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상세보기

이재 황윤석의 아내와 小室에 대한 사랑 KCI 등재

Love of Hwang, yun-seok(黃胤錫) for his wife and concubine

  • 언어KOR
  • URLhttps://db.koreascholar.com/Article/Detail/314026
  • DOIhttps://doi.org/10.14381/NMH.2016.49.03.30.277
서비스가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남명학연구 (The Nammyonghak Study)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The Nammyong Studies Institute)
초록

본고는 호남출신의 문인 頤齋 黃胤錫(1729∼1791)이 아내와 小室에 대해 남 긴 기록을 통해 그가 자신의 배우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어떻게 애정을 표현했는지 그의 한시를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당시 鄕儒가 가졌던 배 우자에 대한 의식의 일면을 알아보려 한다.
본고는 그의 시 중에서 특히 아내와 소실을 대상으로 지은 작품에 주목했다. 이재는 20세에 남원에 살던 창원 정씨와 혼례를 올렸는데 24세부터 과거와 학 업을 위해 아내와 떨어져 지냈고, 38세에 음보로 장릉 참봉의 일을 하게 되면서 부터는 더욱 긴 시간 동안 집안일은 아내에게 맡긴 채 객지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가까이에서 부모님을 모시지 못하는 아쉬움과 어린 자식들이 커나가 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지 못하는 서글픔 등과 함께 이 모든 가정사를 홀로 도 맡아 책임지고 있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그가 남긴 일기의 곳곳에 서 드러난다.
특히 아내는 일상적인 가정사 이외에도 이재가 객지에 머무는 동안 출산이나 死産·어린 자식의 夭折 등 큰 어려움들을 홀로 견뎌내야 했다. 이처럼 아내는 홀로 고생만 하다가 48세의 나이로 먼저 세상을 떠났고 따라서 이재가 현감이 되었을 때는 정작 그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없었다. 이재는 이점을 무엇보다도 아쉬워했고 그래서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아내의 생일이나 기일이 되면 지난 날을 회상하며 그녀를 추모하곤 했다.
남자가 홀로 객지 생활을 하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았기에 장릉 참봉 시절부터 주위 사람들은 이재에게 첩을 들여 의식주를 돌보게 하는 것을 권유했고 이재 역시 첩을 들이는 것을 염두에 두기는 했다. 하지만 가족들과의 관계나 경제적 인 문제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喪期를 마친 뒤에야 小室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小室은 황윤석과 함께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고향의 집에 머물며 며느리 의 빈자리를 대신해야 했으므로 이재는 여전히 홀로 객지에서 벼슬살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소실을 들인 2년 뒤에 목천현감이 되어 어머니· 자식들과 함께 소실도 목천현에서 함께 기거하게 되었지만, 이 무렵 소실은 병 이 들어 현감생활 내내 치료를 받아야 하는 처지였다.
이재는 소실의 병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면서 의원을 초빙하고 탕약 을 제공하며 성심껏 소실을 보살폈고 소실 역시 병중에서도 안주인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목천현에서 파직되고 수년 간 고향에 머 물다가 다시 전의현감에 오르고 이듬해 최종적으로 벼슬을 떠나 고향에 머무를 때까지 소실은 이재의 곁에서 아내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주었고 이런 소실에 대해 이재는 고마운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This paper aimed to investigate the consciousness about spouse that Hwang, yun-seok(1729∼1791), who was local nobleman had at that time through the record, especially korean poetry written in chinese character, about his wife and concubine.
This paper was especially focused on the work that has been written to portrait his wife and concubine among his poetry. He married Changwon Chang, who lived in Namwon at the age of 20 and spent away from his wife for the state examination and academic from the age of 24.
He was in charge of the work of Jangneung Royal Tomb at the age of 38 from that time he lived far away from home for a long time so he left to his wife the housework.
He was in charge of the wor Because he could not support his parents and could not stand by his children he was very sorry about that. Furthermore, his wife had done all the housework so which had made him very sad and these feelings were emerged in his diary.
His wife had to endure great hardship such as delivery·stillbirth·the decease of children alone besides the housework while he lived far away from home. She died at the age of 48 in the hardship so could not enjoy the glory of his promotion to present governor together and he felt very sorry about that. So recalling the past with her he revered the memory of his wife when the birthday or anniversary of her death comes.
People advised him to have a concubine for housekeeping when he was in charge of the work of Jangneung Royal Tomb and he also was concerned about that but because of family problem and financial burden he couldn’t have a concubine until he had passed the time of Remembrance period for his wife.
As concubine had to support his mother instead of his wife, he still had to live far away from home alone. Fortunately, he could promote to the governor of Mokcheon two years later and could live with his family but concubine got sick and groan with pain.
He always had been concerning her disease and called in a doctor and dosed up her. Concubine, also, did her best to manage her family affairs. When he was be in a public office or not, she tended a home well so he was very appreciative of her efforts.

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혼례 무렵의 정황과 아내를 노래한 시
 Ⅲ.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추모
 Ⅳ. 小室에 대한 애정과 고마움
 Ⅴ. 나오는 말
 參考文獻
저자
  • 이상봉(부산대학교 한문학과) | Lee Sang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