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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의 목적은 목회자 아내의 자기불일치와 속박감이 우울에 미치 는 영향에서 영적안녕감의 조절된 매개효과를 검증하여, 목회자 아내의 우울을 위한 치료적 개입 방법을 찾고자 하는 데 있다. 목회자의 아내 302명을 대상으로 자기불일치 척도, 속박감 척도, 우울 척도, 영적안녕감 척도를 사용하여 설문하였다. 수집된 자료는 SPSS 25.0 프로그램과 PROCESS Macro 3.5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분석하였다. 본 연구의 결과 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자기불일치, 속박감, 우울은 각각 유의미한 정적 상관을 보였고, 영적안녕감은 자기불일치, 속박감, 우울에 유의미한 부적 상관을 보였다. 둘째, 자기불일치와 우울의 관계에서 속박감의 부분 매개 효과가 유의미하게 나타났다. 셋째, 자기불일치와 속박감의 관계에서 영 적안녕감의 조절효과를 확인하였다. 넷째, 자기불일치와 우울의 관계에서 영적안녕감에 의한 속박감의 조절된 매개효과를 확인하였다. 즉, 자기불 일치가 우울에 미치는 영향에서 속박감의 매개효과가 영적안녕감의 수준 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연구의 의 의 및 제한점과 후속 연구를 위한 제언을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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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2.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15세기 말 활동한 플랑드르의 대표적인 화가 쿠엔틴 마시스(Quentin Metsys, 1465/66-1530)의 초상화, <환전상과 그의 부인>(1514)에 관한 도상학적 연구 이다. 현재 파리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된 마시스의 <환전상과 그의 부인 Moneychanger and his wife>(1514)은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 앤트워프의 환경을 토대로 제작 된 그의 초기 대표적인 초상화이다. 당시 일상을 배경으로 작업을 한 마시스의 표현 대상은 얀 반 에이크, 페트루스 크리스투스의 초상화와 비교해 볼 수 있는 부분인데, 앤트워프 지역에서 활동하는 도시의 환전상에 주목한다. 특히 당대사회의 환전상의 역할과 시대의 이미지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소품과 대상이 작품의 의미를 비판적 시 각을 함축시킨 맥락으로 이해시키는데 중요한 알레고리를 제시한다. 이는 도시의 환 전상으로 일상적인 풍경의 재현을 넘어서 마시스는 작품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고찰 시키는 토대를 제공한 것이다. 이에 본 연구를 통해서 마시스의 <환전상과 그의 부 인>으로부터 환전상의 역할과 이미지의 알레고리로 제시한 금전과 권력, 부패와 타 락의 맥락을 바탕으로 당시의 일상에서 경제적 활동의 부흥과 함께 부의 의미를 상 징적으로 드러내는 환전상의 역할이 이 시기의 생활직업으로 얼마나 비중있게 다뤄 지고, 소재로 표현대상에 투영된 상징적 의미를 파악하여 마시스의 작품의 특성을 고 찰하고자 한다.
        6,900원
        3.
        2021.09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착한 여자’라는 이름의 억압, ‘나쁜 여자’라는 이름의 해방”이라는 구호 아래서, 현대 페미니스트들은 용감하게 자신들이 나쁜 여자라 불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들의 이와 같은 노력으로 나쁜 여자의 의미는 이전의 전통적인 의미를 벗어나 남성 지배적인 사회에서 여성의 권리와 지위를 찾기 위해 투쟁하는 여성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런 경향은 성서에 등장하는 여성 연구를 포함하여 인문학에서 나쁜 여자라 평가받았던 여성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본 논문은 「요한복음」 4장 1절에서 42절 사이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자와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 등장하는 바스의 여장부를 나쁜 여자를 재평가하려는 현대 페미니스트적 시각으로 분석해보고자 한다. 두 여자는 모두 다섯 번 결혼한 여성으로 기독교가 지배하는 남성 중심 시대상으로 볼 때는 분 명히 나쁜 여자였다. 하지만 현대 페미니스트적 시각으로 볼 때 이들은 도리어 여성이라는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당당하게 자신이 생각하고 배웠던 바를 이야기하고 투쟁했던 여성들로 재조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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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8.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paper is an attempt to understand George Yeats: who she was, how she lived, and what kind of relationship she had with the poet W. B. Yeats. Based on the recent biographical and critical studies of Elizabeth Butler Cullingford, Brenda Maddox, Ann Saddlemyer, and Margaret Mills Harper, the present writer tries to show that George Yeats was not only the devoted wife of W. B. Yeats and mother of their two children, but also the poet's literary and spiritual collaborator. The first introductory part of the paper deals with George Yeats's life until she married W. B. Yeats. Her birth and education, the first meeting with W. B. Yeats, and the establishing of a close relationship which, strengthened by common interest in occultism, led to their marriage in October 1917, are briefly surveyed. The paper then discusses the problem which arose from Yeats's unresolved sexual love for Iseult Gonne, and shows how George Yeats solved it by trying the automatic script at their honeymoon hotel. The automatic script, which saved George and W. B. Yeats at the critical moment, and dominated the early years of their married life, is mainly discussed in the next part of the paper. The paper first describes how it started, and then discusses the main issues related to it: why George did it, and whether it was "her hoax, a joint self-deception, or daimonic intervention" (Saddlemye xix), and how it affected W. B. Yeats's life and work. In order to see how W. B. Yeats expressed his feeling and thought about the automatic script in his poems, the writer of the paper reads "Solomon to Sheba," "Solomon and the Witch," and "The Gift of Harun Al-Rashid." The last part of the paper deals with George Yeats's life after the automatic script and the "sleeps" ended in summer 1922. Unlike the exciting and sexually intimate life of early five years, the later long years of her married life were very tiring and "problem-ridden." The paper discusses the major problems she had to face as wife of the great poet and mother of two children, and describes how she "lived through it with self-possession, with generosity, with something like nobility" (Elllmann xxv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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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1.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purposes of this study were to assess dietary intake obtained by easy method and to compare dietary behavior of house wife and female college students in Yanbian. The subjects consisted of 276 house wives and 228 female college students. Mean daily energy intake of house wives was 1926.0kcal and that of female college students was 1949.0kcal. Calcium intake as NAR(Nutrient adequacy ratio) was lowest in house wife and female college student. Iron intake was also low in subjects and lower in female college student than in house wife. Meal frequency per day was regular in subjects. Skipping meal time in subjects was breakfast and snaking time was late evening generally. Frequency of eating out was rare in most subjects and 60.6% of subjects preferred chinese food in eating out, while house wives preferred Korean food than female college student in eating out. The vegetables were preferred than meat or fish and used by fried in sauces. Hot and sour tastes were more like than greasy taste in subjects. Nutrient intake levels and dietary behaviors of house wife were to be like as those of female college students in general. BMI(Body mass index) was lower in female collage students than house wives, similarly in Korean. According to these results, house wives and female college students in Yanbian had similar dietary patterns. Calcium intake was tend to be low and dietary pattern was regular, dietary qualifies of subjects were adequate. Nutrient intake and dietary pattern in Yanbian were to be like as in Korean, and the Korean-Chinese in Yanbian maintained traditional dietary patte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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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6.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호남출신의 문인 頤齋 黃胤錫(1729∼1791)이 아내와 小室에 대해 남 긴 기록을 통해 그가 자신의 배우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어떻게 애정을 표현했는지 그의 한시를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당시 鄕儒가 가졌던 배 우자에 대한 의식의 일면을 알아보려 한다. 본고는 그의 시 중에서 특히 아내와 소실을 대상으로 지은 작품에 주목했다. 이재는 20세에 남원에 살던 창원 정씨와 혼례를 올렸는데 24세부터 과거와 학 업을 위해 아내와 떨어져 지냈고, 38세에 음보로 장릉 참봉의 일을 하게 되면서 부터는 더욱 긴 시간 동안 집안일은 아내에게 맡긴 채 객지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가까이에서 부모님을 모시지 못하는 아쉬움과 어린 자식들이 커나가 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지 못하는 서글픔 등과 함께 이 모든 가정사를 홀로 도 맡아 책임지고 있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그가 남긴 일기의 곳곳에 서 드러난다. 특히 아내는 일상적인 가정사 이외에도 이재가 객지에 머무는 동안 출산이나 死産·어린 자식의 夭折 등 큰 어려움들을 홀로 견뎌내야 했다. 이처럼 아내는 홀로 고생만 하다가 48세의 나이로 먼저 세상을 떠났고 따라서 이재가 현감이 되었을 때는 정작 그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없었다. 이재는 이점을 무엇보다도 아쉬워했고 그래서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아내의 생일이나 기일이 되면 지난 날을 회상하며 그녀를 추모하곤 했다. 남자가 홀로 객지 생활을 하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았기에 장릉 참봉 시절부터 주위 사람들은 이재에게 첩을 들여 의식주를 돌보게 하는 것을 권유했고 이재 역시 첩을 들이는 것을 염두에 두기는 했다. 하지만 가족들과의 관계나 경제적 인 문제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喪期를 마친 뒤에야 小室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小室은 황윤석과 함께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고향의 집에 머물며 며느리 의 빈자리를 대신해야 했으므로 이재는 여전히 홀로 객지에서 벼슬살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소실을 들인 2년 뒤에 목천현감이 되어 어머니· 자식들과 함께 소실도 목천현에서 함께 기거하게 되었지만, 이 무렵 소실은 병 이 들어 현감생활 내내 치료를 받아야 하는 처지였다. 이재는 소실의 병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면서 의원을 초빙하고 탕약 을 제공하며 성심껏 소실을 보살폈고 소실 역시 병중에서도 안주인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목천현에서 파직되고 수년 간 고향에 머 물다가 다시 전의현감에 오르고 이듬해 최종적으로 벼슬을 떠나 고향에 머무를 때까지 소실은 이재의 곁에서 아내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주었고 이런 소실에 대해 이재는 고마운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