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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이상필 교수가 2008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남명집󰡕의 초기 간본들과 관련하여 김윤수 씨의 설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필자를 비판한 데 대 한 응답이다. 이 교수는 문경호의 기유본 발문 중에서 “순찰사 유영순 또한 공 역을 도왔다.”는 한 구절을 鐵案으로 삼아, 이 구절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필자 를 비난하고 있다. 이것이 그들의 유일한 논거인 까닭에 필자는 남명학파의 초 기 역사와 관련된 다른 자료들에서도 경상감사가 서원의 일에 관여했다는 기록 은 모두 󰡔道先生案󰡕과 어긋남을 증거로서 제시했던 것이다. 만약 이러한 지적 이 이 교수의 주장에 치명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가 「덕천서원중건기」의 기록 을 왜곡하고 「신산서원기」 중 해당 부분의 贗作說을 제기하는 것과 같은 무리 를 범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남명집󰡕의 초간본이 임인년에 간행되었음은 기유본 발문에 명기되어져 있 으며, 󰡔고대일록󰡕 속에도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있다. 임인 전해인 신축년 (1601) 조에 ‘留寺看役’ 등 해인사에서의 간행 작업에 관한 기록들이 보이는 점 이 그것이다. ‘看役’ 또는 이와 유사한 표현은 이후의 󰡔고대일록󰡕에도 많이 보이 고 있는데, 그것들에서도 이 용어는 타인이 하는 작업을 감독한다는 의미로 쓰이 고 있으며, 정경운은 벗들이 모두 귀가한 후에 혼자 해인사에 남아 이러한 일을 수행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판각이 아닌 편집 작업의 의미로는 해석될 수 없다. 필자의 󰡔남명집󰡕 판본 연구도 이제 완결 단계에 접어들었으므로, 차제에 전체 판본 계통과 판본명에 대한 그 동안의 성과를 정리해 두었다.
        2.
        2006.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내암집󰡕 간행의 준비 단계에서 이루어진 여러 종류의 필사본과 기타 고문서들에 주목하여, 선조 시기 정인홍의 정치적 동향을 구명하는 것을 목적 으로 한다. 오늘날 정인홍은 주로 광해군 시기의 權臣으로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정 치적 생애의 대부분은 선조의 재위 기간에 해당한다. 정인홍은 문과에 응시하 지 않고 유일로서 발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조시기에 종6품에서 종2품에 이르는 당시까지 문과 출신자가 아닌 경우로는 전례가 없었던 현달한 관직에 두루 임명되었다. 선조 시기에는 그를 뒷받침해 줄 뚜렷한 정치 세력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카리스마의 원천은 무엇보다도 국왕의 신임에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신임의 배경은 강직하고 학식이 깊은 인물로서의 그의 명성이었 으며, 임란 시기의 의병활동이 보여준 애국심이었다. 그가 한사코 관직을 사퇴하고서 ‘山野의 신하’로 남고자 했던 것은, 무엇보다 도 당쟁 시대인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나아가 포부를 실현할 수 없다고 판단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국왕의 신임에 의거하여 사직소나 사은소 등의 형 태로 주어진 정치적 상황에 대한 발언은 계속하고 있었다. 그것이 이른바 산림 정치의 원형을 이루게 된 것이었다. 군주가 인물의 선악을 옳게 판단하여 군자 의 당을 자신의 측근으로 삼고 그들에게 핵심적인 권력을 맡겨서 소인의 당이 조정에 발붙일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당쟁 시대에 처한 정인홍의 일관된 정치적 주장이었다. 그가 선조시기에 이미 많은 정적들을 만든 것도 이러한 비 타협적인 정치노선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3.
        2000.0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本稿は南冥曺植の鄕里である嘉縣の板峴洞と南冥の「遊頭流錄」の末尾に出てくる獐項洞及び龍遊洞の位置についての近來の主張を批判的に檢討し,それを考證しようとするものである. 南冥一家の先瑩のある下板里の枝洞を板峴洞とする主張がうらが,當時の板峴洞は特に枝洞を指すというよりは,むしろ今日下板里とよ ばれる地域をあまねく稱したものである.松齋曺繼明は南冥の弟である桓の嫡孫であり,嫡子のなかった南冥は還曆を過ぎてから智異山の德山洞へ移り住もうとした時,承重卽ち祖先の祭祀を奉る責任とそれにまつわる先代の財産を桓に讓ったのであるが,その孫の松齋は壬辰 倭亂の時武功を立てて桓の後孫の中でもっと秀でた人物の一人である.彼は馬藏山の麓に住んだといわれるが,馬藏山は今日の下板村の向こう側にある小谷の終わりに位置する野山である.松齋は南冥の卒する四年前に生まれたので, 彼が幼年の頃馬藏山の麓に住んだとすれば,板峴洞の中心は今の下板村であったと見るべきである 下板村を除いて枝洞を含めた下板理の他の村はみな道路沿いに形成されている.從って, 我 はこれらの村がみな新しい道路の開設とともにできたのであり,完來の板峴洞はその上の方に上板村ができるにしたがって下板村とよばれるようになり,その故にもと板峴洞の中心であった村の名前にちなんでこの一帶がすべて下板里と名稱が變わるようになった,と推定することができる 龍遊洞は智理山のいろんな谷の中でも南冥がしばしば尋ねた所の一つであるが,これについては『晉陽誌』山川條に田頭西, 靑巖山にあると記されている.靑巖山は「大東輿地圖」に見えるが,それは今日の河東郡靑岩面と山淸郡矢川面との境をなしている主山あたりを指すものである. 田頭理とは今の河東郡橫川面の北側にある田垈理がその名前に由來するもので,『晉陽誌』が書かれた光海君ㆍ仁祖の頃にはこのあたりを含めた今日の靑岩面全體が田頭里と五臺里に屬していたようである.『晉陽誌』各里條の說明によれば田頭里は五臺里の南に位置し,五臺里よりその嶺域がはるかに狹かったことがわかる. 龍遊洞は田頭里の西にあるそうだが,問題は 「大東輿地圖」にみえる靑巖山がかえって五大里の北側に屬することである.この點については河受一の『松亭集』に收錄された「遊靑巖西岳記」を見るに,靑巖山とはある特定の山を指すのでなく,靑岩面の範圍に入る山全體に對する通稱であることがわかる.實はその中でも西岳, 卽ち七星峰の稜線がもっとも高く險しいので,その故に『晉陽誌』ではこれを靑巖山と呼んでいたのである.從って龍遊洞は大體靑巖山の麓であり田頭里の西側にあたる現在の明湖里ないしはその北側の坪村里ㆍ中梨里あたりの橫川江一帶を指するのといえる 獐項洞は『晉陽誌』の中のいろんな記述がら見て今日の大源寺溪谷にあり,その溪谷の途中,上流庵の下側より塔洞までにいたる長い谷を指すことがわかる.ここでいう塔洞とは山淸郡三壯面坪村里に今も殘る三壯寺址三層石塔に由來する地名であり,上流庵は今の大源寺あたりにあった寺刹である.だとすれば,當時一般的にいわれた獐項洞とは大源寺の下の方から塔洞にいたる峽谷地帶を意味するのであるが,河松亭は般石のある大源寺の上の方までを南冥の遊んだ獐項洞だと說明しており,溪谷の長さが三十餘里という場合の獐項洞はもっと廣く今日の大源寺溪谷全體を地稱したものであ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