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실무를 책임 진 조지송의 산업선교 활동을 제시하고 그의 산업선교 활동에 대한 선교신학적 해석을 제시하고, 그의 선교로부터 얻는 교훈을 제시하고자 한다.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산업선교는 평신도를 통한 산업전도, 노동 조합을 통한 산업선교, 소그룹 활동으로서의 산업선교로 전개되었다. 그의 산업선교는 성육신적 선교로서의 산업선교, 십자가의 길로서의 산업선교, 하나님의 선교로서의 산업선교, 현존으로서의 산업선교, 디아코니아로서의 산업선교, 노동의 신학과 산업선교, 산업선교와 돈, 노동조합 교회론: 노동자의 눈으로 본 한국교회, 산업선교와 구원 론, 바보들의 행진, 어릿광대 공동체로서의 산업선교이었다. 그의 산업선교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실무자들에 대한 철저한 교육과 훈련, 실무자와 노동자 및 학생, 목회자, 총회 임원을 대상으로 한 광범위한 교육, 교육의 언어는 몸과 가슴을 움직일 수 있는 삶의 언어, 산업사회에서 현존으로의 선교 등이다.
본고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담긴 종교와 이데올로기의 상관관계를 분석하고, 작가가 재창조한 민족·민중 신앙의 성격을 고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조정래는 『태백산맥』 창작 보고서에서 이 작품의 집필 동기를 분단의 원인을 규명하고 분단의 요소를 제거하여 통일의 새 길을 여는데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분단의 원인을 미군과 친일파를 비롯한 민족 내 반동세력에서 찾는 작가는, 종교 역시 민족과 민중 중심의 통일 국가의 건립에 기여할 때 이상적인 것으로 제시 한다. 무속은 민중의 연대와 공동체의 기복에 기여할 때 그 가치가 승인되고, 불교는 무소유를 기반으로 토지의 무상분배를 꿈꿀 때 긍정된다. 유교는 한민족 고유의 전통을 존중하는 범위 내에서 인정되지만, 기독교는 제국주의적 외래 종교로 간주되어 그 교리와 교세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된다. 『태백산맥』에서 이상적 종교로 제시되는 것은 민중의 혁명을 실천한 민족 종교 동학이며, 여타의 종교는 혁명적 통일 민족국가 건설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해석되고 평가된다. 이처럼 이데올로기적 목표에 종교를 복속시키는 것은 다양한 종교를 활용하여 동학을 이상적 종교로 제시하고 민중과 민족 중심의 혁명을 독려하는 효과를 낳는다.
본 논문의 목적은 무산 조오현(1932~2018)의 선적 사유와 그 시적 형상화의 의미를 살펴보는 데 있다. 그는 선승이며 시조시인으로, 1968 년 『시조문학』의 추천을 받아 등단하였으며, 신흥사 주지와 회주, 만해 사상실천선양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아울러 『심우도』, 『절간이야기』 등 의 시집과 『산에 사는 날에』, 『선문선답』, 『죽는 법을 모르는데 사는 법을 어찌 알랴』 등의 산문집을 남겼으며, ‘공초문학상’과 ‘정지용문학 상’ 등을 수상했다.
무산의 시세계가 지향하고 있는 특징은 선적 사유의 형상화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 보여주는 구도와 깨달음의 성찰은 무념, 무상, 무욕의 탈속한 자연인의 면모를 보여준다. 아울러 그는 이러한 시 창작과정에 있어 생겨나는 갈등과 의문에 대해 선문답과 같은 물음으로 그에 대한 답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묻기도 하고, 또한 다양한 사람들 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가야할 길이 어디인지를 제시한다. 가령, 「아지랑이」, 「적멸을 위하여」, 「산창을 열면」, 「무산심우도」, 「무 자화 부처」, 「일색변, 「무설설」, 「아득한 성자」 등에서 보여주는 역설의 언어는 그 자체가 선의 화두이면서 언어적 해체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수행자로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자아성찰과 고뇌의 심경을 표출한 무산의 시 세계의 특징은 모든 분별의 경계선을 허물어가는 원 융의 사유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량 분별에 의한 수많은 경계선 들을 해체하면서 궁극적으로 차별과 대립을 뛰어 넘은 원융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구도를 향한 시적 노정에 성/속, 스님/속 인, 산중의 일/ 세상일 들을 두루 담아내려는 끊임없는 시도를 보여주 는 그의 시적 세계에는 수행자로서의 치열한 구도와 깨달음, 그리고 상 호연기의 생명존중과 자비실천의 모습이 선명히 형상화되어 있다.
