江右地域은 아득한 三韓시대부터 전국의 학문적 문화적 중심지가 되어 본 적 은 없었다. 高麗中期 이후 晋州를 본관으로 한 姜氏 河氏 鄭氏의 문중에서 걸출 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나, 이들은 현달한 이후로 주로 중앙으로 이주하 였기 때문에 후대의 영향이 크게 없었다. 江右地域의 학문이 본격적으로 흥기한 것은, 佔畢齋가 咸陽郡守로 부임하여 비교적 장기적으로 재직하면서 적극적으로 인재를 양성함으로 인해서이다. 점 필재는 經學과 文章을 융합하는 학문으로 교육하여 그의 제자들은 문학과 경학 에 모두 우수하여 내용 있는 시문을 창작하여 당시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또 그들은 과거를 통해서 중앙관계에서도 嶺南士林派를 형성하여, 朝鮮 건국 이후 확고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勳舊派를 견제하는 위치에까지 이르렀다. 왕조교체기에 節義를 지키지 않았고, 경학적 뿌리가 없는 詞章 일변도의 시문 을 짓는 훈구파에 대해서 이들은 우월의식을 갖고서 배타적으로 처신하는 경향 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점은 훈구파에게 빌미를 제공하여 戊午士禍에 일 망타진되는 비극을 당하게 되었다. 점필재에 의해서 형성된 朝鮮 前期의 嶺南士林派가 戊午士禍와 甲子士禍로 인하여 그 學脈이 후세에 직접적으로 계승되지는 못했지만, 그 한 세대 뒤에 南 冥 같은 대학자가 崛起하는 데 토양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리고 전기 嶺南士林 派에 의해서 형성된 선비정신은 남명이나 그 제자들에 의해서 더욱 정제될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