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udy on Saengyukssin(生六臣) Eogye (漁溪) Jo Ryeo (趙旅)'s Life and Pro-Sung Activity
어계 조려가 살았던 1420년(세종 2년)부터 1489년(성종 20)까지의 기간은 조선이 유교이념에 따라 각종 정치,제도, 문물이 갖추어져 가던 시기였다. 동시 에 세조가 정권을 찬탈한 이후에는 막강해진 훈구세력에 맞서 도덕과 절의를 중시하고 지방에서 유교 교육에 힘쓴 사림세력이 성장한 기간이었다.
함안 조씨의 조려 가문도 이러한 시기를 맞이하여 절의를 중시하고 유교 교육 에 힘썼던 조려에 의해 그 성장의 기틀이 형성되었다. 조려는 함안의 원북동에 터를 잡은 이후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여러 차례 상경하여 유교경전과 문장을 익혔다.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에는 성균관에서 수학하면서 요순 시대의 이상적 인 정치를 희구하였으며, 도덕과 절의를 중시하는 많은 유교적 지식인들과 사 귀었다. 그러나 그는 세조에 의해 단종이 강제로 쫓겨나자 자신의 유교 정치에 대한 이상이 실현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고향에 내려와 끝내 출사하지 않았으 며, 어계처사(漁溪處士)를 자처하며 단종에 대한 절의를 다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함안 일대에서 도덕과 절의를 중시하는 사림파 지식인들 과 교제하였으며, 향촌사회에서 유교적 예속의 보급과 가문의 중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유교적 예속의 보급을 위해 주자가례에 규정된 상제례의 실천에 솔선수범하였고, 지방 교화를 위해서 향교에 나아갔으며, 지방 수령들에 게 어진 정사를 펼칠 것을 당부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자녀 교육에도 힘써 자신의 아들들이 매사에 뜻을 크게 갖고 조심 하여 호랑이처럼 이름을 떨칠 것을 기대하고, 자신의 종제(從弟) 조욱(趙昱)과 함께 훈도하였다. 이에 조려의 큰 아들 조동호와 그 소생에서 문과 합격자 3명 을 비롯한 여러 명의 과거합격자를 배출하였다. 조동호가 안동의 이증과 같은 사림가문의 인물과 혼인한 것이 큰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둘째아들 금호와 그 소생 역시 주로 무관으로 진출하였는데, 금호는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훈척가문 이 되기도 하였다.
이후로도 조려의 후손들은 조려의 절의와 훈도로 인해 더욱 번창하였으며, 왜 란 때에 다수의 인물들이 의병운동에 참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려의 후손들 은 조려의 절의를 추숭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조려의 5대손 조임도는 조려의 「구일등고시(九日登高詩)」의 내용에서 조려의 절의를 표상할 수 있음을 알았으며, 조려의 절의를 표장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조려의 현손 조감의 사위인 성문준의 「어계선생전(漁溪先生傳)」과 성문준 의 생질인 윤선거의 『노릉지(魯陵志)』이후로도 조려의 후손들은에 다시 조려의 절의사실이 기록되어지 고, 사림 사이에서 널리 공론화되었다. 특히 숙종 대에 이르러서는 사육신과 단 종이 복권된 것을 계기로 조려의 절의가 조야에서 재조명되고, 생육신으로 받 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Since King Sejong's reign 2nd year (1420), when Eogye Jo Ryeo lived, until Seongjong's reign 20th years (1489), Joseon was prepared with all sorts of politics, institution, and culture along with Confucian ideology. At the same time, Sarim power, which pursued Confucian education in the province, became strong emphasizing ethics and fidelity against Hungu power which became powerful since Sejo seized power.
Haman Jo family's Jo Ryeo family was also established with the basis of its growth by Jo Ryeo, who highly regarded fidelity and emphasized Confucian education, receiving this period. Jo Ryeo went up to Seoul several times to pass the state examination after settling into Wonbuk-dong, Haman and learned Confucian scripture and sentence. After passing Jinsa examination, he aimed for the ideal politics of Yo Sun era while studying at Seonggyungwan, getting along with lots of Confucian intellectuals who highly regarded ethics and fidelity. However, he determined that his ideal about Confucian politics, his volition, could not be realized when Danjong was forcedly expelled by Sejo, didn't enter government service again after returning to his homeland, exerted fidelity to Danjong, setting up for Eogye Cheosa (漁溪處士).
However, he got along with Sarim school intellectuals, who highly regarded ethics and fidelity, mainly with Haman, exerting efforts for distribution of Confucian manners and restoration of family in the rural community society. For the distribution of Confucian manners, he focused on practice of Confucian ritualism and lead ancestral ritual. Also, he went forward Hyanggyo for the province edification, and requested local public officials to exert benevolent political affairs.
Besides, he labored for children's education and disciplined them along with his cousin, expecting his sons to have large will in everything and make name in the world like a tiger. Here, he produced several successful applicants for state examination including 3 successful applicants of the liberal arts division. This became a big background for Jo, dongho to get married to a person from Sarim family same as Andong Yi jeung. The second son Geumho and his son also advanced mainly as military officials, Geumho became Huncheok family by participating in Jungjong restoration.
Later, Jo Ryeo's descendants prospered due to Jo Ryeo's fidelity and discipline, many of them participated in justice army during Japanese invasion of Korea. Also, Jo Ryeo's descendants exerted lots of efforts to enhance Jo Ryeo's fidelity. Particularly, Jo Ryeo's 5th descendant Jo, yimdo knew that Jo Ryeo's fidelity could be embodied in the content of Jo Ryeo's 「Guildeunggosi (九日登高詩)」. Also, in respect of such Jo Ryeo's fidelity, Seongmunjun's 「Eogye Seonsaengjeon (漁溪先生傳)」, son-in-law of Jo Ryeo's great-great grandson Jogam and Yun, seon-geo's 『Noreungji (魯陵志)』, Seong munjun's sister's son. Here, with the opportunity of Danjong's restoration during Sukjong, Jo Ryeo's fidelity came to be widely known, accordingly, Jo Ryeo could be enshrined as Saengyuks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