The king of Joseon Dynasty Jeong-jo commanded the renovation of Seongjeong-gak, once a study for crown prince, to serve as Pyeonjeon(便殿), a main office for kings. The renovated building strictly separated the routes designated for the king and the other officers, respectively. The interior space consisted of Youngnae, reserved for the king and his senior aides, and Youngwae, for lower ranking officers. Youngnae(楹內) and Youngwae(楹 外) corresponded to the two blocks (the space between two columns) on the east and west side, respectively. Such structure of Pyeonjeon was heavily transformed over several occasions beginning from the late nineteenth century. Youngwae was subdivided into separate spaces, and the routes for the king and the officers became indistinguishable.
경상우도의 함양에 연고를 둔 덕곡 조승숙은 려말⋅선초를 주요 활동기로 삼아 불사이군으로 표방되는 시대정신을 실천한 충절의 인물이다. 정몽주의 문인이었던 조승숙은 포은과 정치적 노선을 같이하여, 고향인 덕곡촌으로의 귀은을 통해 항절 의지를 실행에 옮기게 된다. 조승숙은 귀은에 돌입한 이래로 강학활동을 전개함으로써, 맹자가 운위한 대장부 정신을 몸소 구현하기도 하였다. 차후 덕곡공파의 파조로 옹립된 조승숙이 남긴 일련의 행적들은, 이 문중의 후손들의 뇌리에 유의미한 삶의 전범으로 각인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정황은 범 덕곡공파 차원에서 간행된 문중용 교훈서인 『함안조씨언행록』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확인되는바, 총 5편으로 이뤄진 이 책은 후손 68 인이 선보인 귀감이 될 만한 행적들을 발취하여 재구성한 텍스트다. 조승숙은 시조 조정과 입향조 조영준 및 부친 조경과 함께 「제1편」에 소속되어 있다. 조승숙의 경우 이 서책 전체를 통해 가장 많은 서술 공간을 획득하였고, 또 ‘선생’이라는 호칭을 구사한 정황 등으로 미뤄 볼 때 언행록의 직접적인 연원을 제공해 준 상징적인 인물임이 간취된다. 『함안조씨언행록』은 선생⋅관직 명⋅호⋅‘휘□□’라는 네 종류의 호칭법을 구사하고 있다.
한편 계묘본 언행록은 파별로 나뉘어 독립적인 서술체계를 유지했던 기존 『언행록』 체제를 초극하기 위해 ‘연대(年代)⋅연기(連記)’라는 새로운 편집 원 칙을 적용한 점이 주목된다. 또한 『함안조씨언행록』은 범 덕곡공파 후손들을 대상으로 하여 효우⋅충절⋅학문⋅청렴성⋅위민의식 등과 같은 보편적인 인물 선정 기준을 적용함으로써, 문중적⋅폐쇄적 한계성을 극복하고 극히 보편적인 가치를 담지한 텍스트로 거듭날 수 있었다.
본 연구는 조양규가 일제 강점기, 해방, 도일(渡日), 한국 전쟁 그리고 북송이라는 역사적 굴곡 속에서, 그의 회화에 대한 추구점이 무엇이었고, 스스로가 리얼리즘으로 삼았던 ‘정치와 회화의 일치’가 작품에서 얼마나 성취되었는지를 기존의 ‘틀’에서 벗겨내어 평가해 보고자 한다. 당시 세련된 추상양식에 치중하여 작업을 하였던 유학생 작가들과 달리, 조양규는 삶에서 몸소 겪은 사회적 문제를 파고들어 구상적이지만 추상적이고, 추상적이지만 더 현실감 있는 그림의 형식으로의 독자적인 회화 기법을 개발하였다는 점이 특별하다. 또한 모국과 일본에서 영향을 받았던 조력자들에 주목해보며 그의 회화 적 연원과 북송 이후의 행적을 추적하였고, 이는 한국 회화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로서 의의가 있을 것이다.
