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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安의 學問的 傳統과 晩醒 朴致馥의 역할 KCI 등재

The Learning Tradition in Ham-an & Man-seong Park, Chi-bok′s role

함안의 학문적 전통과 만성 박치복의 역할

  • 언어K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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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연구 (The Nammyonghak Study)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The Nammyong Studies Institute)
초록

咸安은 학문의 고장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데, 함안에 본격적으로 학자가 배출 되어 학문이 시작된 것은 조선 건국 이후부터이다. 高麗末 琴隱 趙悅과 茅隱 李 午의 咸安 정착이 咸安의 학문 興隆에 있어 하나의 큰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각 성씨가 함안에 기반을 잡아 번성함으로 인하여 그 후손 가운데서 많은 학자들이 나왔다. 朝鮮 宣祖朝에 寒岡 鄭逑가 咸安郡守로 부임하여 학문을 일으키고 교육을 장 려하고 󰡔咸州誌󰡕를 편찬한 것이 함안의 학문 수준을 높이고, 학문의 저변을 확 대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咸州誌󰡕를 통해서 그 당시 함안의 지식인들 에게 그 때까지의 함안 문화의 전모를 알게 하여 함안의 문화적 전통에 대한 자 부심을 느껴, 앞으로 문화를 가꾸어 나가야 하겠다는 사명감을 갖게 만들었다. 仁祖反正으로 침체되기 시작한 咸安의 학문은, 澗松 趙任道의 노력으로 급격 한 쇠퇴를 막고 현상을 유지할 수 있게 되어, 仁祖反正 이후에도 江右의 다른 고을과는 달리 학문이 단절되지는 않게 되었다. 澗松은 南冥學派와 退溪學派의 융합을 위해서 평생 노력한 학자인데, 간송의 노력으로 인해서 함안 지역은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퇴계학파나 남명학파 두 학파의 장점을 골고루 섭취하 는 이점을 갖게 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함안에서 저명한 학자나 비중 있는 저술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이 때 함안의 학자들은 書院 건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 尊賢과 講學을 통해 서 학문적 전통을 이어나갔다. 咸安에서 스승으로 삼을 만한 대학자가 나오지 않자,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함안에서 학문을 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 사람들은 慶尙左道나 畿湖地方으로 유 학을 가야만 하는 어려움이 있어, 자연히 대부분의 선비들이 향촌의 小儒로 침 체됨을 면하기 어려웠다. 조선말기 性齋 許傳이 金海府使로 부임하여 관아에서 講學을 하자, 배움에 목 말랐던 함안의 선비들이 구름처럼 몰려가 가르침을 들었다. 500여 명의 성재 문인 가운데서 90여 명이 함안 사람이고, 그 가운데서 문집을 남긴 문인만 해도 27명에 이르니, 함안의 학문은 성재의 敎導로 말미암아 완전히 중흥을 이루었 다고 말할 수 있다. 性齋의 문인들은 지금까지 간행하지 못했던 조상의 문집이나 實紀에 성재가 지은 序文을 얻어 간행하여 반포하고, 조상의 재실이나 정자에 성재가 지은 記 文을 붙이고, 조상의 산소에 성재가 지은 碑文을 얻어 새기는 등 先賢들의 學問 과 德行을 선양함으로 인하여, 묻혔던 함안의 학문이 단시일내에 다시 빛을 발 하게 되었다. 性齋의 문인 집단에서 좌장격인 晩醒은 性齋의 學統을 전수받아, 스승 性齋의 문집 간행과 성재를 享祀할 麗澤堂을 지어 성재의 학덕이 천추에 전할 수 있도 록 기반을 마련하여 敎恩에 보답하였다. 그는 또 定齋 柳致明의 제자이기도 한 데, 近畿南人學派의 실학적인 학문과 정통 嶺南退溪學派의 성리학적 특성을 잘 조화시켜 함안의 학문 경향을 정통을 지키면서도 실용적인 방향으로 가도록 했 고, 退溪와 南冥의 학문이 잘 조화를 이루도록 만들었다. 1937년을 하한선으로 할 때, 咸安의 학자들에 의해서 지어진 文集은 기록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약 200여 종에 이르고, 專著는 30여 종 되는 것으로 파 악되었다. 이 정도로 풍성한 著述이 나온 것은 咸安이 學問의 고장이라는 것을 확실히 증명하는 것이다. 이들 저술 가운데는 아직 간행되어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것이 많고, 개중에는 전란으로 인하여 간행되기도 전에 자취를 감춘 것도 적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앞으로 함안 학자들의 저술을 대대적으로 발굴하여 간행 보급하면, 함안에서 나온 文集과 專著를 현대의 많은 학자들이 본격적으 로 연구할 수 있게 되어, 함안의 역사와 문화가 새롭게 밝혀질 것이다. 특히 지 금까지 거의 방치하다시피 해온 朝鮮時代 咸安의 漢文學이 새롭게 조명되어 각 광을 받게 될 것이다.

