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의 역사와 문화의 특징을 언급할 때 흔히 거론되는 것 중에 ‘南冥學派의 본고장’, ‘1862년 농민항쟁의 선구적 지역’, ‘1894년 경남 서부지역 동학농민전쟁의 본거지’라는 표현들이 있다. 이런 상징적 표현은 진주의 강역이 조선시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변해왔음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고려시대에 진주는 경상도 界首官의 하나로서 경남 서부지역을 통할하는 지방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여러 고을을 통할하였다. 또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많은 屬邑과 鄕ᆞ所ᆞ部曲 등의 任內를 고을 예하에 두고 있었다. 예종대 이후 진주목의 일부 속읍들이 독립해 나가기는 했지만, 昆明縣 등의 여러 임내가 조선왕조 초기까지 남아 있었다.조선 건국 후에도 여전히 넓은 강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진주는 여러 번에 걸쳐 그 강역이 축소된다. 1419년 진주의 속현 중 하나인 곤명현이 분리되고, 이후 진주 예하의 金陽部曲을 흡수하여 昆陽郡으로 독립해 나갔다. 조선후기 숙종대에 들어와서도 섬진강 일대의 관방을 강화하면서 진주목의 적량ᆞ진답ᆞ화개현ᆞ악양리가 하동으로 이속되었다. 을사조약 직후인 1906년 일제는 합리적인 지방제도 개혁을 내세우며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추진하게 되는데, 이때 진주의 강역은 대폭 축소된다. 즉 진주의 75면 중 25개 면이 산청ᆞ하동ᆞ고성ᆞ사천ᆞ남해ᆞ함안 등 주변지역으로 이속된다. 또 한일합방 직후인 1914년에는 전국의 군과 면ᆞ리를 통폐합하여 군과 면의 수를 크게 줄이는데, 이때에도 진주군의 영역 중 일부는 사천군으로 이속되었고, 1906년 진주에서 함안군으로 이속되었던 지역이 다시 진주로 편입된다. 이처럼 진주의 강역은 여러 시기에 걸쳐 점차 축소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