Jeong Woo-tae(?-1809) was a military official who had worked as Byeol-Gan-Yeok in the governmental construction works during the late 18th century through the early 19th century. Byel-Gan-Yeok, literally a special technician, was an official post in the governmental construction works that carries specific technical tasks from the mid 18th century. Over 30 years, Jeong Woo-tae had devoted himself in the construction of various royal tombs, city walls, and palace buildings. He showed superb and various techniques in the works of stone carving and architectural details. After finishing the construction of the tomb of King Jeong-jo's father successfully, he was appointed as a governor of a rural town. Being on duty of the governor, he used to participate in the construction works as a technician. He also made a couple of innovative devices in the field of construction, like a carrying apparatus, Byel-Nok-No. His works secured the setting up of the post of Byel-Gan-Yeok in the governmental construction system in the 19th century. But his technical achievement remained as his own private works rather than developing to the universal growth of the craftsmen's skill. This might be a limitation of the Byel-gan-Yeok's role, whose position was remained in the midway between official and craftsman.
이 글은 月川 趙穆(1524-1606)의 『月川集』 필사본과 간행본의 내 용을 비교하여 개정의 특징과 의의를 고찰한 것이다. 『月川集』은 조목의 아들 趙錫朋이 간행을 주도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시 950여 수를 비롯해 필사본에 수록된 다수의 작품이 산삭되었다. 산삭의 양상을 살펴보면 특징적으로 류성룡과 관련된 민감한 작품들이 산삭되었는데, 이는 ‘主和誤國’의 내용을 지우려는 김응조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 영향력은 문집의 서문을 수정하고 言行記와 더불어 혐의가 될 만한 다수의 작품이 산삭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만사ㆍ제문의 경우, 조목의 도산서원 종향을 추진했던 문인의 작품은 수록하고, 그렇지 않은 인물의 작품은 산삭되었다. 시에서는 남명학 파의 권역에 있는 인물을 숨기거나 정인홍을 의도적으로 폄하한 흔적이 보였고, 그 중 儒家에 유익하다고 판단된 시는 제목을 변경해서 간행 본에 수록하였다. 이상의 특징을 종합하여 『월천집』 개정이 외부의 영향과 간섭을 받으면서 진행되었고, 상대적으로 조목 문인들은 이에 대응할 자체적인 기반이 약한 상황이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出處는 儒學에서 선비들에게 요구한 중요한 덕목이며, 많은 유학자들이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표적으로 남명 조식은 출처를 君子의 큰 절조로 보았으며, 평생 ‘處士’로 실천했다.
그런데 문제는 조정의 계속된 출사요구를 거부한 남명을 퇴계와 같은 당대의 유학자들은 부정적으로 보아 그 의미를 축소하거나, 학문적 體認의 결과가 아닌 개인적 기질의 결과로 이해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에도 ‘기절’이나 ‘기상’, ‘절개’등 개인적 차원의 의미만을 강조하여, ‘정치를 외면하지 않았다’며 정치적 의미에 대해선 소극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이 연구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남명의 처사적 삶과 사상을 보다 적극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남명의 ‘처’ 즉 ‘물러남’이 가지는 국가권력과의 ‘거리감’에 주목한다. 유학은 현실정치를 긍정하여 ‘나아가감(出)’을 강조했지만, ‘處-물러남’ 또한 강조했다. 이러한 ‘처’는 유학자들이 현실의 정치권력과 적절한 거리를 둠으로써 견제와 긴장을 만들어낸 요소이기도 했다.
남명은 이러한 ‘물러남의 정치학’을 잘 이해했으며, 그의 출처사상과 처사로서의 삶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래서 남명의 處는 개인적 기절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국가권력에 대한 ‘경계’와 ‘비판’ ‘저항’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나아가 ‘폭력적 국가권력’을 ‘공공의 국가권력’으로 변화 시키려는 문제제기도 담고 있었다.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 모른다’는 당대 지식인들에 대한 남명의 비판과 그가 실천한 ‘물러남의 정치학’은 현대의 정치현실에 있어서도 부당한 권력을 비판하고 거부하는 정신으로 계승될 수 있으며, 나아가 권력의 성격을 보다 공적인 것으로 만들어나가 현대의 민주주의 발전에도 도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月川學團의 초기 성격을 살피기 위해 조목의 합천지역 교유인물과 조목에 대한 도산서원 종향 과정을 고찰한 것이다. 조목은 1598년 1월부터 2년 5개월 동안 합천 군수로 재임하면서 지역 학자들과 교유하였는데, 합천이 來庵 鄭仁弘의 지역적 기반이었던 만큼 정인홍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교유가 이루어졌으며, 특히 조목이 尤谷齋에서 『心經講錄』을 강학하면서 이 지역에 퇴계의 학문이 전수되기도 하였다.
