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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1746년(영조 22) 지금의 블라디보스토크에 해당하는 紅旗浦와 紅島 일대를 정탐한 「紅島偵探記」에 대하여 정탐을 하게 된 배경과 정탐 내용을 중심으로 고찰한 것이다. 정탐의 배경으로는 영조 22년에 청나라와의 압록강 국경 지대에서 발생한 莽 牛哨設訊과 退柵에 의한 국경선의 설정 문제, 그리고 당시 북방에 거주하던 磴 磴磯가 침입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보다 많 은 정보를 얻기 위해 영조는 校理 嚴瑀를 北關御使로 파견하고, 嚴瑀는 南濟極 등 27명을 두 차례에 걸쳐 紅旗浦와 紅島 일대로 보내 정탐을 해오게 한다. 그 과정에서 磴磴磯에 대한 여러 정보와 함께 당시 청나라가 진행하고 있던 蔘 偸 採者의 단속에 의한 유민의 발생과 紅旗浦와 紅島 일대로 도망한 漢人 토벌의 규모와 양상을 정탐하는 데 성공한다. 嚴瑀는 정탐의 결과를 영조에게 보고하고, 영조를 비롯한 조정에서는 당시의 이러한 정황과 지리적 정보를 알게 됨으로써 磴磴磯에 대한 논의는 일단락된다. 정탐이 끝난 뒤에 영조는 해당자들에게 포상을 하고, 다음해인 1747년에 청 나라에서는 磴磴磯에 들어가 14년을 살았던 두 조선 여인을 잡아 한양으로 보내오는데, 형조에서 심문한 다음 섬으로 유배를 보낸다. 또한 이 정탐의 결과 얻어진 지리 정보는 『海東地圖』의 「西北彼我兩界全圖」를 제작할 때에 거의 그대 로 수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당시의 정탐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紅島偵探記」는 다음의 몇 가 지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1) 당시 급박하게 진행되었던 莽牛哨設訊과 退柵 문제, 磴磴磯 침입의 위기의 식을 정탐이라는 방법으로 극복하고자 한 노력과 정보 취득 과정을 알 수 있다. 2) 조선시대에 다양하게 전개한 정탐 활동의 진행 과정과 방법, 운용 인원, 정탐 노정, 정탐시에 만났던 사람들, 정탐지의 지리적 정보 등의 제반 사항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규명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한다. 3) 지명은 물론 인문 지리적 정보, 언어와 풍속 등을 제공함으로써 해당 지역 을 연구하는 주요 자료로 활용할 수 있으며, 해당 지역과의 새로운 관계를 설정 하는 데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