 신명을 보존키도 어려운 처지에 처한 정미수가 남의 죄를 덜어주고 가혹한 형벌을 받지 않도록 애쓴 모습을 그려 보였다. 묘주(망자)가 생전에 법률을 근거로 타인을 변론했던 내용을 그대로 담아 신도비의 문체로서도 매우 독특한 양상을 띠고 있다. 본고는 몇몇 기문과 구묘문의 일문(佚文)을 찾아내기는 했으나, 강혼의 ‘부학적문 (富學績文) 발언성장(發言成章)’을 이해하기 위해 일시문(佚詩文)을 더욱 수습, 정리할 필요가 있다. 또한 강혼의 매부는 우리 문학사에서 많은 일화를 남긴 어득강(魚得江, 1470~1550)이다. 연산군과 중종 연간의 문학 집단이 지녔던 지향과 성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강혼과 어득강의 관계에 대한 본격적 연구가 필요하다.
        2.
        200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木溪 姜渾(1464-1519)은 중종반정에 참여한 靖國功臣으로, 홍문관 대제학 과 이조ㆍ공조ㆍ형조 판사를 두루 거쳐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특히 그의 시 는 晩唐의 체를 얻어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일컬어졌으며, 그는 뛰어난 문장과 인품으로 뭇 선비들은 물론 성종에게도 촉망받던 인재였다. 그러나 연산조 말 승지로 있으면서 응제시로 아부하여 부귀를 탐한 간사한 인물이라는 오명을 얻 었고, 이로 인해 사림에게 배척 받은 것은 물론 그의 문집도 제대로 간행되지 못하였으니, 그의 저술은 백에 하나도 남아 있지 못한 실정이다. 그러나 여러 증언과 정황을 고려해 볼 때, 강혼이 연산군 밑에서 벼슬하고 글 을 지은 것은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으며, 그에 대한 비난도 매우 편향적이고 부당한 면이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강혼의 생애와 사상 및 그의 문학은 재평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강혼은 훈구에 속하는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김종직을 스승으로 섬기고 그 제자들과 두루 사귀었다. 이러한 점을 반영하듯 그 당시 훈구와 사림이 첨예하 게 대립한 昭陵復位論과 薦擧別試制(賢良科)를 통해 볼 때, 강혼의 정치적 입지 木溪 姜渾(1464-1519)은 중종반정에 참여한 靖國功臣으로, 홍문관 대제학 과 이조ㆍ공조ㆍ형조 판사를 두루 거쳐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특히 그의 시 는 晩唐의 체를 얻어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일컬어졌으며, 그는 뛰어난 문장과 인품으로 뭇 선비들은 물론 성종에게도 촉망받던 인재였다. 그러나 연산조 말 승지로 있으면서 응제시로 아부하여 부귀를 탐한 간사한 인물이라는 오명을 얻 었고, 이로 인해 사림에게 배척 받은 것은 물론 그의 문집도 제대로 간행되지 못하였으니, 그의 저술은 백에 하나도 남아 있지 못한 실정이다. 그러나 여러 증언과 정황을 고려해 볼 때, 강혼이 연산군 밑에서 벼슬하고 글 을 지은 것은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으며, 그에 대한 비난도 매우 편향적이고 부당한 면이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강혼의 생애와 사상 및 그의 문학은 재평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강혼은 훈구에 속하는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김종직을 스승으로 섬기고 그 제자들과 두루 사귀었다. 이러한 점을 반영하듯 그 당시 훈구와 사림이 첨예하 게 대립한 昭陵復位論과 薦擧別試制(賢良科)를 통해 볼 때, 강혼의 정치적 입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