‘조목과 정인홍 문인들의 친연성을 월천학단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였는가’하는 문제는 월천집 판본 비교를 통해 그 대략을 확인할 수 있다. 초고에 해당하는 필사본과 1666년 간행본의 내용을 비교‧검토해 보았을 때 필사본에 수록된 합천과 관련된 기록들이 간행본에는 모두 산삭되어 있었다. 더구나 간행본에는 남명을 추모하는 내용의 「聞曺南冥訃」가 산삭되고 정인홍을 강도 높게 비판한 「偶見仁弘南冥集跋語」가 수록되었다는 점에 주목하면, 간행본의 정리 과정이 정인홍과 그 문인들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에서 진행되었으며 이와 반대로 초기의 필사본은 수용의 입장에서 정리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한편 조목 사후에 그를 도산서원에 종향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啓請과 종향·배향에 대해 향촌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종향이 지연되다가 金中淸이 조정에 나아가 직접 啓請을 준비하면서 빠르게 추진되었다. 때문에 종향을 비판하는 일부 인사들은 대북파의 지원이 있었다고 의심했지만, 또한 그것을 확신하지는 못했다. 이 글에서는 대북파와 대립 없이 종향이 공론화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정인홍의 문인들과 친연성을 보이는 조목의 교유활동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정리하면, 조목 사후 초기에 조목의 문집을 정리했던 문인들은 조목과 정인홍 문인들과의 친연성을 수용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종향을 추진하여 대북정권 내에서 무리 없이 공론화 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인조반정 이후 西人 老論系 학자들이 南冥 曺植을 의도적으로 폄하하는 상황 속에서, 남명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주장하여 존숭과 선양을 촉구한 이들은 星 湖 李瀷과 그의 제자들이었다. 조선후기에 남명학파가 매우 어려운 여건 속에 서도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성호학파 학자들의 노력이 중요한 역할 을 했다고 이해된다. 이 글은 성호의 제자인 順菴 安鼎福이 南冥集에 기록한 箚記를 통해 그가 남명의 학문과 삶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졌으며, 그 근거가 구체적으로 무엇이 었는지를 살펴보았다. 箚記에 근거해 볼 때, 안정복은 남명집을 매우 면밀하 게 읽고 관련 사실이나 자료를 참조하면서 고찰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무엇 때문에 남명집을 정밀하게 연구했을까? 그 이유는 무엇보다 남명이 진 정 어떤 인물인가를 깊이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판단된다. 남명의 문학 작품에 대한 품평이나 견해를 전혀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점, 인물ㆍ시기ㆍ사 건 등에 집중적인 관심을 기울이며 사실과 진위 여부를 정밀하게 고증한 점 등 을 고려한다면, 그가 남명집을 읽을 때 무엇에 유의했는지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안정복은 남명에 대한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해 그 인물의 학문과 인품에 관한 평가를 스스로 확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알게 된 남명의 학문 과 언행을 벗과 제자들을 권면할 때 인용하여 말했으며, 남명과 관련 있는 인물 들의 글을 지을 때는 반드시 그 연관성을 드러내어 연원을 밝혔다. 그러므로 남 명에 대한 안정복의 관심과 선양은 남명학파에게 가장 암흑한 시기였던 18세기 에 빛나는 이정표 같은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어계 조려가 살았던 1420년(세종 2년)부터 1489년(성종 20)까지의 기간은 조선이 유교이념에 따라 각종 정치,제도, 문물이 갖추어져 가던 시기였다. 동시 에 세조가 정권을 찬탈한 이후에는 막강해진 훈구세력에 맞서 도덕과 절의를 중시하고 지방에서 유교 교육에 힘쓴 사림세력이 성장한 기간이었다.
