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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역사적으로 금강산은 크게 霜嶽, 楓嶽, 皆骨, 蓬萊라는 이칭이 있었 다. 상악, 풍악, 개골은 불교가 수용되기 전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던 금 강산의 고유 명칭이었다. 특히 상악은 국가주도로 행하던 名山大川祭 중 小祀를 지내던 곳으로 三國史記 祭祀條에 실려 있다. 조선시대 사료까지 고증해 본 결과 상악은 가장 처음 ‘국가공명’으로 사용된 명칭 이었다. 삼국시대 이후 사용되지 않다가 조선후기 불교식 이름으로 고 착된 금강이란 명칭에 대한 儒者들의 비판여론 속에서 묻혀 있었던 상악이라는 명칭이 다시금 거론되고 금강산의 원 명칭으로 고증된다. 풍악, 개골은 고려전기까지 꾸준히 사용되다가 고려후기 금강이라는 명칭이 보편화되면서 잘 사용되지 않는다. 조선시대 文士들의 詩文 내 용에 두 명칭이 계속 나타나긴 하나, 금강이라는 명칭에 가려져 산을 대표하는 題名으로는 잘 사용되지 않았다. 이 두 명칭은 가을, 겨울 등 특정 계절에 나타나는 형상에 따라 각각 붙여진 것이 아니다. 돌산으 로 이루어져 있는 지세와 단풍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는 모습 등 계절을 불문하고 산 자체에서 풍기는 形勝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었다. 금강은 華嚴經에 曇無竭菩薩이 상주한다는 산을 바탕으로 만들어 진 불교식 이름이다. 불교의 수용이후 14세기 후반 금강산은 불교성지 로 큰 명성을 얻는다. 그러므로 이시기 산의 명칭 또한 금강으로 보편화 되어 사용된다. 조선시대에는 유자들의 거부감을 일으키고 비판의 대 상이 되었지만, 이미 금강이라는 명칭은 대내ᆞ외적으로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고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도 금강산이라 칭했다. 현재에도 이러 한 전통이 계승되어 금강이 대표 명칭으로 쓰이고 있다. 봉래는 고려시대까지 이상세계 표현을 위한 것 외에 금강산의 異稱 으로 불린 예가없다. 조선시대부터 문인들이 금강산을 봉래로 빗대어 표현하기 시작했다. 금강이라는 불교식 이름의 대안도, 道敎의 공간으 로 표상화하기 위해 전적으로 사용한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 금강산이 Utopia와 같은 곳임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題材나 배경으로 사 용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금강산을 이칭하는 대표 명사로는 거의 사용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