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학 연구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하여, 우리는 남명학의 대중성과 실천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본고는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남명의 합천 유적을 주목한 것이다. 합천지역의 주요 남명 유적은 12개소이다. 삼가면 5개소, 합천읍 2개소, 쌍책면 2개소, 가야·용주·대병면 각 1개소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삼가면은 남명의 탄생지이자 남명이 뇌룡정과 계부당을 지어놓고 강학을 하였던 곳이니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 유적에는 복원된 생가처럼 유적으로 남은 곳도 있고, 이영공유애비처럼 비의 형태로 남아 있는 곳도 있으며, 함벽루처럼 문학경관으로 남아 있는 곳도 있다. 남명 유적은 이처럼 매우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남명의 합천 유적에는 남명학의 주요 부면들이 잘 드러나 있다. 탄생지에서는 위대한 학자의 등장에 대한 예감, 뇌룡정과 함벽루에서의 부동과 역동이라는 남명 자아의 역설구도, 부모 묘비에서의 과장되지 않는 효심, 황강정과 사미정에서의 진정성 있는 우정, 이영공유애비에 나타나는 관료와 백성의 이상적 관계, 「을묘사직소」에서의 비판적 현실인식 등이 그것이다. 합천지역 남명 유적에 대한 활용 방안으로는 뇌룡정에서의 神性 찾기 프로그램 개발, 합천의 내외적 연계망을 활용한 남명학 문화탐방 노선 개발, 함벽루를 중심으로 한 회통 문화의 재구성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로써 합천 공간을 중심으로 남명학의 핵심은 더욱 부각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본고는 隱求型 지식인 임여송이 자신의 생활을 어떻게 작품화하였던가 하는 문제를 살피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事上學’이 라는 관점을 설정하였다. 이것은 ‘생활 속에서 진리 찾기’를 의미하는 바, 灑掃應對나 起居動作 등 인간의 일상을 중시한다. 우리는 흔히 문학 사적 측면에서의 문제적 작가나 사상사적 측면에서의 주요 위상을 지닌 인물을 주목한다. 이러한 연구방향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수많은 선비들은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향촌을 중심으로 자신의 생활을 영위하며 진리를 탐구해 왔고, 가족을 중시하며 생활에의 체험을 작품화해 왔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고는 비교적 덜 알려져 있지만 일상과 생활, 평범과 소박을 존중하며 작품 생활을 해 왔던 한 작가에 집중한 것이다. 임여송 문학의 주제는 수양론적 측면, 가족주의적 측면, 그리고 자연 인식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향촌에서 생활하면서 그 자신이 이를 가장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양론적 측면에서는 居敬과 明誠, 그리고 愼獨 등의 개념을 내세우면서 적극 작품화하였고, 가족주의적 측면에서는 위로는 부모, 옆으로는 동생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졌다. 그리고 산수 속에서 仁知나 歲寒之意 등 유가적 이상을 찾고자 하기도 하지만, 그의 자연관에는 무한한 자유와 자족감이 내포되어 있었다. 임여송 문학의 의의는 ‘지금-여기’에 대한 자각을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생활 小事를 재발견하며 소재를 더욱 다양하게 수용하고 있었다. 사상학의 문학적 효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본고는 德山洞府를 문화지리학적 측면에서 접근한 것인 바, 남명이 산천재에 게시했던 「신명사도」와 덕산동부가 일정한 함수관계에 놓인 다는 가설에 기반한 것이다. 구조적 측면에서 입덕문은 口關 역할을 하며, 확 트인 덕산동부는 태일진군이 다스리는 나라일 수 있다. 사상적 측면에서는 堯舜日月의 유가적 이상과 武陵桃源의 도가적 이상이 상호 맞물린다. 덕산 공간 역시 「신명사도」에 근거하여 그 경계지점에 입덕 문이 놓이고, 덕천벼리라는 좁은 공간을 통과하면 안쪽에는 넓은 공간 이 나타난다. 廣-狹-廣의 구조 속에서 독특한 문화가 생성되었던 것 이다. 덕산에는 남명 관련 이야기가 언중에 의해 다양하게 전해지고 있다. 남명이 덕산에서 사치를 즐겼다, 자신을 사모하다가 구렁이가 된 처녀 와 함께 살았다, 幽宅을 친구에게 주었다가 사후에 돌려받았다, 퇴계와 도술 시합을 벌여 이겼다는 등의 이야기가 대체로 그러한 것이다. 이러 한 이야기는 주로 덕산 일대에 민중 사이에서 광범하게 전해지는 것으 로, 「신명사도」와 덕산동부의 상관성과는 또 다른 측면의 구술문화를 형성하였다. 민중들은 남명 이야기를 흥미 본위의 대항 담론으로 이끌 어 간 것이라 하겠다.