함안 조씨의 조려 가문도 이러한 시기를 맞이하여 절의를 중시하고 유교 교육 에 힘썼던 조려에 의해 그 성장의 기틀이 형성되었다. 조려는 함안의 원북동에 터를 잡은 이후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여러 차례 상경하여 유교경전과 문장을 익혔다.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에는 성균관에서 수학하면서 요순 시대의 이상적 인 정치를 희구하였으며, 도덕과 절의를 중시하는 많은 유교적 지식인들과 사 귀었다. 그러나 그는 세조에 의해 단종이 강제로 쫓겨나자 자신의 유교 정치에 대한 이상이 실현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고향에 내려와 끝내 출사하지 않았으 며, 어계처사(漁溪處士)를 자처하며 단종에 대한 절의를 다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함안 일대에서 도덕과 절의를 중시하는 사림파 지식인들 과 교제하였으며, 향촌사회에서 유교적 예속의 보급과 가문의 중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유교적 예속의 보급을 위해 주자가례에 규정된 상제례의 실천에 솔선수범하였고, 지방 교화를 위해서 향교에 나아갔으며, 지방 수령들에 게 어진 정사를 펼칠 것을 당부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자녀 교육에도 힘써 자신의 아들들이 매사에 뜻을 크게 갖고 조심 하여 호랑이처럼 이름을 떨칠 것을 기대하고, 자신의 종제(從弟) 조욱(趙昱)과 함께 훈도하였다. 이에 조려의 큰 아들 조동호와 그 소생에서 문과 합격자 3명 을 비롯한 여러 명의 과거합격자를 배출하였다. 조동호가 안동의 이증과 같은 사림가문의 인물과 혼인한 것이 큰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둘째아들 금호와 그 소생 역시 주로 무관으로 진출하였는데, 금호는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훈척가문 이 되기도 하였다.
이후로도 조려의 후손들은 조려의 절의와 훈도로 인해 더욱 번창하였으며, 왜 란 때에 다수의 인물들이 의병운동에 참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려의 후손들 은 조려의 절의를 추숭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조려의 5대손 조임도는 조려의 「구일등고시(九日登高詩)」의 내용에서 조려의 절의를 표상할 수 있음을 알았으며, 조려의 절의를 표장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조려의 현손 조감의 사위인 성문준의 「어계선생전(漁溪先生傳)」과 성문준 의 생질인 윤선거의 『노릉지(魯陵志)』이후로도 조려의 후손들은에 다시 조려의 절의사실이 기록되어지 고, 사림 사이에서 널리 공론화되었다. 특히 숙종 대에 이르러서는 사육신과 단 종이 복권된 것을 계기로 조려의 절의가 조야에서 재조명되고, 생육신으로 받 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This paper presents the quantitative evaluation of migration diffusion coefficient considering an effect of cold joint. This also contains an effect of mineral admixture on chloride diffusion coefficient and the interaction of cold joint for chloride diffusion is experimentally investigated. The effect of mineral admixture is very effective to resistance to chloride penetration even if concrete has cold joint section.
이 논문은 丁卯·丙子胡亂 전후 朝庭의 公論을 이끌었던 주요 인물 중 하나였던 趙絅의 대외인식과 척화론을 시기별로 구분하여 그 내용 과 특징을 정리한 연구이다. 이를 통해, 鄭蘊 이외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非西人係 인물의 척화론을 고찰함으로써 당시 政派를 가리지 않고 지지받았던 척화론의 성격을 究明하였다. 그리고, 對明義理의 강 고한 心性的 기반이 어떻게 朝·淸(後金) 양국의 대외관계에 영향을 미 치고 있었는지도 살펴보았다. 덧붙여, 병자호란 이후 조경이 주장한 明과의 密通, 助兵反對, 日本請兵 등이 어떠한 역사적 배경에서 제기되 었으며, 어떤 성격을 가진 논의였는지 재검토하였다.
