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trix of Sagacious Mind and Body Management by Confucians at Deokcheon-seowon[德川書院] Confucian Academy in relation to HakGiYuPyeon[學記類編] and Nammyong and his Disciples
조선시대 유학자들에게는 일상에서 유학 덕목을 실천하는 기초였던 심신관리는 修身이며 이를 養生, 養心이라 하였다. 종래 남명학 연구에 서 남명이야 말로 자기수양에 철저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남명과 그 문파들의 수신 즉 심신관리의 지혜에 관한 선행연구는 많지 않다. 본고 는 덕천서원 유생들의 심신관리 지혜의 모태를 남명이 찬술한 성리학 요약서인 學記類編, 또 남명과 그의 제자들의 행적에서 찾고자 하였 다. 조선시대 성리학적 질서에서 의학은 도덕적인 수양을 방해하는 잡학 이자 자기 몸을 보존하고 부모님께 효를 다하기 위한 일상적인 기술로 취급되었고 이는 유학이 시작된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유 학과 의학은 태동과 발전의 역사에서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특히 송 대 신유학에서 신체원리와 병리현상의 개념이 적극 수용되면서 의 학의 생명적 세계관이 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었다. 이러한 송 대 신유학의 생명적 세계관이 반영된 글이 성리대전과 당대 유학자 들의 言表들인데 학기유편에서는 주로 이들의 글이 인용되어 있다. 학기유편에 근거한 생명적・역동적・실천적 세계관은 곽재우, 정인 홍, 김우옹, 정구 등의 예와 같이 행동하는 삶의 바탕이자 보이지 않는 계율로 작동하였을 것이다. 남명의 심신관리와 치병에 관한 행적은 주로 남명집에서 확인되었 다. 남명은 몸을 다스리기 이전에 마음 수양을 기초로 보고 ‘좌우명’, ‘패검명’, ‘혁대명’ 등을 지니고 '‘神明舍圖’를 붙여놓고 평생 ‘銘’으로 삼아 실천하였다. 또 남명은 정신을 한 군데에 집중하고자 항상 정좌수 행과 猩猩子의 쇠방울 소리, 敬義劍의 날카로운 형태를 통해 수시로 의식을 각성시키는 등 특별한 무언가를 갖추고 행하는 심신수양의 방 법을 보여주었다. 남명이 일생동안 겪은 질병에 대해서는 9세 때 사망 직전에 이를 정도로 심한 질병을 앓았다는 것이 연보의 기록이고 문집에서는 거의 40대 이후의 질병과 치료에 관한 내용이 있을 뿐이다. 다만 20년 가까 이 반복적으로 기록된 내용을 통해서 남명의 현기증과 두통이 고질적 지병으로 확인되었다. 남명의 성정은 자신은 물론 일상다반사에 대해 지극히 엄정했다. 이와 같은 그의 성정이 만성적인 피로감과 두통으로 이어진 것은 아닐지 추측해 보았다. 남명은 약재를 구하거나 약을 짓는 등 본인과 가족의 질병에 대해 직접 치료를 행했던 것으로 나타나 그의 행장 등에 기록된 다양한 분야 에 관한 능통하고 의약도 섭렵했다는 구절과 다르지 않았다. 남명과는 동시대를 살면서 서로 다른 학문관과 출사관을 가졌던 퇴계와 심신관 리, 의료행적을 비교해 보았다. 퇴계 본인은 물론 지인들에 대해 행한 다양한 의료 행적이 전하지만 오늘날 유학자의 양생서로서 가장 널리 알려진 활인심방의 편저하기도 하였다. 퇴계 뿐 아니라 16세기 이후 에는 유학자들의 다양한 양생서가 저술되었다. 그러나 남명 문하에서 는 망우당 곽재우의 양심요결이라는 제목만 전하고 있을 뿐 이렇다 할 양생서는 전하지 않는다. 남명의 문인 중 한강 정구는 의서저술과 대민의료시설 재건 등을 통해 修己와 安人의 실천의지를 보여주었다. 한강은 의서 외에도 대민 구제를 위해 성주의국을 설치하였다. 성주의국은 임진왜란 후에 피폐 해진 의료시설로 한강은 이를 재건해 대민의료의 기반을 갖추고자 하 였다. 한강은 60대에 이르러 개인적으로 내우외환을 겪고 73세에 중풍으 로 오른쪽이 마비되기에 이른다. 한강은 중풍 발병 이듬해인 1616년부 터 중풍 치료를 위해 온천기행을 시작하여 이후 3년간 지속하였다. 한 강의 온천치료를 위한 기행은 제자 이윤우가 기록한 「봉산욕행록」에 자세하다. 봉산욕행록은 1617년 7월부터 9월의 기록으로, 45일 동안 의 여정, 한강이 매일 반복적으로 목욕요법을 행하고 제자와 관료를 접대하는 등의 내용이 쓰여있다. 남명의 또 다른 문인 망우당 곽재우 역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 으로 나서는 등 남명의 충군애민 실천 의지를 본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망우당은 개인적으로 불우했고 관료생활도 평탄하지 않았다. 이 과정 에서 망우당은 불로장생과 신선의 세계에 심취하였고 일반적인 유학자 들의 양생이 아닌 수련 양생의 길을 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망우당이 50대에 이르러 벽곡조식을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망우당의 벽곡조 식에 대해 허균과 성여신은 한나라 장량에 버금가는 처세술이었다고 변호하였다. 한국도교사에서 망우당에 대한 평가는 조선단학파의 맥을 잇는 한 사람이고 민간에서는 의병과 신선을 넘나드는 전설적인 인물 로, 덕천서원의 유생들에게는 남다른 기개의 선배로 남았을 것이다. 남명을 비롯한 문우, 제자의 박학풍은 남명문파들의 공통된 특징으 로 나타나고 있다. 덕천서원 건립에 참여했던 각재 하항, 남명의 문인 내암 정인홍의 제자인 함양 선비 고대 정경운 등의 예와 같이 의약으로 자신과 가족을 치료하고, 대민구휼을 위해 사우들과 의론을 펼치는 등 남명의 충군애민 실천사상이 재전제자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Confucian scholars in the Joseon era believed that managing one’s mind and body to cultivate one’s morals was the foundation for practicing Confucian virtues. This was accomplished by preserving one’s health and nurturing one’s mind. Existing research in Nammyong Studies show that Nammyong was devoted to his personal cultivation. However, there are not many studies on moral cultivation, i.e., the sagacious mind and body management of Nammyong and the writers in his circle. In this study, researchers have attempted to find the matrix of sagacious mind and body management by Confucian scholars at the Deokcheon-seowon Confucian Academy in HakGiYuPyeon[學記類編] , an abstract of Nammyong’s thoughts on Neo-Confucianism, and in the deeds of Nammyong and his disciples. According to the Neo-Confucian order prevalent during the Joseon era, medicine was regarded as general knowledge that disrupted moral cultivation. However, it was also regarded as an ordinary skill required to preserve one’s body and fulfill one’s filial piety. This was also