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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 종친가문에서 사대부가로의 변모 -덕천군파 이유간 가계를 중심으로- KCI 등재

Transition from Royal Family to Literati Class in Choson Dynasty with Reference to a case of Lee Yu-Kan Family of Duckchon-Prince Clan

  • 언어KOR
  • URLhttps://db.koreascholar.com/Article/Detail/311260
  • DOIhttps://doi.org/10.14381/NMH.2015.12.30.48.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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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연구 (The Nammyonghak Study)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The Nammyong Studies Institute)
초록

종친은 국왕의 8촌 이내의 친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종친에게 종반직 을 수여하여 왕실구성원으로서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대우하였다. 종 친은 친진되어 종친의 지위에서 벗어나면 과거를 통해서 관직에 진출 할 수 있었다. 이것은 왕실구성원에서 사대부가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종친이라 하여 사회·경제적 지위가 한결같지 않았다. 관직 진 출의 통로인 문과·무과·생원진사시 합격자를 고루 배출한 왕자군파는 94개 왕자군파의 51%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합격자를 배출한 왕자군 파 내에서도 여러 갈래 지파로 나뉘기 때문에 사대부가로 정착한 집안 이 많은 편은 아니다. 본고에서는 정종의 10남 덕천군파 이유간 가계가 종친에서 사대부 가로 더 나아가서는 문관관료 가문으로 성장해간 과정을 통해서 종친 에서 사대부가로 변모해갈 수 있었던 요인들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덕 천군 이후생은 정종의 아들로 태어나서 친왕자로서 봉군되지 않았다. 이후생은 덕천정이란 종반직에 처음 제수된 후 1460년(세조 6)에 봉 군되었다. 그의 아들 이효백·이효숙·이효성·이효창 등은 모두 무예가출중하였으며, 장남 이효백과 3남 이효성은 세조 때에 무과에 급제하였 다. 덕천군 가문은 종친으로서 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 등 여러 국 왕의 신임을 받아 당대에 봉군되어 핵심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덕천군 집안은 명문가문과 혼인하여서 정치·경제·사회적으로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유간은 덕천군 장남 신종군 이효백-장남 완성군 이귀정-4남 함 풍도정 이계수 가계 계통이다. 함풍도정 이계수의 아들 이수광이 이유 간의 부친이다. 이수광은 종친의 지위에서 벗어난 정종의 5세손이었 다. 그는 관직에 나가지 못하였고, 국왕 친족이 들어갈 수 있는 특수 군종인 충의위에 입속되었다. 그에게는 3남 2녀가 있었는데, 3남인 이 유간이 생원시를 거쳐 관직에 나감으로 사대부가로서의 기반을 마련하 였다. 이유간이 관직에 나갈 수 있었던 요인은 생원 획득과 그를 문음으로 추천할 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수광이 정종의 5대손으로 충의위에 소속되는 데 그쳤기 때문에, 이유간과 그의 형제들이 가문을 배경으로 문음에 추천되기는 어려웠다. 이유간은 생원을 획득하여 문음 추천 대 상이 되었고, 그를 추천해 줄 현직 관원이 있었다. 즉 과거와 종친 가문 출신이었기에 형성된 왕실 친인척 그리고 관료 가문과의 인적 네트워 크가 그를 기신하여 관계로 진출할 수 있게 한 바탕이었다. 게다가 이유 간의 아들 이경직·이경설·이경석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서 관계로 나감으로써 이유간 가계가 사대부 가문으로 성장해갈 수 있는 탄탄한 기반이 되었다. 장남 이경직은 광해군대 관료 생활을 시작하여 어려움 이 있긴 했으나 인정반정 이후에는 평탄하게 관료 생활을 하여 당상관 에 올랐다. 3남 이경석은 문과에 급제한 후 7년 만에 당상관에 올른 탁월한 엘리트 관원이었다. 성공적으로 사대부가로 자리 잡은 후에도 이경직·이경석 후손은 지속적으로 생원진사시 그리고 문과에 합격하였다. 한 집안에서 3~4 대 연속적으로 문과급제자가 배출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경직·이경석 후손은 번갈아가며 각 세대마다 끊임없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러나 이들은 소론 핵심 관료이었기 때문에, 숙종 후반 과옥과 영조대 나주 괘서사건 등 노론과의 정쟁으로 집안이 멸문지경에까지 이르렀 다. 이러한 정치 상황에서 이경직 후손 중에는 학문에 몰두하여 양명학 을 연구하는 강화학파로 이름난 집안도 있었다. 18세기 후반 정조대 이유간 가계는 다시 문관 관료가 배출되기 시작하여 19세기 외척 세도 정치기에도 문관관료 가문으로서의 위상을 지켜갔다.

Royal Family was confined strictly within the relatives of King under 8th nodes. They were so awarded Royal Class Jobs that they could get along in order to maintain their due respects. Once they were out beyond the royal nodes, then they were allowed to take National Examination for Officials, which means they became general literati class. Usually, they were genealogically called by the prince name whose node was, for the first time, splitted out of the royal domain. Even though they were included within Royal Family, there were no equal treatment socially and economically. Statistics shows that only 51% of prince related clans out of 94 groups could be successful in acquiring official positions through National Examination Systems such as Saengwon and Jinsa(the first ladder to pass literary licentiate examinations through Confucian Classics and Literature each), Munkwa and Mukwa(the final ladder of civil and military examinations). It was not usual and easy, then, to transit in success to literati class.This paper presents a typical case of successful transition tracing back on Lee Yu-Kan’s family who was a descendant of Duckchon-Prince, the 10th son of Chongjong(1357~1419), the 2nd King of Choson Dynasty. Duckchon-Prince Mr. Lee Hu-saeng was originally nominated as a post of Duckchon Jung. Later, in 1460, he was enfeoffed as a prince by the 7th King Sejo. His four sons were given an important military post because of their martial talents. Duckchon-Prince clan members were very considerate to preserve their privileges in political, economic, and social status through marriage bonds with famous families at that time.Lee Yu-kan, the 3rd son of Lee Su-Kwang, passed the first ladder of Civil Examinations whose father was a mere soldier of Royal relative regime. He was lucky to be recommended to an official post by personal networks, soon after he passed it. In addition all his three sons, Kyung-jik, Kyung-seol, and Kyung-seok, were successful in their Civil Examinations and the 1st and 3rd sons each had ascended, at last, to senior official positions. Their achievements in fame and glory became solid ground for their offsprings to get inherited. Moreover, every other generations of their descendants also passed the examinations and they grew to be core members of So-ron political party. Their prosperities had lasted until they were defeated by such factional conflicts with opposite parties as no-ron. Some of the offsprings committed themselves in learning a new trend from China such as Wang Yangming School and gained their name, Kangwha School. After 18 century on, Lee Yu-kan family members began to take part in official jobs, reestablishing their names again, through next

저자
  • 원창애(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 Won, Chang-Ae