이 글은 大笑軒 趙宗道의 문학에 대한 생각과 문학작품 특히 시세계를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대소헌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 安奇道察訪에 천거되었고, 그곳에 있으면서 退溪 李滉의 제자인 柳成)·金誠一·權好文 등과 교유하였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적극적으로 의병활동을 하였고, 정유재란 때 黃石山城에서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그는 호에 드러난 바와 같이 매우 호방하였으며, 성품과 행실이 고상하고 우뚝하였다. 그래서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을 뿐만 아니라, 친척들에게 어질게 대하고, 벗들에게는 진심으로 대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성품과 행실은 문학에 그대로 나타났는데, 문학에 대하여는 매우 실용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學校」라는 일종의 策文에서, 학교는 문학을 詞章을 외워 科擧에 합격하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되며, 선현의 덕을 함양하여 자신을 수양하는 학문하는 곳이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를 통해 문학보다는 학문을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문학은 매우 뛰어났으며 여러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대소헌의 문학작품이 갖는 가치는 우선 문학작품은 그 사람의 인물됨됨이를 반영한다는 매우 오래된 생각을 바탕으로 발현이 되고 있다. 이는 공자와 맹자에게서 비롯된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훌륭한 말을 한다.[有德者 ,必有言]’이나 ‘그 시를 외우고, 그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을 모르면 되겠는가?[誦其詩, 讀其文, 不知其人, 可乎?]’라는 말을 기초로 하여, 사람됨됨이[爲人]와 시를 짓는 것[爲詩] 혹은 글을 짓는 것[爲文]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러한 ‘사람됨됨이와 시를 짓는 한 것은 한 가지’라는 ‘爲人爲詩一道論’에 근거하여 선현들은 대소헌의 시가 그 인물과 마찬가지로 매우 훌륭하였음을 말하였다.
대소헌의 문학작품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가를 알 수 있는 오래된 논점의 하나는 ‘고기 한 점만 맛보면 솥 전체의 맛을 알 수 있다’는 ‘一臠全鼎可知論’이다. 이는 한 점의 저민 고기로 한 솥의 국맛을 알 수 있다는 것인데, 한 국자의 맛으로 전체 솥의 맛을 알 수 있다는 말과 같이 쓰이고 있다. 大笑軒 趙宗道가 남긴 얼마 되지 않는 작품을 보면 그의 작품이 진실로 ‘일련전정가지론’에 부합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岳堅山城에서 지은 시와 玄蘇에게 주는 시는 그 대표적인 예이며, 그 밖의 작품들도 여러 선인들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性情과 氣格을 드러내는 뛰어난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大笑軒 趙宗道(1537-1597)는 丁酉再亂 때 黃石山城에서 장렬하게 일생을 마쳤던 분이다. 당시 그 황석산성에서는 대소헌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런데도 그곳에서 죽은 사람으로 大笑軒과 存齋 郭䞭(1551-1597)만 자주 거론되는 것은 이들이 단순히 縣監이란 벼슬아치였기 때문은 아니다. 이들의 행위는 그 자체로도 기릴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며, 또한 이들이 황석산성에서 殉死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길이 추앙을 받을 수 있었던, 학문과 행실을 겸비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대소헌의 생애를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그의 학문과 삶의 태도에 대해서 고찰한 결과,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는 합의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첫째, 대소헌은 총명한 두뇌를 타고난데다, 鄭斗·盧禛·曺植 등 당대 경상우도에서 가장 이름난 스승으로부터 학문을 사사하였고, 이러한 학문 풍토에서 함께 강학했던 좋은 벗들을 많이 만나, 여기서 학문이 무르익을 수 있었다.
둘째, 「學校策」이나 「倡義文」 등을 통해서, 대소헌의 학문이 社會的 實踐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었고, 이는 바로 曺植의 학문과 깊은 영향관계에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셋째, 대소헌은 대범하고 호방한 삶의 자세를 지녔는데, 학문에 의해 ‘大節이 不踰閑’할 수 있었기에 후인의 추앙을 받을 수 있었다. 황석산성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맞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삶의 자세와 학문의 역량에 의해서 가능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강원도 양양군 조봉지역에 대한 식물자원을 2011년 4월부터 2012년 10월까지 총 11회에 걸쳐 조사하였다. 그 결과 관속식물은 총 92과 296속 434종 6아종 49변종 11품종으로 총 500분류군이었다. 조사된 식물 중 한국특산식물은 13분류군, 희귀식물은 14분류군, 그리고 멸종위기야생식물은 II급의 한계령풀이 확인되었다. 식물구계학적 특정식물종은 V등급 1분류군, IV등급 11분류군, III등급 21분류군, II등급 12분류군, 그리고 I등급 30분류군으로 총 75분류군이 조사되었다. 귀화식물은 32분류군으로 나타났으며, 귀화율은 6.4%, 도시화지수는 10%로 산출되었다. 식물의 용도는 식용이 193분류군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약용, 목초용, 관상용의 순이었으며, 용도를 알지 못하는 종류도 148분류군이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