the case in China where Confucianism originated. However, Confucianism and medicine have an inseparable relationship in the history of the origin and development. During the time of Neo-Confucianism in the Song Dynasty, principles of the physical body and pathological phenomena were accepted. This “life” worldview of medicine became the new paradigm of Neo-Confucianism. The Neo-Confucian “life” worldview during the Song Dynasty is reflected in SeongLiDaeJeon (Collection of Neo-Confucianism)[性 理大典] and the words spoken by Confucian scholars during the time. The dynamic and practical worldviews based on HakGiYuPyeon were foundations for life and were applied as imperceptible religious precepts by Gwak Jaewoo[郭再祐], Jeong In-hong[鄭仁弘], Kim Woowoong[金宇顒], Jeong Gu[鄭逑], etc. Nammyong’s mind and body management, as well as deeds related to curing disease, can mostly be found in Nammyong Jip[南 冥集]. Nammyong believed that before curing the body, the mind needed to be cultivated and thus used special methods to do so. He attempted to focus his mind in one place and awakened his consciousness through meditation, bell sounds, and the sharpness of his ornamental knife. Nammyong fell seriously ill when he was nine years old and almost died. This has been recorded in the chronology of his life. A collection of literary works cite that he suffered from chronic dizziness and headaches. Nammyong was extremely strict with himself in his day-to-day happenings. This temperament may have led to his chronic ailments. Nammyong administered medicine and even prepared it. He treated his family’s illnesses as well as his own. His life records state that he was well-read in medicine and proficient in various other fields. Of the writers in Nammyong’s circle, Hangang[寒岡] Jeong Gu[鄭 逑] showed his willingness to practice self-cultivation and comfortable lives of others by writing medical books and rebuilding public medical facilities. Hangang, in his 60s, experienced internal and external troubles and then suffered a stroke at the age of 73. He began visiting hot springs in 1616, to treat his illness and continued to do so for three years. Hangang’s trips to hot springs are recorded in his disciple Lee Yoonwoo’s BongSanYokHaengNok[蓬山浴行錄]. Mangwoodang[忘憂堂] Kwak Jaewoo[郭再祐], another writer in Nammyong’s circle, became a soldier after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He attempted to emulate Nammyong’s loyalty and love for the people and his willingness to practice. However, Mangwoodang has suffered misfortunes in his personal life also a bureaucrat was not without problems in his public life. He was absorbed in a world of perennial youth and long life of a Taoist hermit. Mangwoodang chose to practice a different type of self-preservation rather than conserving his health like the other Confucian scholars. When Mangwoodang reached his 50s, he opted to live on a plain meager diet. During his final years, he not only suffered from a chronic disease that had ailed him from the start but also from the side effects of his meager diet. However, he refused to take medication for it. Heo Gyun and Seong Yeoshin justified Mangwoodang’s plain and meager diet by stating that it was an art of living that could be compared to Zhang Liang’s during the Han Dynasty. In Korean Taoist history, Mangwoodang’s legacy was said to have continued in the Josen Danhak circles. To the people, he was a legendary figure that was a soldier and Taoist hermit. To the Confucian scholars at Deokcheon-seowon Confucian Academy, it is likely that he was a colleague with a unique spirit. There were many erudite literary colleagues and disciples within Nammyong Studies, including Nammyong himself. His disciples and their disciples thereafter medically treated themselves and their families, and made efforts to provide public aid. This shows that Nammyong’s loyalty and love for the people along with his ideological practices live on through his follow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