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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종친은 국왕의 8촌 이내의 친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종친에게 종반직 을 수여하여 왕실구성원으로서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대우하였다. 종 친은 친진되어 종친의 지위에서 벗어나면 과거를 통해서 관직에 진출 할 수 있었다. 이것은 왕실구성원에서 사대부가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종친이라 하여 사회·경제적 지위가 한결같지 않았다. 관직 진 출의 통로인 문과·무과·생원진사시 합격자를 고루 배출한 왕자군파는 94개 왕자군파의 51%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합격자를 배출한 왕자군 파 내에서도 여러 갈래 지파로 나뉘기 때문에 사대부가로 정착한 집안 이 많은 편은 아니다. 본고에서는 정종의 10남 덕천군파 이유간 가계가 종친에서 사대부 가로 더 나아가서는 문관관료 가문으로 성장해간 과정을 통해서 종친 에서 사대부가로 변모해갈 수 있었던 요인들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덕 천군 이후생은 정종의 아들로 태어나서 친왕자로서 봉군되지 않았다. 이후생은 덕천정이란 종반직에 처음 제수된 후 1460년(세조 6)에 봉 군되었다. 그의 아들 이효백·이효숙·이효성·이효창 등은 모두 무예가출중하였으며, 장남 이효백과 3남 이효성은 세조 때에 무과에 급제하였 다. 덕천군 가문은 종친으로서 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 등 여러 국 왕의 신임을 받아 당대에 봉군되어 핵심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덕천군 집안은 명문가문과 혼인하여서 정치·경제·사회적으로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유간은 덕천군 장남 신종군 이효백-장남 완성군 이귀정-4남 함 풍도정 이계수 가계 계통이다. 함풍도정 이계수의 아들 이수광이 이유 간의 부친이다. 이수광은 종친의 지위에서 벗어난 정종의 5세손이었 다. 그는 관직에 나가지 못하였고, 국왕 친족이 들어갈 수 있는 특수 군종인 충의위에 입속되었다. 그에게는 3남 2녀가 있었는데, 3남인 이 유간이 생원시를 거쳐 관직에 나감으로 사대부가로서의 기반을 마련하 였다. 이유간이 관직에 나갈 수 있었던 요인은 생원 획득과 그를 문음으로 추천할 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수광이 정종의 5대손으로 충의위에 소속되는 데 그쳤기 때문에, 이유간과 그의 형제들이 가문을 배경으로 문음에 추천되기는 어려웠다. 이유간은 생원을 획득하여 문음 추천 대 상이 되었고, 그를 추천해 줄 현직 관원이 있었다. 즉 과거와 종친 가문 출신이었기에 형성된 왕실 친인척 그리고 관료 가문과의 인적 네트워 크가 그를 기신하여 관계로 진출할 수 있게 한 바탕이었다. 게다가 이유 간의 아들 이경직·이경설·이경석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서 관계로 나감으로써 이유간 가계가 사대부 가문으로 성장해갈 수 있는 탄탄한 기반이 되었다. 장남 이경직은 광해군대 관료 생활을 시작하여 어려움 이 있긴 했으나 인정반정 이후에는 평탄하게 관료 생활을 하여 당상관 에 올랐다. 3남 이경석은 문과에 급제한 후 7년 만에 당상관에 올른 탁월한 엘리트 관원이었다. 성공적으로 사대부가로 자리 잡은 후에도 이경직·이경석 후손은 지속적으로 생원진사시 그리고 문과에 합격하였다. 한 집안에서 3~4 대 연속적으로 문과급제자가 배출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경직·이경석 후손은 번갈아가며 각 세대마다 끊임없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러나 이들은 소론 핵심 관료이었기 때문에, 숙종 후반 과옥과 영조대 나주 괘서사건 등 노론과의 정쟁으로 집안이 멸문지경에까지 이르렀 다. 이러한 정치 상황에서 이경직 후손 중에는 학문에 몰두하여 양명학 을 연구하는 강화학파로 이름난 집안도 있었다. 18세기 후반 정조대 이유간 가계는 다시 문관 관료가 배출되기 시작하여 19세기 외척 세도 정치기에도 문관관료 가문으로서의 위상을 지켜갔다.
        2.
        200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경남 산청군 신등면 법물은 상산 김씨 가문의 세거지이다. 상산 김씨 가문은 이곳에 세거하면서 향촌 사족으로 성장하였으며, 관료들과 학자들을 다수 배출 하였다. 19세기 박치복, 허전, 이진상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섭렵한 학자 인 김진호도 그 중 한사람이다. 그는 법물의 이택당을 중심으로 강우지역 학자 들과 폭넓은 교유관계를 맺었으며, 물천서당 등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후학 양 성에도 힘썼다. 19세기 김진호가 학문 활동을 하던 시기의 고문서 1,709건이 김진호의 후손 댁에 소장되어 있다. 1,709건의 고문서는 간찰․만사․시문․제문․혼서․잡저․기문․서 문․발문․단자․상량문․행적기․고유문 등이다. 이들 1,709건의 고문서 가운데 약 64.2%에 달하는 1,097건이 간찰이다. 1,097건 간찰은 상당 부분 김진호에게 발신된 것이며, 또 󰡔성재집󰡕의 간행처로 사용되던 은낙재나 강학의 장소인 이 택당에 기거하던 학자들에게 발신된 간찰들도 있다. 그러므로 서로의 안부나 개인적인 용무를 위한 간찰도 있으나, 강우지역 학자들의 학문 활동과 관련된 간찰이 많다. 간찰은 문집에 실리기는 하지만 문집 편집자의 편찬 방향에 따라서 선별되고, 선별된 친필 간찰의 전문을 싣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강우 지역 학자들의 학문 활동을 볼 수 있는 친필 간찰은 사료적 가치가 크다. 그러 므로 간찰을 바탕으로 김진호를 중심한 강우 학자들의 교유관계, 학문 활동의 양상, 사회 현실의 인식과 대처에 대하여 정리하였다. 김진호는 혼맥에 의한 교유와 학문 활동에 의한 교유 관계를 유지하였다. 특 히 박치복, 허전, 이진상의 문인이었던 그는 강우 지역 학자들과 폭 넓은 교제 를 가졌는데, 허유․곽종석 등과 친분이 두터웠다. 상산 김씨 가문은 남인적 성향 을 가졌으나, 혼맥이나 학문 교유 관계에서는 노론과의 교유도 보인다. 학문 활 동은 각종 문집 간행과 강회를 통한 토론 등으로 대별된다. 김진호는 특히 허전 의 저서를 간행․중간하는데 관심을 많이 기울였는데, 그것은 특히 예론에 관심 을 갖고 실천하고자 한 김진호의 성향을 드러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강우 지역 학자들은 19세기 조선의 현실을 직시하였으나, 강우지역의 공론이 형성되지 않 아 현실 참여에는 적극적이지 못한 측면이 있다. 서구 사상에 대해서는 성리학 을 통해서 전통을 고수하고자 하는 경향과 적극적으로 서학을 탐구하고자 하는 경향 등 학자들의 다양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