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이상필 교수가 2008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남명집의 초기 간본들과 관련하여 김윤수 씨의 설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필자를 비판한 데 대 한 응답이다. 이 교수는 문경호의 기유본 발문 중에서 “순찰사 유영순 또한 공 역을 도왔다.”는 한 구절을 鐵案으로 삼아, 이 구절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필자 를 비난하고 있다. 이것이 그들의 유일한 논거인 까닭에 필자는 남명학파의 초 기 역사와 관련된 다른 자료들에서도 경상감사가 서원의 일에 관여했다는 기록 은 모두 道先生案과 어긋남을 증거로서 제시했던 것이다. 만약 이러한 지적 이 이 교수의 주장에 치명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가 「덕천서원중건기」의 기록 을 왜곡하고 「신산서원기」 중 해당 부분의 贗作說을 제기하는 것과 같은 무리 를 범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남명집의 초간본이 임인년에 간행되었음은 기유본 발문에 명기되어져 있 으며, 고대일록 속에도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있다. 임인 전해인 신축년 (1601) 조에 ‘留寺看役’ 등 해인사에서의 간행 작업에 관한 기록들이 보이는 점 이 그것이다. ‘看役’ 또는 이와 유사한 표현은 이후의 고대일록에도 많이 보이 고 있는데, 그것들에서도 이 용어는 타인이 하는 작업을 감독한다는 의미로 쓰이 고 있으며, 정경운은 벗들이 모두 귀가한 후에 혼자 해인사에 남아 이러한 일을 수행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판각이 아닌 편집 작업의 의미로는 해석될 수 없다. 필자의 남명집 판본 연구도 이제 완결 단계에 접어들었으므로, 차제에 전체 판본 계통과 판본명에 대한 그 동안의 성과를 정리해 두었다.
본고는 내암집 간행의 준비 단계에서 이루어진 여러 종류의 필사본과 기타 고문서들에 주목하여, 선조 시기 정인홍의 정치적 동향을 구명하는 것을 목적 으로 한다. 오늘날 정인홍은 주로 광해군 시기의 權臣으로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정 치적 생애의 대부분은 선조의 재위 기간에 해당한다. 정인홍은 문과에 응시하 지 않고 유일로서 발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조시기에 종6품에서 종2품에 이르는 당시까지 문과 출신자가 아닌 경우로는 전례가 없었던 현달한 관직에 두루 임명되었다. 선조 시기에는 그를 뒷받침해 줄 뚜렷한 정치 세력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카리스마의 원천은 무엇보다도 국왕의 신임에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신임의 배경은 강직하고 학식이 깊은 인물로서의 그의 명성이었 으며, 임란 시기의 의병활동이 보여준 애국심이었다. 그가 한사코 관직을 사퇴하고서 ‘山野의 신하’로 남고자 했던 것은, 무엇보다 도 당쟁 시대인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나아가 포부를 실현할 수 없다고 판단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국왕의 신임에 의거하여 사직소나 사은소 등의 형 태로 주어진 정치적 상황에 대한 발언은 계속하고 있었다. 그것이 이른바 산림 정치의 원형을 이루게 된 것이었다. 군주가 인물의 선악을 옳게 판단하여 군자 의 당을 자신의 측근으로 삼고 그들에게 핵심적인 권력을 맡겨서 소인의 당이 조정에 발붙일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당쟁 시대에 처한 정인홍의 일관된 정치적 주장이었다. 그가 선조시기에 이미 많은 정적들을 만든 것도 이러한 비 타협적인 정치노선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