Culture of Haman county included former Chilwon county, probably have begun since Alagaya dynasty have built. But most of documents had destroy by innumerable wars, so it is very difficulty to study the study and culture of Haman county in detail. However we can draw the deduction that at Alagaya dynasty peoples have already used Han characters freely, as many inscriped wooden tablets were excavated under gallery at Haman. At Haman county, the first instance that the scholars appeared and began to study was that Geumeun Choyul and Mochon Leeo have settled down in Haman. After that time, another family have gradually settled down following them, and henceforth the great number of scholars have come forth. Until King Sunjo, Chosun dynasty, Hangang Junggu has taken chief of Haman count, he began to promoted the studies of Haman and encouraged education of Haman. His this policy have made the study rank of Haman high and the lowest stratum of Haman study wide. Especially, he has compiled The local topography of Haman county which is the earliest local topography existing in our country. His compilation of the local topography of Haman county have made the scholars to know the traditions of Haman studies and cultures and have the senses of mission for cultivating Haman studies and cultures for the future. From reforming government by Injo, the studies of Kyeongsang province have declined, Haman county was not exception. Even though by the efforts of Gansong Choimdo, the studies of Haman have not cease to exist, from then great scholars have not appear and great works have not be written. But the scholars of Haman have kept building many oriental academies which scholars have worshipped ancient great scholars who have been born at Haman and they have discoursed academic subjects consistently. Because the tradition of Haman cultures have kept up. At the closing period of Chosun dynasty, Sungjae Heojun has taken chief of Gimhae count. as soon as he proceeded his new post, he started to lecture for scholars. They have dwelled in Keongsang Right province and have been thirsty for study long time. The disciple of Sungjae arrived 500 persons all total. Among them, disciple from Haman have arrived 90 persons. Among them, one have written his individual works arrived 29 persons. The studies of Haman could revival by completely education of Sungjae. Among disciples of Sungjae, Mansung Park Chibok was leader of that group. He have get handed down the scholastic mantle of capital and its environs school since Misu Heomok. After Sungjae’s death, Mansung has published his works, and has built memorial house which Sungjae’s disciples have keep worshipping for Sungjae, their respected teacher. Mansung was also the disciple of Jungjae Luchimung, who handed down directly from Toegae school of Yongnam. Because Mansung has harmonized the feature of capital and its environs school with Toegae school of Yongnam. Hence Haman studies contained the merits of two schools. Until 1937, the number of the works written by Haman scholars have arrived 200 kinds, and the monographs written by Haman scholars have arrived 30 kinds. As we have scrutinized, Haman has born many scholars and they have written many kinds of books. So we can conclude Haman is the county of study. If we will study these documents elaborately, we can prove the true character of Haman’study and culture.

목차
Ⅰ. 서론
Ⅱ. 咸安지역 학문의 역사적 고찰
1. 高麗 이전
2. 朝鮮前期
3. 朝鮮後期
4. 朝鮮末期
Ⅲ. 咸安의 학문과 晩醒 朴致馥의 역할
Ⅳ. 결론
저자
  • 許捲洙(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남명학연구소 책임연구원) | 허권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