본 연구는 鄭逑(寒岡, 1543-1620)가 무흘정사를 건립하게 된 이유와 과정, 무흘정사에서의 저술활동, 무흘정사의 연혁 등을 두루 고찰한 것이다. 무흘정 사에는 정구의 유품뿐만 아니라 그가 수집·편찬한 수 천권의 서적이 보관되어 있었으며, 영남의 선비들은 이곳에서 책을 열람하고 강학활동을 하는 등 일련 의 ‘무흘 아카데미’를 형성하였다. 최근에는 무흘정사의 書目 일부가 고문서의 형태로 발견되기도 했다. 사정의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학계나 지방자치단체에 서는 이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부족한 것이 실정이다. 본고는 여기에 일정한 문 제를 제기하면서 무흘정사를 중심으로 한 무흘의 본격적인 생활문화 연구의 단 초를 마련하기 위하여 기획된 것이다. 무흘동천에 대한 정구의 관심은 이른 시기부터 있어왔는데, 그가 만년에 무흘 행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避地意識에 기반한 독서양성이었다. 평소 친분이 두텁던 벗의 방문까지 정중히 사양하면서 독서를 통한 養性을 실천하고자 하였 던 것이다. 정구는 安東大都護府使 등의 관직을 맡기도 하지만 7-8년동안 이곳 에서 보내면서 다양한 분야의 저술활동을 전개한다. 성리학 분야의 염락갱장 록·수사언인록·곡산동암지, 역사전기 분야의 경현속록·와룡암지·치 란제요·고금인물지·유선속록, 지방지 분야의 복주지 등이 바로 그것이 다. 이 같은 저술활동을 통해 그는 공자의 仁思想에 근간을 둔 주자학의 연원과 그 조선적 계승을 道脈에 입각하여 명확히 하고자 했다. 무흘정사 건립에는 정구가 직접 공사감독을 할 만큼 많은 정성을 기울인다. 그 위치는 무흘구곡 가운데 와룡암과 만월담 사이에 있었으나 만월담에 더욱 밀착되어 있었다. 1604년 건립 당시에는 초가 3간으로 된 서운암을 중심으로 하여 2간의 산천암, 비설교와 자이헌 등 다양한 부속시설들이 있었다. 정구가 세상을 뜬 후 무흘정사는 위치를 달리하여 36간의 무흘정사와 3동의 장서각으 로 규모가 확대되기도 하였고, 여러 곡절을 거치면서 현재 1922년에 세운 4간 의 정사와 庖舍 약간 동이 남아 있다. 특히 1784년(갑진, 정조8)에는 후손이 중 심이 되어 무흘정사를 새로 짓고 무흘구곡 전체에 대한 정비작업을 하였다. 이 를 기념하기 위하여 「무흘구곡도」를 그리고 다양한 시를 짓기도 한다. 무흘정사는 정구가 활동할 당시는 물론이고 이후 많은 선비들이 이곳을 탐방 하면서 무흘 문화를 만들어갔다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정구 당대에는 사승관계 를 형성하는 제자들이 이곳을 주로 찾았고, 정구가 세상을 뜬 후에는 정구를 추 모하는 많은 선비들이 답사객이 되어 심방하였다. 무엇보다도 무흘에는 정구가 수집하고 저술한 이른바 鄭氏藏書가 장서각 서운암에 보관되어 있어 영남 선비 들의 독서와 강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본고는 소눌 노상직의 학문이 영남유학의 전통 속에서 어떠한 측면을 계승하 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노상직은 이황과 조식을 함께 높이면서도, 정구의 실용주의적 노선을 더욱 중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주 자 正脈이 이황에게 이어진다고 하면서, 정구와 허목 등을 통해 허전에게까지 그 맥이 전해진다고 보았다. 이는 근기 남인의 학문을 계승한 것이지만, 그 스 스로가 허전의 제자이기 때문에 자신에게로 학통이 이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노상직에게 있어 하나의 자부심으로 작용했을 것임에 틀림이 없고, 여타 영남 좌우도의 선비들을 폭넓게 교유하면서 사상사적 진폭 을 넓혀나가기도 했다. 노상직의 학문은 ‘수양론에 바탕한 실용학풍’으로 요약할 수 있다. 서당을 건 립하고 수양론에 입각하여 강학활동을 전개하면서 저술과 출판사업을 벌였던 것은 이 같은 측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중요한 예가 된다. 특히 근기 남인의 실 학연원을 튼실히 하면서 자암서당을 중심으로 학도들을 기르며 이들에게서 미 래의 희망을 버리지 않은 점, 다양한 저술과 출판을 통해 전통문화를 정리하고 널리 보급하고자 했던 점은 모두 위기적 현실에 대한 응전력을 키우기 위한 것 이었다. 이 같은 측면에서 그의 실용학풍은 결국 구국의 의미도 동시에 지닌다 고 하겠다. 소눌학은 무엇보다 江岸學的 特性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협의적 개념으로 16세기 이후 낙동강 연안의 유학사상을 의미하는 강안학은 다양하게 설명될 수 있으나 정구의 한강학이 담지하고 있는 실용주의적 경향은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강안학은 강좌지역의 퇴계학과 강우지역의 남명학을 넘나들며 새로 운 학문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는데, 그 선두에 한강학이 있고 그 마지 막에 소눌학이 있었다. 따라서 강안학은 퇴계학과 남명학을 발전적으로 계승하 면서 또한 이를 당대의 환경 속에서 응용하려는 학문의 실용성을 충실히 담보 하고 있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